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가 태어나고 80일 즈음. 아직 반년도 더 남은 복직 기간이 있음에도 너무도 돌아가기 싫은 회사와, 그렇다면 앞으로 무얼 하며 살아야 하는지,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지, 나는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불안하고 분주한 마음을 어쩔 줄 몰라하던 어느 날 밤. 거실을 서성이다, 글을 끄적이다 밤을 꼴딱 새우고는 새벽 유축 후 무작정 걸으러 나간 것이 시작이었다.
백일. 딱 백일만 걷자.
매일 백일을 걷겠다는 계획에 남편은갑자기 너무 무리하는 것은 아닌지, 일주일에 이틀 혹은 삼일이 적당하지 않은지 제안했고,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매일, 백일을 꼭 채워보고 싶다고 하였다. 새벽에 유축해두고 갈 테니, 아이가 깨서 울면 (출근을 가야 하는 건 정작 당신이지만, 그래도 당신이 일어나서) 우유를 주는 수고로움을 부탁하면서.
그리고 시작했다. 날이 좋은 날에도, 바람이 많이 부는 날도, 비가 오는 날에도. 하루 폭우가 쏟아지던 날 유튜브에서 걷기 영상을 틀어놓고 집에서 제자리걸음으로 한 것을 빼면 매일 새벽 5시 일어나 유축 후, 6시에 길을 나섰다.
빼박 올빼미형 인간이라 처음에는 일어나는 것이 무척 어려울 것 같았으나, 무슨 사명감에 가득 찬 용사처럼 처음 1~2주는 벌떡벌떡 일어나 준비를 하여 나갔고, 그러다 이내 피곤하여 어떤 날은 둘째와 함께 낮잠에 스르르 들기도 하였지만, 새벽 걷기만은 멈추지 않았다.
매일매일 4킬로 남짓을 걸으며 내게는 크고 작은 변화가 찾아왔다.
1. 매일 아침 시작을 상쾌하게
처음에는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하늘이 매일 바뀌었으니까. 새벽 6시 즈음이면 시드니의 계절로는 동이 트는 시간이었다. 색깔도, 구름도, 매일같이 다른 얼굴로 맞이하는 하늘을 보며 시작하는 아침이 새로웠다. 따가운 눈꺼풀을 뜨고 나간 보람이 첫 세발자국만에 마구마구 솟아난다. 아, 나오길 참 잘했다. 저만치 하늘색이 조금 특별한 하루는, 해가 뜨는 동쪽에 있는 공원을 향해 발걸음을 평소보다 재촉한다.
매일 다른 하늘을 보며 시작하는 하루도, 그래서 내일은 또 어떤 하늘일까 궁금한 마음도, 걸을 수 있는 튼튼한 두 다리도, 또 기꺼이 너를 위한 시간을 보내고 오라고 새벽에 아이를 맡아주는 남편도 모두 고마웠다. 사소했고, 그래서 내게는 더욱 특별한 행복에 대해 배우게 되었고, 감사할 줄 알게 되었다.
매일 색다른 얼굴로 반기는 하늘
2. 몸이 가벼워졌다.
사실 원래도 날씬한 편은 아니지만, 둘째 임신으로 이게 마지막이다, 하는 마음으로 먹은 데다 코로나까지 겹쳐 활동이 적어지면서 남편 몸무게에 버금가는 숫자를 갱신했다. 출산으로 조금 줄어들기는 하였지만, 몸이 많이 둔하다는 느낌이 들었었는데, 백일 걷기 후 무려 7 킬로그램이 빠져 있었다. 물론 그 숫자가 출산 전 만 하려나만은, 먹는 것을 너무 좋아하여 식단은 따로 하지 않았고, 순수 걷기로만 얻은 결과로 내심 다행이다 싶었다. (요즘 다시 코로나로 락다운에 들어가면서 그 숫자가 또 흔들흔들하고 있지만)
3. 상처 보듬기
점점 걷는 날들이 늘어나며 자연스레 생각이 꼬리의 꼬리를 물었다. 보통은 나를 붙잡고 있던 어두운 기억들이었는데, 예를 들면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 아팠던 기억들, 부끄러운 기억들, 그리고 어른이 되어서도 종종 마주치곤 했던 곤혹스러웠던 상황 등등.
그런 기억들이 하루 이틀 걷는다고 금세 가라앉지는 않았다. 곱씹고, 잠시 사라졌다가, 다시 돌아오면 또 아팠다가 곱씹고, 그러다 마침내는 흘려보낼 수 있었다. 아쉬운 것도, 속상한 것도, 무서운 것도, 두려운 것도, 한줄기 한 줄기씩 흘려보내면서 나 자신을 묵직하게 덮고 있던 어둠을 한 꺼풀씩 벗어나갔다. 나를 약하게 하는 것은 결국 내가 붙잡고 있던 과거와 스스로 확대한 열등감에서 온다는 것을 알았고, 조금씩 훌훌 털어내는 연습을 걷는 내내 했던 것 같다.
백일 걷기를 마친 지금, 지우고 싶은 과거의 기억에서 깨끗하게 자유로워졌느냐 묻는다면 그건 아니지만, 이제는 적어도 그것 때문에 괴롭거나 자기 연민에 빠져 슬퍼하는 시간이 확연하게 줄어들었다고는 말할 수 있다. 정신이 조금 더, 맑고 건강해졌다.
4. 내가 좋아하는 일 알아가기
유축을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되었을 때는 내가 정말 관심 있고,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다. 회사생활의 대부분이 사람이 힘든 것이지 일이 힘든 것이 아니라 했다. 그 말은 곧 내가 하는 일이 내가 정말 좋아하는 일일 수 있는데, 맞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 치이느라 일이라는 본질까지 흐트러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육아휴직으로 회사에서의 소음이 차단된 시간 동안, 다시 나의 '진짜 일'에 대해 고민해보기 시작했다. 결론은 나는 내가 하는 일을 즐기고, 또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데이터를 이리저리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며 의미 있는 결과를 알아내는 것이 즐거웠고, 한동안은 주식 데이터를 활용하는 방법에 대한 온라인 클래스를 들어보기도 하고, 기계학습에 대한 책도 다시 찾아보며 전공인 통계에 대해 기본을 다지는 시간을 가졌다.
항상 나는 이도 저도 아니다, 어느 정도 하다가는 금세 그만두는 사람이다,라고 내심 자책하며 무엇을 잘하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길 잃은 아이처럼 헤맸는데, 조금씩 내가 하고 싶은 일들에 대한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5. 작은 성취감, 그리고 나도 참 괜찮은 사람이라는 자신감
백일 걷기를 마치던 날, 작은 성취였지만 그것에서 오는 성취감은 생각보다 컸다. 매일 했다는 사실, 그렇게 꼬박 100일을 채웠다는 사실에 자랑스러워해 주는 남편의 리액션과, 기록용으로 올리던 인스타그램에서 말 걸어주시던 몇 안 되는 분들의 응원 덕분에 자신감이 더 뿜뿜 솟아났다.
단기간이지만, 매일 무엇을 하겠다고 스스로 정하고, 끝낼 수 있는 나는 마음을 먹으면 해낼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구나. 어두운 기억이 여기저기 박혀 있는, 그래서 마음이 미운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래도 '노력할 줄 아는' 사람이구나. 하는 희망들.
나 자신을, 그리고 나아가 삶을 조금은 너그럽게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이 모든 시간 덕분일까? 내게 잘 맞는 환경을 찾고자 이직 준비를 시작하였는데, 코로나로 이직이 힘들다는 주변의 의견과는 달리 이력서를 내기 시작한 지 한 달 만에 오퍼를 받게 된다. 류머티스를 핑계로 손 놓았던 피아노도 취미로 다시 시작해보고, 읽고 싶은 책 리스트들을 하나하나 채워나간다. 걷기는, 이제는 매일은 아니지만 짬짬이 시간 내어 걸으려 한다. 마음이 복잡한 날, 몸이 무겁다고 느껴지는 날, 날씨가 유난히 화창한 날, 서슴없이 운동화를 신고길을 나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