❀tiny mini flowers❀ 스물두 번째 이야기
ny mini flowers
크리스마스 다음날부터 4박 5일 동안 엄마랑 치앙마이 여행을 다녀왔다. 몸도 마음도 많이 지쳐 있었던 터라 여행을 가는 것도 썩 신나지만은 않았다. 비행기를 타고 어딘가 가는 것도, 비자를 신경 쓰고 외국어를 쓰는 것도 그냥 다 신물이 나버렸달까. 새로운 것에 대한 기쁨 보단 낯선 것에 대한 부담감이 컸다. 그렇게 무겁게 도착한 치앙마이는 추웠다. 기분 좀 내보겠다고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입고 갔는데, 이렇게 추울 줄이야. 12월의 치앙마이가 쌀쌀하다고는 했지만 그래봤자 양곤이랑 비슷하겠지 싶었는데 꽤 추웠다. 덜덜 떨며 엄마를 기다렸다. 엄마랑 비행기 시간이 몇 분 차이가 나지 않아서 짐을 찾아 나가지 않고 입국 심사하는 곳 근처에서 기다렸다. 생각보다 오래 기다렸는데도 엄마가 나오지 않았다. 이 기다림에도 지쳐갈 때 저기 초록색 가디건을 입은 엄마가 보였다.
"엄마!" 하고 부르자 엄마는 나를 보고 두 팔을 벌리며 뛰어 왔다. 처음으로 혼자 해외를 나오는 거라 잔뜩 긴장하고 있었는데 나를 보니 안심이 되고 반가웠다고 했다.
엄마랑 호텔로 갔다. 호텔은 사진과 다르게 어둡고 낡았다. 며칠을 애써 고른 호텔인데 깜짝 놀랄 정도로 낡고 지저분한 상태를 보니 마음이 또 가라앉았다.
"너무 좋다!!" 엄마가 외쳤다. "낡긴한데 넓네! 괜찮아! 우리 잠만 잘 거잖아! 우리 뭐 입고 나갈까? 엄마가 또 예쁜 옷을 가져왔지~" 하며 한국에서 사 온 옷들을 나열했다. 나에게 주고 가려고 옷들을 새로 사 왔다고 했다. 엄마가 커플로 사 온 원피스를 입고 여행을 시작했다. 가고 싶었던 복합예술공간에도 가고, 정말 비싼 파인다이닝도 다녀왔다.
엄마랑 이런저런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엄마는 참 강한 사람이다. 어렸을 땐 엄마의 강함이 내게 상처가 되기도 했었는데, 지금은 그 강함이 내 위로가 된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올곧게 버티며 뚫고 나아가고, 더 나아가 사람들을 품는 그 힘을 보면 엄마 딸인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아 힘이 난다. 엄마랑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눈치 볼일 없이 거를 것 없이 마음껏 나누었다. 7월 아빠와의 방콕여행 때도 느꼈지만 대화할 수 있는 부모를 두었다는 것은 내 인생의 가장 큰 복이다. 그렇게 안에 차 있던 압력이 조금씩 빠져나감을 느꼈다.
공원처럼 야외에 의자와 테이블을 놓고 앉아 있을 수 있는 카페에 갔다. 그늘 아래 자리를 잡고 세 시간을 앉아 있었다. 나무 그늘 아래 앉아 선선한 바람을 살결로 느끼며 별생각 없이 가만히 앉아 저-기 있는 나무가 흔들리는 것을 보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를 보니 내가 사는 삶이 멀어 보였다. 문장이 좀 이상해 보이지만 이 표현이 내가 느낀 것과 가장 유사한 것 같다. 아등바등, 현실이라는 어두침침하고 우울한 분위기 속에서 해야 하는 것과 하고 싶은 것들을 가득 안고 복작거리며 살다 보니 거리 조절에 실패했다. 내 속도를 감당하지 못해 '어어,,,'하다가 코를 푹! 박아버리고 고꾸라진 나와 다르게 나무는 단단히 뿌리내리고 서서 살랑이고 있었다.
잔뜩 압력이 차 답답했던 내 안에 한 줄기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았다. 몸에 힘을 빼고 의자에 더 깊이 체중을 실었다. 왜 기분을 '환기'한다고 표현하는지 비로소 느낀 순간이었다.
저 아름드리나무가 우리 엄마아빠 같았다. 어떤 풍파에도 단단하게 중심을 잡고 있었고 그 중심이 단단하기에 이파리의 흔들림이 아름다워 보인다. 고난이라 여겨지는 것들을 받아내고 나니 그 그늘에 사람들이 모여 위로를 받는다. 나도 그 그늘 아래서 쉬었다. 내게도 저런 단단한 뿌리가 있겠지, 바람에 쓰러지지 않고 춤을 추는 사람이 되어가겠지, 나의 짙은 그늘 아래 누군가 와서 쉬고 위로를 받겠지 싶었다.
2025.01.06
새해가 되었다. 여행을 다녀오고 기쁜 마음으로 출근도 했고 교회 일도 했다. 별 것 없는 나지만 쓰임 받고 사랑받음에 감사하다. 불평보단 감사가, 냉정함보단 지혜로움이, 조급함보다는 인내와 사랑이 더 비중 있는 새해가 되기를 소망한다.
최근 군인이 길을 지나가는 한국인을 불러 폭행하고 돈을 뺐었다는 소식을 듣고 남편은 걱정이 늘어졌다. 진심으로 내게 Tiny mini flowers을 시즌1로 종료하고 상황이 좋아지면 다시 하는 것이 어떠냐고 강권했다. 남편이 오죽 걱정되면 저럴까 싶어서 말을 들어야겠다 싶은 생각도 들지만 직접 다니는 내가 느끼기엔 위험하지 않은 것 같고 무엇보다 이젠 우리를 기다리고 그 시간을 좋아하는 아이들을 생각하니 쉽게 포기가 안 된다.
일단 오늘은 E와 약속을 이미 잡아 놓은 터라 다녀왔다. E 말고 O도 얼떨결에 우리를 따라왔다. 레단에 갈 일 있다고 같이 택시를 타고 왔다가 조금만 같이 있다가 가겠다고 하더니 끝까지 있었다. 아이들을 찾아 육교를 갔는데 처음 보는 가족들이 있었다. 부모로 보이는 어른들이 아이들을 끼고 있고 짐도 있는 걸 보니 혹시 국내실향민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른들이 경계하고 있는 것 같아 패스하고 아이들을 자주 만나는 골목으로 향했다. 역시나 아이들이 모여 있었다. 그중에 눈에 익은 여자 아이를 만났다. 우리를 보자마자 "나도 공부 가르쳐줘요." 했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글자를 가르쳐준다는 소식을 들었나 보다. "오늘은 책 말고 다른 거 가져왔어! 같이 할래?" 하고 가져온 것을 보여줬다. 아이들은 "좋아요!"를 외치며 우리에게 더 가까이 다가왔다.
바로 옆에 사람들이 많지 않은 골목이 있어서 자리를 옮겼다. 한국에서 사 온 포일아트 세트를 꺼내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아이들은 도안을 고르며 시작도 전에 폴짝폴짝 뛰어댔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니 아이들은 곧잘 했다. 생각보다 잘해서 기특했다. 반짝이는 포일을 끈적거리는 곳에 붙였다가 떼어낼 때마다 아이들은 활짝 웃으며 좋아했다. 우리에게 이것 좀 보라며 계속 부르고, 급한 마음에 스티커가 안 떼어진다며 떼어달라, 무슨 색이 없다며 더 달라 정신이 없었다.
다여섯명이 앉아 집중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골목이 순식간에 유치원이 된 것 같았다. 칙칙한 콘크리트 바닥이라 반짝이는 그림들이 더욱 빛이 났다. 아이들의 얼굴이 나오지 않게 사진을 찍고 있는데, 완성한 아이가 자기 사진을 찍어 달라고 했다. 배시시 웃으며 자기가 완성한 그림을 보여주는 아이를 보니 빛이 났다. 소문을 들었는지 다른 아이들이 한 명 두 명 우리를 찾아왔다. 한 명이 끝내고 가면 한 명이 새로 오고, 두 명이 끝내고 가면 두 명이 새로 왔다. 아이들과 함께 쪼그려 앉아 있으니 다리가 저리다 못해 약간 부서질 것 같기도,.. 했지만 어쩌겠는가! 의자를 가져오지 않은 내 탓이다. 다음에 이런 활동을 하는 날이라면 의자도 챙겨 와야겠다. 이럴 때 쓰겠다고 접이식 의자를 사놨으면서 제대로 써보질 못했다.
루틴처럼 활동을 끝낸 아이들은 사진을 찍어달라며 가까이 다가왔다. 나야 고맙지! 귀여운 아이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아이들 중에는 멀리 사는 아이도 있었다. 매일 학교가 끝나면 버스를 타고 레단에 와서 쓰레기를 줍는 일을 한다고 했다. 커다란 쓰레기 자루를 들고 우리 옆에 다가와 가만히 지켜보고 있길래 "같이 할래?"하고 물어보니 얼른 자리에 앉아 고개 한 번 들지 않고 누구보다 집중하며 꼼꼼히 그림을 완성했다.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었던 아이 같았다. 그때도 커다란 쓰레기 자루를 옆에 두고 가방 색칠하는 것에 열중했었는데, 이런 미술 활동을 좋아하고 잘하는 아이인가 보다. 다음에 만나면 좀 더 할 수 있는 것들을 주고 싶다.
15세트를 가져왔는데 1시간 동안 그걸 다 썼다. 활동을 마친 아이들은 "집에 가지고 가도 돼요?" 묻고는 "당연하지!" 하는 답변에 폴짝폴짝 뛰며 좋아했다. 그림을 가슴에 하나씩 끌어안고 돌아가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보며 E는 "아이들이 이렇게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니 너무 행복해요."라고 했다. 끝까지 함께해 준 O에게 오늘 같이 해줘서 고맙다고 하니 이런 좋은 일을 덕분에 하게 되어서 더 고맙다고 했다. 오늘 열다섯 명의 아이들을 행복하게 해 줬다는 것에 행복하다. 나도 E도 O도 행복했으니 오늘 열여덟 명이 행복했다.
어쩌면 이 아이들이 우리의 그늘에서 쉬고 위로받는 존재들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그늘에서 쉬고 위로받는다. 일주일에 한두 번 잠시 왔다 가는 이 찰나의 시간에 너무 많은 의미부여를 하나 싶기도 하지만, 인생은 의미 부여하기 나름 아닌가. 우리는 서로의 그늘에서 잠시나마 쉬고 위로받고 행복했다.
연말 여행도 다녀왔고, 새해도 시작되었다! 올해에는 어떤 일들이 우릴 기다릴까. 그것이 무엇이든 작년보다 더 단단히 뿌리내리고 바람에 살랑이기를 기대한다. 더 많은 이들이 우리의 그늘에 쉬었다 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