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이런 종류의 머무름도 있다

시간이 멈춰버린 것 같은 여행

by Minah

같은 풍경을 보더라도

어떤 플레이리스트를 틀어놓느냐에 따라서

굉장히 다른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집에서 쉴 때도, 뭔가 쓰고 있을 때도

늘 배경음악을 틀어두고 있는 편인데

보통 그 곡이 다양하진 않고

그 시기에 유독 꽂힌 노래 하나를 반복 재생시켜두곤 한다.


그때 그때, 그 날 그 날

내 인생의 OST가 쌓여간다는 건 참 좋은 일.

IMG_8954.jpg?type=w966 Surfer's Paradise. 천국 시작 포인트.


노래 한 곡을 틀어놔도

사람 마음은 이렇게 들쑥날쑥인데

자연은 이토록 그대로이니 얼마나 고마운지.


이른 아침이고, 낮이고, 오후고, 늦은 밤이고

원할 때 바다를 찾아가 푸르른 하늘을 바라보고 바다 냄새를 맡을 수 있다는 건 정말 큰 행복이다.


집에서 나서 다리 하나를 건너면

Surfer's Paradise가 나오는데,

북적이는 곳에서 조금만 걸어가도 한산한 해변이 나온다.


그럼 나는 그게 좋아서 에어팟을 끼고

아무 모래밭 위에 대뜸 앉거나 누웠다.


IMG_8973.jpg?type=w966 아이들을 위한 자그마한 백팩. 이제야 한 살인 조카 생각이 났다.



중간중간 이렇게 관광객 모드로 기념품을 구경할 때도 있지만,

브리즈번 & 골드코스트까지 와서 여행객처럼 적극적으로 굴지 않는 나에게

간혹 친구들이 의문을 품을 때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처음 떠나올 때는 당연히 사진 속 이미지를 보며 막연한 기대감을 품었던 건 사실이지만

여기까지 와서 발 동동거리며 이곳저곳 둘러보고 애쓰며 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호주에 도착했을 때

더 이상 애쓸 에너지 자체가 남아있지 못해서 그럴 힘도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IMG_8977.jpg?type=w966 Betty's Burger. 먹는 건 잘도 챙겨 먹는다.
IMG_8982.jpg?type=w966 한산한 모습
IMG_8989.jpg?type=w966 먹는데 새들이 자꾸 매장 안으로 들어와서 한 손으론 먹고 한 손으론 쫓아내야 한다.



그러고 보니까 재료를 사서 주스 같은 걸 스스로 만들어 갈아 마시긴 해도

유명하다는 가게나 레스토랑에 찾아가서 뭘 먹을 생각도 딱히 안 해봤던 것 같다.


하나라도 더 먹어보고,

한 군데라도 더 가보고,

내 모습 한 장이라도 더 사진으로 남겨두는 건

내 우선순위 바깥에 있었다.


그냥 나의 우선순위 속 바람은 단 하나였다.

다시 잘 살고 싶은 의욕을 되찾기.

IMG_8995.jpg?type=w966 집 베란다에서 바라본 골드코스트 풍경.


그래서 한동안은 '가만히 있기'를 택했던 것 같다.

애쓰지 않는 범위 안에서

한없이 바라보고, 지켜보고, 듣고. 그렇게.


베란다로 걸어 나와 이렇게 바깥 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면

시간이 꼭 멈춰버린 것 같아서 좋았다.


내가 애쓰고,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세상 무너지고 망하는 줄 알았는데

사실 내가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너무나 멀쩡하게 잘 굴러가고 있는 이 곳.


근데 그게 막 억울한 느낌이 아니라

너무 다행인 느낌이었다.


의외로 이렇게 모든 걸 멈추어도

괜찮구나 하고.

IMG_9003.jpg?type=w966 해 질 녘 집에서 서퍼스 파라다이스 해변으로 걸어가는 다리 위에서.



사람이 살아가는 시기마다, 상황마다,

위로가 되는 해결책은 다 다를 수 있다는 걸 다시 한번 느끼기도 했다.


어느 때는 북적북적한 사람들 틈으로 걸어 들어가는 게 해결이 되기도 하고,

또 다른 때는 이렇게 모든 걸 멈추고 혼자가 되는 게 해결이 되기도 하고.


꼭 천편일률적인 해답은 없구나 하고 느끼는 날들.

IMG_9013.JPG?type=w966 사람이 드물어지는 밤바다로 자주 향했다.



그리고 이 날들을 가질 수 있음에

여전히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멈춰야 한다고 판단했을 때 멈출 수 있는 용기를 낼 수 있는 사람이어서,

또 여기 와서까지 욕심부리지 않는 사람이어서.

어딘가에 속하려고 발버둥 치는 사람이 아니어서.

IMG_9045.jpg?type=w966 기차에서 보던 어바웃 타임을 끝까지 봤다.



세상에 여러 종류의 머무름이 있다면

이런 머무름도 있다는 걸 남겨두고 싶었다.


이런 위로도 있다는 것.


모든 걸 말할 수 없어도

묵묵하게 바라보는 걸로 치유되는 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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