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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utumnlim Jul 12. 2022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긍정의 배신

피로사회(한병철)를 읽고

책의 대부분에 공감하며 읽었지만, 심히 낙관적인 결론은 별로 공감이 되지 않았다. 


내가 이해한 만큼 내용을 요약해보자면, ‘해야 하는 것’‘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명료했던 ‘규율 사회’에서 ‘할 수 있는 것’만 남은 ‘성과사회’로의 전환은, 현대인의 잦은 신경증적정신적 질환의 배경이 된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를 ‘면역체계’에 비유하였는데, 과거의 규율 사회는 외부에서 침투해오는 바이러스적 질병을 주로 앓았다면, 현대의 성과사회는 긍정의 과잉으로 인한 ‘비만’에 의해 스스로의 면역체계를 파괴하여 자멸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는 사회문화적 맥락을 이해하면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정형화되고 기계적인 과업에서 다양하고 창의적인 서비스가 중시되는 후기 산업 사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다양해져버린 개인들의 욕구와 능력에 대해 일률적으로 규제하며 통제하는 것보다, 그들을 ‘자유롭게’ 두고 무한의 성과를 요구하는 것이 보다 효과적이고 효율적이다. 


이러한 사회 속에서 우리의 자아는 '억압의 기능'을 잃어간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회에서 억압은 불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할 수 있는 무한한 것들' 사이에서 '할 수 없는, 하지 못하는 나의 현실의 자아'는 좌절하고 고갈된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 속에서 자책과 자괴에 치닫는 것이다. 스스로 가해자임과 동시에 피해자가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한 치료책으로 저자는 ‘깊은 심심함’‘보는 법의 교육’을 제시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깊은 심심함’에 깊은 공감을 했다. 나는 나를 포함한 요즘 사람들이 ‘심심 병’에 걸린 것 같다고 종종 표현하곤 한다.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모든 오감을 채워야 하는, 채웠음에도 언제나 부족함과 심심함을 느끼는 강박적인 분주함에 나는 지쳐 병들었기 때문이다. 

깊은 침묵과 사색이 필요하다. 그 고요함의 무게를 이겨내며 현상의 내면과 본질을 들여다볼 수 있는 잔잔함이야말로 지금 내가 앓고 있는 대부분의 신경증적 질환 증상의 훌륭한 처방이 될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할 때, 모든 것을 하지 않을 수 있는 용기야말로 진정한 자유 실현이라고 생각하고 말이다. 깊은 심심함 속에서 평온하게 부유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면역이 자라 저항감을 생기고, 실재를 통한 주체적 ‘보기, 생각하기, 말하고 쓰기’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아, 그래서 결국 저자가 예견하고 있는(지향하고 있는) 피로사회에서 '피로'는 한트케의 '피로'를 빌려와 설명된다. 그가 말한 "근본적 피로"는 탈진상태와 전혀 다르며, 영감을 주고 정신이 태어나게 한다고 한다. 이런 영감을 주는 피로는 부정적 힘의 피로, 즉 무위의 피로다. 쓸모없는 것의 쓸모가 생겨나는 것, 놀이의 시간이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이는 지금까지 비판했던 매우 분주한, 부정성이 없는 현대인들이 진정 누릴 수 있는 현실적 피로인가? 하는 반문이 들게 한다. 만족과 기준이 없는, 긍정의 과잉 상태의 존재가 누릴 수 있는 피로는 결국 탈진에 불과하다고 지금껏 주장한 것 같은데, 이 갑작스러운 새로운 정의의 피로의 제시는 성급한 이상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저자가 예시로 든 ‘오순절 모임’도 결국 활동 사회(성과사회)의 반대편에 놓여 있다고 쓴 것이 이 자기모순을 확실히 보여준 것이 아닐까 싶다. 오순절 모임원들은 한 가지에 집중했고, 신(하나님)이 제시한 기준이 있었으며, 이에 따라 확실한 보상받을 수 있는(확신이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누릴 수 있었던 피로는 근본적 피로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이 책이 성과사회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하나의 기준과 확실한 보상을 제공하는' 하나님을 따라야 하는 이유를 제시하는, (갑자기??) 기독교 서적이라던가 종교 서적이라면 좀 말이 될 수도 있겠지만...(저자가 기독교인이 아닌걸로 알고 있다.) 그것이 아니라면(그리고 내가 이해한 맥락이 맞다면) 이러한 비약적 결론은 이상 사회에 대한 무책임한 낙관론적 제시라고 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책을 읽으며 저자의 똑똑함에 감탄했다. 나는 피로함을 잘 느낀다. 물론 내가 느낀 피로함은 근본적인 피로함이 아니다. 그저 소란스럽고 끝이 없는, 오직 정신승리만이 살아갈 이유를 던져주는, 2n년째 정 안 가는 세상에서 나는 항상 지쳐있었다. 이렇게 복합적인 피로감과 우울, 불안함, 무기력함을 '면역'이라는 시스템으로 비유하여 설명하다니, 역시 사람이 똑똑하고 공부를 해야 하는구나 다시금 느꼈다. 


그리고 내가 믿는 하나님이 왜 그저 어떤 나약한 사람들의 정신승리의 발판이자 안위의 대상을 뛰어넘는지 또한 새삼 느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한 가지에 집중하도록 만드신 것이다. 애초에 창조주는 우리를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에, 점차 신을 배제하고, 종교, 규칙, 이론 등을 넘어 야생마처럼 날뛰는 것을 자유라 정의하며 선망하는 요즘 사회는 병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자유'는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이 많음은 상태가 아니다. 그 외의 것, 즉 수많은 선택지 앞에서 '선택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 진정한 자유인 것이다. 돈이 많고 시간이 많고 능력이 많아야지만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그것이 있던 없던 자유로울 수 있는. 만족하고 자족하는 삶. 


진정한 자유, 근본적 피로. 그것이 내게 있는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진다. 

(                지금까지의 삶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긴 너무 어려워 괄호를 쳤다.                 ) 이런 나 스스로에게 너는 진정 자유로운가 묻는다면 아직까지는 아니라고 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점점 자유로워지고 있다고는 답할 수 있다. 근본적 피로... 지금 내 삶은 무쓸모를 쓸모 있게 여기는 것에 집중되어 있기에 어쩌면 이 것도 가까워졌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기준이 없어 보상도 없는 사회이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동일한 사회. 외부의 문제보다 내면의 문제로 인해 죽어나가는 사회이다. 나도 나의 내면의 문제로 몇 번이고 죽었었다. 그때마다 나를 살렸던 것은 하나님이었다. 기준이 없다고 말하는 세상에서 불변의 기준을 제시하셨고, 내 성과 이상의 성과와 최최최대한의 능력을 요구하면서 확실한 보상은 약속하지 못하는 세상에서 내 있는 그대로의 존재를 인정하며 이미 모든 것을 보상하셨다. 가해하는 나와 피해당하는 나를 둘 다 보듬으시고 각자를 회복하게 하셨던 분이 하나님이셨다. 빈틈없는 소음 속에서 익사하고 있는 나를 건져 침묵 속에 두어 회복하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셨다. 나는 그 처절한 침묵 속에서 그의 얼굴을 봤고, 내 갈 길을 보았다. 나는 평안을 누렸고, 오순절의 제자들처럼 근본적 피로를 경험하며 쉴 수 있었다. 


나는 지금이 다시금 그 침묵 속에 들어가야 하는 때라고 생각한다. 

노오력만 하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세상에서 타인과의 경계마저 허물어질 정도로 비만이 되어버린 내가, 이제는 다이어트를 결심할 때가 된 것이다. 하나에 집중하고, 심심함 속에 나를 내버려 두고, 근본적인 피로 속에서 쓸모없는 것의 쓸모를 누리는 그런 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의 ‘피로사회’가 내게 임하길 간절히 바란다


(코로나19 이후로 많은 사람들이 탈진의 상태에서 벗어나 근본적 피로를 누리는 삶으로 이동해 가려는 몸부림이 종종보인다. 늘 노오력과 최선을 다하지만 보장되지 않는 성공, 성공에 대한 얄팍하고 경박스러운 획일화된 정의들, 게으름과 노오력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과하리 만치 확실히 보장되는 댓가들에 대한 회의감과 뭔가 잘못됐다는 의심이 기침처럼 참을 수 없이 튀어나온다. 하지만 이 몸부림이 이끄는 곳은 근본적 피로가 아닌 또 다른 탈진 시스템일지도 모른다. 내가 어디를 향해 가는지, 생각하며 가지 않으면 가는대로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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