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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ah Oct 18. 2020

#30 이런 종류의 머무름도 있다

시간이 멈춰버린 것 같은 여행

같은 풍경을 보더라도 

어떤 플레이리스트를 틀어놓느냐에 따라서

굉장히 다른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집에서 쉴 때도, 뭔가 쓰고 있을 때도

늘 배경음악을 틀어두고 있는 편인데 

보통 그 곡이 다양하진 않고 

그 시기에 유독 꽂힌 노래 하나를 반복 재생시켜두곤 한다.


그때 그때, 그 날 그 날  

내 인생의 OST가 쌓여간다는 건 참 좋은 일.

Surfer's Paradise.  천국 시작 포인트.


노래 한 곡을 틀어놔도 

사람 마음은 이렇게 들쑥날쑥인데 

자연은 이토록 그대로이니 얼마나 고마운지.


이른 아침이고, 낮이고, 오후고, 늦은 밤이고

원할 때 바다를 찾아가 푸르른 하늘을 바라보고 바다 냄새를 맡을 수 있다는 건 정말 큰 행복이다.


집에서 나서 다리 하나를 건너면

Surfer's Paradise가 나오는데, 

북적이는 곳에서 조금만 걸어가도 한산한 해변이 나온다.


그럼 나는 그게 좋아서 에어팟을 끼고 

아무 모래밭 위에 대뜸 앉거나 누웠다.


아이들을 위한 자그마한 백팩. 이제야 한 살인 조카 생각이 났다.



중간중간 이렇게 관광객 모드로 기념품을 구경할 때도 있지만, 

브리즈번 & 골드코스트까지 와서 여행객처럼 적극적으로 굴지 않는 나에게

간혹 친구들이 의문을 품을 때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처음 떠나올 때는 당연히 사진 속 이미지를 보며 막연한 기대감을 품었던 건 사실이지만 

여기까지 와서 발 동동거리며 이곳저곳 둘러보고 애쓰며 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호주에 도착했을 때

더 이상 애쓸 에너지 자체가 남아있지 못해서 그럴 힘도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Betty's Burger. 먹는 건 잘도 챙겨 먹는다.
한산한 모습
먹는데 새들이 자꾸 매장 안으로 들어와서 한 손으론 먹고 한 손으론 쫓아내야 한다.



그러고 보니까 재료를 사서 주스 같은 걸 스스로 만들어 갈아 마시긴 해도 

유명하다는 가게나 레스토랑에 찾아가서 뭘 먹을 생각도 딱히 안 해봤던 것 같다.


하나라도 더 먹어보고, 

한 군데라도 더 가보고, 

내 모습 한 장이라도 더 사진으로 남겨두는 건 

내 우선순위 바깥에 있었다. 


그냥 나의 우선순위 속 바람은 단 하나였다.

다시 잘 살고 싶은 의욕을 되찾기. 

집 베란다에서 바라본 골드코스트 풍경.


그래서 한동안은 '가만히 있기'를 택했던 것 같다. 

애쓰지 않는 범위 안에서 

한없이 바라보고, 지켜보고, 듣고. 그렇게.


베란다로 걸어 나와 이렇게 바깥 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면 

시간이 꼭 멈춰버린 것 같아서 좋았다.


내가 애쓰고,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세상 무너지고 망하는 줄 알았는데 

사실 내가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너무나 멀쩡하게 잘 굴러가고 있는 이 곳.


근데 그게 막 억울한 느낌이 아니라 

너무 다행인 느낌이었다.


의외로 이렇게 모든 걸 멈추어도 

괜찮구나 하고.

해 질 녘 집에서 서퍼스 파라다이스 해변으로 걸어가는 다리 위에서.



사람이 살아가는 시기마다, 상황마다, 

위로가 되는 해결책은 다 다를 수 있다는 걸 다시 한번 느끼기도 했다. 


어느 때는 북적북적한 사람들 틈으로 걸어 들어가는 게 해결이 되기도 하고,

또 다른 때는 이렇게 모든 걸 멈추고 혼자가 되는 게 해결이 되기도 하고.


꼭 천편일률적인 해답은 없구나 하고 느끼는 날들.

사람이 드물어지는 밤바다로 자주 향했다.



그리고 이 날들을 가질 수 있음에 

여전히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멈춰야 한다고 판단했을 때 멈출 수 있는 용기를 낼 수 있는 사람이어서,

또 여기 와서까지 욕심부리지 않는 사람이어서.

어딘가에 속하려고 발버둥 치는 사람이 아니어서.

기차에서 보던 어바웃 타임을 끝까지 봤다.



세상에 여러 종류의 머무름이 있다면

이런 머무름도 있다는 걸 남겨두고 싶었다. 


이런 위로도 있다는 것.


모든 걸 말할 수 없어도

묵묵하게 바라보는 걸로 치유되는 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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