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3일차, 이제야 새 다이어리를 뜯었다

이르지는 않지만 아주 늦은 것도 아니야

by 시월

대학생때부터 매년 11월쯤이면 새 다이어리를 사서 예년의 다이어리의 연간 계획을 보며 각종 기념일을 옮겨적고는 언제 새해가 밝아 새 다이어리를 쓸 수 있나 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새해를 기다리곤 했었는데. 언젠가부터는 연말이 연말같지 않고 새해가 새해같지 않아 닥쳐서야 다이어리를 마련하다가 급기야 몇 년 전부터는 그냥 남편 회사에서 나온 다이어리를 받아 썼다. 한번은 기록을 게을리한 탓에 다이어리 반절이 새것과 같길래 뒷장에 monthly칸을 만들고 한 해를 더 썼더랬다.


그랬더니 이젠 새 다이어리 마련에 대한 감흥이 뚝 떨어져버렸는데 덮어놓고 마시던 스타벅스 커피가 17잔을 달성하여 다이어리를 받을 수 있게 된 것 아닌가. 일주일을 쓸까말까 고민하다 이제야 새 다이어리를 뜯었다. 조심스레 펼쳐서 이름과 연락처를 적고, 날짜없는 만년형을 선택했던지라 빈칸에 올해 날짜를 하나하나 채워넣고 있자니 다시 스멀스멀 새해가 왔구나 싶은 기분이 든다. 종이도 매끌매끌한 것이, 스타벅스 다이어리 좋은데? 하는 감탄이 나온다.






좀 늦었다. 새해 3일차에 새 다이어리.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안을 어떻게 채우느냐일 것이다. 지난 해 매일 성실히 기록하지는 못했으나 그래도 매일을 기록으로 남겨놓기는 했다. 올해는 기록을 성실히 남길 뿐만 아니라 하루하루를 성실히 살아보고자 한다. 삼십대 후반. 적지 않은 나이다. 친구들에게 농담식으로 '서른보다 마흔이 가까운 나이'라고 말하곤 했다. 맞다. 그런데 그게 뭐. 확실한 건 오늘이 가장 젊은 나이라는 거다. 적지는 않아도 늦은 나이는 아니라는 것.



연예인 김숙씨가 후배 연예인 박나래씨의 '마흔은 어떻게 살아야 하냐'는 질문에 '마흔은 젊은 나이다. 팟캐스트를 시작도 안했었던 나이다. 마흔에 시작하면 마흔다섯에는 무엇이라도 하고 있을거다' 이런 얘기를 했다고 어디선가 보았다. 적지 않은 나이에라도 일단 시작하는 것은 시작하지 않는 것과는 천지차이일 것이다.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여 아무것도 안하는 것. 그것이 진짜 늦은 것이다.



어린 시절에 삼사십대를 생각했을 때는 모든 것이 다 정해져있고 안정적으로 살고 있을 거라고 상상하고는 했는데 막상 삼십대 후반이 되어보니, 인생에 그런 시기는 딱히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철밥통이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어도,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어도 인생은 계속 흔들린다. 어느 한 곳에 안전히 머무는 것이 아니라 고민으로 가득 차 이쪽저쪽으로 갈팡질팡 움직이다. 살아있다는 것은 그런 거다. 살아보니 그렇다. 그러니 안정적인 어떤 시기가 오겠거니 하고 머물려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런 걸 받아들어야 살아진다.






평생직업을 가지면 정년퇴직을 할 때까지 아무런 고민이 없을 줄로 알았는데 교직에 13년차 있다보니 교직을 유지하면서도 어디로 나아가야하는가, 어디로 나아가고 싶은가에 대한 고민이 생겼다. 담임으로서는 너무 힘들 것 같고 근무했던 학교들과 현재 근무하는 곳 모두 연차가 많은 선생님들이 계시는 곳이다보니 부장을 하기엔 경력과 능력이 부족하다. 게다가 부장은 승진도 아니고 보직일 뿐이니, 진로를 정하는 것이라 말하기엔 애매한 부분이 있다. 매해, 혹은 학교를 옮기며 어떻게 될지 모르니 불확실하기도 하고.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장학사로의 전직, 관리자로의 승진, 수석교사, 진로교사 정도가 있는데 친구의 권유로 진로교사에 발을 들였다. 대학원 진학을 하고보니 아뿔싸, 경력에 따라 선발자격에 차이가 있는데 이곳은 담임과 부장경력이 중요한 곳이다. 다 채우려면 10년은 더 담임을 하든 부장을 하든 해야 한다. 알게 되자마자 입에서 새어나온 말,



홀리 쓋! 10년이라고?
그러면 40대 후반이다. 그러면 너무 늦는데?



대학원 졸업하고 2-3년 내로 진로교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희망에 부풀어 있었는데 학업의지가 뚝 떨어졌다.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아 허무함이 몰려왔다. 친구 권유이긴 했지만 대학원 진학 후 열심히 했는데. 자격만 따면 되는 게 아니라 경력을 이렇게나 많이 요구하는 게 합당한가 싶은 생각에 화가 났다. 교사가 될 때는 자격만 보면서 왜 다른 전공 교사로의 선발 및 발령에는 자격 외에 이리도 많은 경력이 요구되는가. 게다가 부장경력이, 진로와 얼마나 관련이 많다고 담임보다 더 쳐주는가. 다른 지역은 관련 연수를 듣거나, 자격만으로 선발하는데 이 지역은 왜 이모양인가.



한참을 씩씩거리고 허탈해한 다음 마침 날아든 교육청 공문을 보고 의견을 제출했다. 그러고 나니 팔딱대던 심장이 차분해진다. 지금 당장 해결할 방법이 있는가 자문한다. 답은? '없다'. 그렇다고 대학원을 그만둘 것인가? 답은, '아니다'. 그렇다면 할 수 있는 것은 그냥 지금같이 매일을 사는 것뿐이다. 남은 3학기 수업 열심히 들으며, 10년을 새로운 진로 탐색의 기간으로 삼는거다. 일을 해보지 않은 고등학교에 가서도 해보고, 연구대회 같은 것에도 관심을 가져보고 그렇게 여기저기 어슬렁거려가며 살아가는거다. 정 아닌 것 같으면 근처 지역으로 옮길 타이밍을 재보는 것도 방법일 것이다.


왜냐면, 10년이 지나도, 이른 것은 아니지만 아주 늦은 것은 아닐 것이기에. 지금 이거라도 해놓으면 10년 후에, 아니면 더 오랜 뒤에 분명 지금의 나에게 잘했다고, 그때 해놓길 잘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기에.






3일 지났어도, 지금이라도 뜯어서 앞으로의 일 년을 담을 준비를 해놓은 나에게, 잘했다고 다독여주고 싶다. 그런 마음으로 2025년의 매일을 잘 살아내고 싶다. 이르지는 않지만 아주 늦지는 않아 다행이라는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