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반나절 여행 가이드.
우연이 쌓여서 만들어내는 기적을 우리는 살면서 몇 번쯤 겪게 되는 걸까.
사실 직업을 선택하게 되는 계기도,
누군가에게 폭 빠지게 되는 3초의 순간도,
우연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기에
그렇게 따지면 살면서 수없는 기적들을 마주한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이 날의 나는 유독 신기한 우연을 많이도 마주했고 또 스스로 만들어냈다.
골드코스트의 벌리 헤즈는 우연히 알게 됐다.
브리즈번에 도착한 지 채 며칠이 되지 않았던 때, 나는 페리를 타고 주말 마켓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때 우연히 옆자리에 아주 작은 아기를 데리고 탄 엄마와 그 아이의 할머니가 있었고, 나는 똘망똘망한 아기의 눈망울을 보면서 혼자 웃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할머니가 말을 걸었다.
어디를 가는지, 어디서 왔는지, 얼마나 머무는지.
호주에 와서 지금까지 어디 어디를 가봤는지, 앞으로는 어디를 가 볼 생각인지.
어떻게 다른 나라에 오게 됐는지.
편도로 30분 정도 걸리는 페리 안에서 세심하게, 친절하게. 그렇게 질문과 대답들이 이어졌다.
저 대부분의 질문에 나는 대다수 '정해지지 않았다'로 일관했고
그러자 할머니가 딸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더니 각종 추천지를 알려주셨다.
'골드코스트는 가 볼 거야? 거기 가면 Burleigh heads Beach를 꼭 가야 돼. 거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장소야.'
'숲이랑 동물 좋아하면 David Fleay Wildlife Park도 좋아. 대신 밤에 혼자 다니는 건 위험하니까 낮에 가야 돼.'
'Burleigh heads에서 Currumbin까지 쭉 걷는 코스도 정말 좋아.'
'코알라 봤어? 코알라랑 캥거루 보고 싶으면 Lone Pine Koala Sanctuary 가봐.'
할머니는 그렇게 내 핸드폰으로 직접 구글 맵에 위치까지 찾아주셨고, 그 이후엔 이 시즌에 보면 좋은 영화까지 알려주셨다. 딸이 이런저런 장소를 더 이야기하자 '얘는 지금 여기로 쉬러 온 거야. 무리하면 안 돼' 하며 투닥투닥하시면서.
그렇게 세 사람은 나에게 그 날 집으로 돌아가는 페리를 너무 늦게 타지는 말라는 당부까지 해주고 유유히 사라졌는데,
나는 그 날의 추천목록을 기어코 잊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나서 나는 정말 골드코스트에 오게 됐고 그 날의 추천 장소인 벌리 헤즈를 찾아왔는데, 이 곳 때문이라도 골드코스트에 오기를 정말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벌리 파빌리온은 해변가에 위치해있는 전형적인 레스토랑이다. 2개 층으로 만들어진 이 건물 한 구석에는 카페가, 다른 한쪽에는 레스토랑 겸 바가 있다. 2층에는 테라스가 있어 바다를 바라보면서 탭 맥주를 마실 수 있는데, 힙한 노래들이 나오고 사람들이 시끄러운 음악 속에서 춤도 추는 그런 느낌이었다.
하지만 진짜는 지금부터다.
파빌리온 오른편으로 쭉 걸어 들어가면 내셔널 파크가 나오고, 그다지 경사가 심하지 않은 작은 산을 따라 산책로가 나 있다.
여기 도착한 이후로 트래킹을 해 본 적은 없는 나는 천천히 산책로를 따라 산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어느덧 전망대에 도착한 순간, 멍- 때리면서 바다를 내려다보는데 나보다 앞서 도착한 사람이 스트레칭을 하다가 나랑 눈이 마주쳤다. 전망대에 있는 지도를 가리키면서 하는 말.
'우리가 어디쯤 와있는지 알아? 오늘은 날씨가 좀 흐리지만, 맑은 날 오면 저기까지 보여.'
'나는 이렇게 사람 없는 시간에 혼자 와서 여기 트래킹 하는 거 좋아해.
그러고 나서 Black Hops Brewery 가서 맥주 마시면 진짜 맛있어.'
'이 길 말고 해안가 따라 걷는 코스도 있는데 거기가 진짜 예뻐. 몇 분 안 걸리는데 가볼래?'
솔직히 잡혀갈까 봐 두려운 마음도 있었지만 산책로에 사람이 많아서 같이 걸어가기 시작했고,
아주 어렸을 때부터 골드코스트에 살았다던 이 사람은 가는 내내 트래킹 코스를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여기 서서 봐봐. 여기서 보면 예뻐.'
잠시 잠깐 의심한 게 미안해지는 순간.
그렇게 한참 해안가를 따라 나 있는 산책로를 걷다가 어느 순간 Tallebudgera Creek이 나왔다.
보물 같은 해변가.
이 해변가의 모래가 너무 고와서 밟는 족족 모래가 바스러졌다.
이런 해변가가 숨어있었구나.
함께 걷던 사람은 Tallebudgera Creek의 구석구석을 소개해주고, 그보다 더 멀리 있는 젤라또 집까지 알려준 뒤 (젤라또로 상까지 받았다고 한다.) 그 사람의 몫을 다했다.
이런 우연이 없었다면 아마도 나는
이렇게 한 구석에 있는 작고 아름다운 해변가까진 스스로 도달하지 않았을 것 같다.
몇 걸음 더 가면 정말 아름다운 곳이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을 테니 아마 아쉬움조차 느끼지 않았겠지.
하지만 작고 작은 한 마디들이 모여서 세상엔 이런 곳도 있다는 걸 발견했으니
그 자체로 나에겐 새로운 종류의 행복.
이렇게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는 동안 나는 어떤 우연과 기적을 만들어내고 있는지,
아마 그 순간에 바로 알아채는 건 영영 불가능하겠지만
적어도 그 우연들을 스스로 두려워하지는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기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