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사람에게도, 익숙한 사람에게는 더더욱
누군가를 만날 거라고 생각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그저 좀 짜증스러운 상황이었다. 그녀는 내게 이름을 물었다. 내 이름 석자를 말하자, 그녀는 내 옛 이름 두자를 말하며, "혹시 너니?"라고 물었다. 그 이름은 7살까지 사용했던 이름이었다. 그 이름을 어떻게 아느냐는 눈빛을 보내자, 그녀가 말했다. "여섯 살 때 병설 유치원 담임선생님이야."
눈을 떴다. 꿈이었다. 자세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꿈 속의 나는 유치원 선생님을 만나고 '또 만났다고? 분명 얼마 전에도 유치원 시절 인연을 마주쳤던 것 같은데, 현실이 아니라 꿈이었나.' 생각하고 있었다. 꿈이었다는 것을 알고 난 뒤,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짜증스러운 상황이었지만 불만도 좀 있었지만 짜증을 내지 않아 다행이었다고. 비록 꿈이었을지라도 말이다.
누군가는 인간은 원래 선하다고 하고, 누군가는 인간은 본래 이기적이라고 한다. 누군가는 인간이 평탄치 못한 상황에서 선한 본성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는 거라고 고하고, 누군가는 인간이 선한 행동을 하는 것은 학습의 결과라고 한다. 아이를 낳아 키워보니, 둘 밖에 안 되지만 저 두 말 다 일리가 있다고 생각이 든다. 어른의 도움이 필요한 존재이고 자기 표현이 쉽지 않은 아기들은 보호자의 상황이나 상태를 봐주는 경우가 없다. 그저 자신이 우선인 것처럼 행동한다. 그러나, 말을 못해도 그 작은 몸으로 꼬옥 안아주기도 하고 방긋 웃어주기도 하며, 말을 배우고 나서는 "괜짜나? 호 해주까? 우지마."하고 달래주기도 한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은, 아이 시절엔 이랬을 거라 믿는다.
그런데 얼마간 성장을 하고 나면 어린 시절의 그 마음이 몸과 함께 자라나는 것이 아니라 어디론가 숨어버리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터진 입이라고 아무 말이나 배설해내는 사람이 있다. 얼굴이 안 보인다고 손으로 아무 말이나 써제껴내려가는 사람이 있다. 남의 힘들고 아픈 상처를 헤집어 가며 그저 머리도 마음도 거치지 않은 그딴 소리를 해대는 그런 사람같지 않은 것들이 있다.
그들에게 인간은 원래 선하다느니, 인간은 배워서 선행을 할 수 있다느니 그런 말은 전혀 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바라본다. 정약용이 말했듯, 비록 선행만을 하지는 않더라도 선행을 하고자 하는, 선하다는 것을 좋아하는 그런 기호라도 있었으면 한다. 혹은 선행을 한 사람에 대해 아름답게 생각하고 감동으로 받아들이는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으니 꼬아서 보지 않는 그럼 마음이라도 가지고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아픔에 쓰러져 있는 타인에 적극적으로 공감하지는 않더라도, 어쩔 줄 모르는 그 마음이라도 갖고 있으면 좋겠다고, 모르겠으면 입을 다물 줄이라도 알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선한 자유의지 뭐 그런 고귀한 게 아니라 그저 자신을 위해서라도, 이기적 이타심이라도 가졌으면 한다. 숭고한 목적과 희생정신까지가 가 아니라, 그냥 세상이 매우 좁으니, 어디선가 갑자기 마주하게 될 얼굴들 때문에 자기자신이 곤란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머리와 마음을 거친 말과 행동을 했으면 한다. 좋은 말만 해도 부족한 게 삶인 것 같다. 이미 충분히 다들 힘들고, 자기만의 싸움을 열심히 하고 있다. 편이 되어주지 않아도 괜찮으니 힘을 빼거나 반대편에서 공격하지는 않았으면. 그러진 말았으면.
어떤 인플루언서가 있다. 회사를 다니며 옷과 술잔을 만들어 팔며 유쾌한 일상을 공유하던 그녀는 처음 공구를 할 때부터 세금신고를 해서 인상적이었다. 이후 회사를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의류사업을 하게 된 그녀는 세제도 만들며, 미국에까지 진출했다. 그 사람을 개인적으로 아는 것은 아니라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는 잘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나보다 훨씬 잘 먹고 잘 살 것이 분명하고, 애가 둘인데도 점점 더 예쁘고 날씬하고 어려지는 그녀가 앞으로도 지금처럼 승승장구하기를 바란다. 이유는 단 하나다. 그녀가 했던, 착한 척이라도 하다보면 조금이라도 더 착하게 되는 것 같다는 그 말 때문에.
이렇게 써놓고도 군자같은 삶을 살아내진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라도 한 번 말하고 의식하면, 그래서 조금이라도 나은 사람인 것처럼 스스로 생각하면, 어제의 나보다는 티끌만큼이라도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래서, 어딘가에서 만날지도 모르는 어느 누군가에게, 이를테면 꿈 속에서 만난, 지금은 얼굴도 기억이 나지 않는 옛 선생님일지도 모르는 누군가에게, 혹은 구매한 물건에 이상이 있어 전화한 고객센터의 상담사에게, 친절하기로 마음먹는다. 어느 누구에게도 보다 차분하고 상냥하게 말하겠다고 마음먹는다.
내가 그로 하여금 오랜만에 에만나서 조금 더 기분 좋아보이는 목소리를 듣게 된다면, 별 것 아닌 그 일로 나 또한 기분이 좋아진다면,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내 사람들에게도 조금 더 상냥하게 대할 수 있는 에너지를 얻게 되진 않을까. 그러면 내 사람들도 조금은 은 마음이 편해져서 나뿐만 아니라 또 다른 사람들에게도 조금 더 친절할 여유를 갖게 되지 않을까. 그냥 그런 생각을 해본다. 오늘 상담사분에게 예를 갖춰 이야기하고 다정하게 인사했던 것 그 이상으로 내 사람들에게 후회없게 잘 대해야지 그런 생각을 해본다.
아침에 웃으며 인사하고 나올 수 있었음에 감사하며, 그냥 그런 생각을 해본다.
*사진출처: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