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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ah Oct 21. 2020

#31 지치지 말고 항상 행복해

휴양지의 오래된 공간들

예전에 어떤 남자가 어떤 여자에게 

이렇게 말하는 걸 본 적이 있다. 


'-아, 지치지 말고 항상 행복해.'


그 말을 들은 여자의 눈이 금방 그렁그렁해지는 것도 봤다. 


그 이후에 

지치지 말고 항상 행복하라는 말이 종종 생각났었다.


지치지 말라는 말도,

행복하라는 말도, 

자주 떠오르는 요즘이다. 


집에 있는 커피머신으로 에스프레소를 내리고 두유를 넣어 직접 소이 라테를 만들어 마신 아침.   
골드코스트 콜스에는 내 주먹만 한 아주 작은 사과들이 있었다. 



여느 때처럼 커피 한 잔과 과일주스로 아침 식사를 대신한 뒤 

부지런히 씻고 나갈 준비를 마쳤다.


몸도 마음도 좀 더 건강해졌으면 싶은데

그러려면 일단 잘 먹고, 잘 자는 게 중요하겠지.


나는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땐 

주로 너무 많이 굶거나 

반대로 한 번에 너무 많이 먹었었다. (배가 고프지 않아도.)


지금 생각해보면 

마음이 허기진 걸 배가 고프다고 착각했던 것 같기도 한데

그런 루틴도 여기 와서 천천히 고쳐가곤 한다.


나갈 준비 끝!


이왕 호주에 와서 요가를 꾸준히 하는 김에,

골드코스트에 와서도 마음에 드는 스튜디오를 찾아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방식의 수업을 듣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고


오늘은 처음으로 직접 찾아가 보는 날이다.

골드코스트 Chevron Island에 있는 <Yoga in Paradise>라는 스튜디오로.

처음 전화 문의를 할 때 Emma가 엄청 친절했던 기억이 난다.
멀리서 언뜻 바라본 스튜디오 안은 자연조명이 환하게 비춰 들어오는 아늑한 공간이었다.


찾아오기 전 미리 전화로 간단히 문의를 했었는데

전화로 받았던 그 느낌과 스튜디오가 많이 닮아있었다. 


브리즈번의 Soba가 엄청 자유분방하고 자연 자연한 느낌이라면, 

골드코스트의 Yoga in Paradise는 치유가 되는 아늑한 느낌이 있다. 


나중에 알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 곳에서는 

늘 수업 전에 스튜디오에서 다 같이 가지는 티타임이 있었다.

Budds beach


요가 스튜디오 등록을 마치고, 

천천히 걸어 나와 Budds beach로 향했다.


관광객과 휴양객이 붐비는 Surfer's Paradise 해변가 방향이 아니라, 

Chevron Island를 끼고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소탈한 버즈 비치.


처음 이 곳에 왔을 때 숙소 호스트에게 갈 만한 곳을 몇 군데 추천받았는데, 

버즈 비치는 현지 주민들이 찾는 조용한 해변가라 아마 마음에 들어할 거란 이야기를 해주었다.


정말 사람이 몇 없던, 작지만 평화로운 공간.


높지 않은 파도와 작은 모래사장으로 이루어진 이 곳 앞에는 

현지인들이 사랑해 마지않는 bumbles 카페가 있다. 


bumbles 뜻처럼 작은 벌꿀들 일러스트로 도배를 해놓아서 쉽게 찾았는데,

자세히 보니까 동네 사랑방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온통 벌꿀 천지.


bumbles는 밖에서 보면 그냥 건물 같은데 

안으로 들어가면 주택 구조로 되어있어 

각 방을 들어갈 때마다 각기 다른 인테리어와 분위기를 맛볼 수 있다. 


적당히 세련되고,

적당히 오래되고,

늘 그 자리에 있었던 것 같은 시간 감각이 묻어있는 곳이다.

이 곳은 따로 분리되어 있는 단체석. 샹들리에에 달려있는 꼬마전구들 덕분에 동화 같은 느낌을 주는 공간이다.
좀 더 깊은 공간으로 들어갈수록 새로운 콘셉트의 인테리어가 나온다. 꽃들도 다 생화.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공간엔 함께 보낸 세월만큼의 사진들이 벽에 붙어있다.
와인잔 같은 높은 잔에 담아주는 커피.
크리넥스 화장지를 구겨놓은 것 같은 예쁜 조명들.
와인과 칵테일도 함께 팔고 있다.


바닥을 감싸고 있는 나무 바닥과 카펫을 밟고 있으니까

정말 누군가가 사는 집을 구경하는 느낌이었다.


관광지에서 몇 블록 벗어나 있는 이 커뮤니티에서 

이 공간은 아주 오랫동안 주민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왔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만큼 이 카페 안에 있는 사람들이 이 안에서 굉장히 편해 보였다.)


휴양지에 사는 기분은 어떤 걸까.

카페 Bumbles 바로 옆에 있는 편집숍.
아기용 햇빛 가리개 모자.
작은 소품들이 카테고리에 구애받지 않고 오밀조밀 모여있었다.


범블스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고, 

바로 옆에 있는 소품 편집샵까지 둘러보고 나오는 길.



우연히 오늘 돌아본 공간들이 전부 다, 

꽤 오랜 시간 이 지역 커뮤니티의 사랑을 먹고 자란 오래된 공간들이었다.



좋아하는 공간이 오래 지속된다면

한 곳에서 고등학교, 대학교, 그 이후 시기의 추억을 맘껏 쌓아나갈 수 있을 텐데 

내가 서울에서 좋아했던 공간들은 금세 사라지고, 

애초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적도 없었던 것처럼 다른 공간으로 재탄생한 경우도 많았다.



하긴 뭔가가 계속 지속된다는 건 

여러 요소와 타이밍이 전부 맞아야 하는 

그런 힘든 일이겠지.



하물며 살아있지 않은 공간의 일도 그런데 

사람이 한결같이 지치지 않고 한 자리에 남아있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지치지 말고 항상 행복해' 하는 말이 

더 많이 생각나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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