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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utumnlim Jul 26. 2022

미얀마가 내게 특별한 이유_ 7년 전 첫 번째 미얀마행

[우리들의 글루스] 매일 기록하기 07/10

대한민국 학생들의 뻔한 방황의 이유  하나인 '입시 실패' 나도 꽤나 인생이 썼던 시절이 있었다. 이과생으로 수리 가형을 수능으로 봤는데, 정작 내가 입학한 학교는 문과 대학으로 수리 점수를 전혀 보지 않는 곳이었다. 아동학과로 간신히 인서울은 했지만, 이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은, 그런 좌절감이 대학 시절 내내 나를 사로잡았다. 내가 망친 수능으로 얼떨결에 넣어 붙은 이 대학에서 나를 수석이라 입학시켜주니 더 기분이 나빴다. 턱걸이로 가도 모자랄 판에 지금 내가 이런 학교를 문 열고 들어왔다니? 하는 어이없음. 내가 수석이면 여기 다니는 애들은 대체 뭐야? 하는, 섞이고 싶지 않은 교만한 마음. 심지어 이과생이었던 내게 문과논술식 시험은 성적 받기가 어려웠고, 반 남녀 비율이 9:1이었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의 성비로 소위 ‘여자여자한’ 집단에 입학해 적응하기는 도무지 쉽지 않았다.


결국 2 내내 부적응으로 어려움을 많이 겪었고, 방황하다 2학년을 마치고 휴학을 했다. 휴학을 하고 필리핀, 영국을 다녀왔다.   교회에서 가는 단기선교 프로그램이었는데, 해외 경험이 거의 없었던지라 일단 해외에 나간다는  자체가  좋은 경험이었다. 7 즈음인가 남은 휴학 기간을 어떻게 보내지, 고민하던 차에 부모님 친구 부부께서 미얀마에 살고 계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전공은 아동학과 사회복지학인데, 그분들이 미얀마에서 유치원을 운영하고 계시니 가서 아이들을 직접 경험해보고  전공들을 계속할지 말지 결정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분들 입장에서는 봉사자가 오니 좋고, 나는 복학  전공 경험을 조금이나마 해볼  있으니 좋다는 생각 하나로 남은 휴학 기간을 탈탈 털어 5개월 동안 미얀마에 다녀오기로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겁도 없었다. 이 짧은 결심이 내 인생을 바꾸게 될 줄이야. 


해외에 그렇게 오래 나가서 살게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심지어 보호자도 없이 혼자! 비행기 경유도 처음이었고 비자가 필요한 나라에 가는 것도 처음이었다. 모든 것이 처음이라 두렵고 낯설지만 이 번에 내가 결단하지 않으면 또다시 무의미하다고 여겨지는 대학생활을 어쩔 수 없이 이어가야 한다는 생각에 '그럴 순 없지!' 하고 마음을 다잡았다. 어쩔 수 없이 꾸역꾸역 졸업한 아동학과 사회복지학 졸업장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결국 아동과 클라이언트들을 만나야 하는 직업을 가져야 할 텐데 내가 이렇게 무의미하다 느끼고 행복하지 않으면서 그들을 진심으로 위하며 일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렇게 처음 미얀마에 가서 부모님 친구 부부가 운영하시는 사립 유치원에서 일했다. 사실 유치원이라기보단 보육원에 가까운, 빈민촌에 있는 작은 공간이었다. 빈민촌에서는 첫째들이 학교도 가지 못하고 일 나간 부모님 대신 동생들을 줄줄이 키워야 하는 경우들이 너무나 많다. 그러다가 일찍 시집보내고, 험한 일 하는 곳으로 보내지는 일이 다반사다. 그래서 그분들은 저소득층 부모들이 영유아 자녀들을 저렴하고 안전하게 맡기고 학령기 자녀들의 공부를 봐줄 수 있는 유치원 겸 방과 후 학교를 운영하시게 된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수준은 아주 낮았다. 미얀마는 유아교육과가 없어서 사회복지부에서 운영하는 한 달짜리 교사 교육을 수료하면 교사가 될 수 있었다. 그래서 그곳의 선생님들은 전문 지식은 당연히 부족했고,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과 돈을 벌어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일하는 분들이었다.


당시 나는 미얀마어를 전혀 할 줄 몰랐기 때문에, 영어로 주 3회 활동 계획안을 작성하고 수업을 준비해서 현지 교사들에게 공유했다. 그러면 현지 상황에 따른 피드백을 받아 수정을 하고, 그분들이 미얀마어로 수업을 진행했다. 처음에는 어린 외국인 여자가 와서 관여한다는 것에 거부감이 있었다. 아무래도 말도 못 하는 외국인이 계속 유치원에 있으면서 참견하는 것 같아 보일 수 있었겠다. 하지만 최대한 현지에 맞게 맞춰가려는 계획안과, 없는 살림에도 열심 가득 수업을 준비하는 모습에 마음이 열렸던 것 같다. 그리고 '이렇게 가르치면 아이들이 좀 배우는 게 많아지는구나' '이거 꽤 괜찮네?'를 몇 번 경험하자 내게 본인들은 못 배워서 몰랐던 것이라고, 더 알려달라고 먼저 이야기해주며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렇게 나는 5개월 동안 유치원의 연간 교육계획안, 주간, 일일 교육계획안을 모두 작성했다. 고작 2년 배운 부족한 학부생이지만 그 약간의 지식마저 이렇게 잘 쓸 수 있다니 감사했고 쓸모 있는 사람이 된 것 같아 행복했다.

간단한 미얀마어도 배웠다. 유치원에서 쓸 수 있는 간단한 단어들과 문장들, 그리고 아이들의 말을 다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알아듣는 척 반응해주는 추임새들...(미안하다 아가들아...)


파일로 정리한 계획안들
연간 계획안

미얀마에 오자마자 걸린 뎅기열 때문에 면역력이 떨어져 장염에 위염에 감기에 뭐든 자꾸 걸려 버리는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내가 뭔가 할 수 있고 도움이 된다는 사실은 나를 최선으로 움직이게 하기 충분했다. 한국과 다른 미얀마 유아교육 상황을 몸으로 경험할 수 있었고, 그럼에도 그 상황에 맞춰 최대한 유익한 수업을 제공하기 위해 200여 명의 아이들 수업 준비물을 모두 챙기고 손수 만들었다. 덕분에 나는 손목과 손가락에 관절통이 생겼지만 뭐 젊으니까(당시 22살) 금방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뎅기열로 꺾인 몸 컨디션도 다 돌아오고 미얀마도 익숙해지고 현지 선생님들과 관계도 쌓이자 한국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 5개월이 생각보다 느리면서도 빨랐다.

그곳에서 나는 복학을 결심했다. '아동학과 사회복지학을 마저 공부해야지' 하고. 내가 시시하게 여겼던 그 공부들이 이곳에서는 시시하지 않게 작용하고 도움이 되고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고작 학부 2년 배운 것들로도 이렇게 도움을 줄 수 있었는데, 더 배우면 더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가르치려 드는 외국인이 아니라 아이들을 위해 함께 고민하고 노력하는 한 명의 교사로 봐주는 선생님들과 학부모들에게 보답하고 싶었다.


간혹 내가 '미얀마에서 이런 일을 합니다.'라고 하면, 미얀마가 불쌍해서 돕는 착한 마음씨를 가진 사람인 줄 알고 '한국에도 불쌍한 애들 많은데 왜 멀리까지 가서 힘들게 일해요.' 하시는 분들이 있다. 단언컨대 나는 그들이 불쌍해서 그들을 돕는 것이 아니다. 어느 정도의 측은지심은 있지만, 그것은 그들이 저개발국가 국민들이기 때문에, 가난해서 등등이 아니라 그냥 인류애다. 


한국에서 꿈도 삶의 목표도, 자기 효능감도 없이 부유하던 내게 꿈을 주고 목표를 주고 효능감을 경험하게 해 주었던 나라였고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곳을 좋아하는 것이다. 물론 고생도 많이 했다. 이후 내가 기록할지 모르겠지만, 두 번째 미얀마에 갔을 때도 나는 무척 힘들었고, 세 번째 갔을 때도 정말 이가 빠득빠득 갈릴만큼 힘들었다. 하지만 세상만사가 힘들어도 내가 꽤 버틸만하고 할 만한 일을 하는 게 맞는 거 아닌가 싶다. 안 힘든 일이 어디 있나... 이미 한국에는 자국을 위해 애써주시는 똑똑하고 멋진 분들이 너무나 많다. 비록 나는 그만큼 대단하진 못해도 이들에겐 꽤 쓸모 있는, 필요한 사람이었다. 내가 필요한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으로 가고 싶어서 나는 그 이후로도 계속 미얀마를 택했다. 


그렇게 스물두 살 뭣도 모르고 떠난 미얀마에서 소위 나의 비전을 찾았다. 내 삶의 방향성. 직장은 계속 바뀔 수 있겠지만, 나의 직업과 삶의 방향성, 그 땅에서 깨닫고 다짐했던 것들은 잃고 싶지 않다. 스물아홉 살이 된 지금, 나는 그 사이에 미얀마를 세 번 다녀왔고 내일이면 다시 미얀마로 향한다. 7년 전 미얀마에 첫걸음을 뗐던 어린 나는 상상도 못 했던 일들이다.(미얀마에서 살게 된다니!) 그곳에서 나는 또 어떤 일들을 하며 살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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