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맨스? 로맨스!

에세이트레이닝 시즌4. 꽃다발

by 시월
당신이 나한테 프로포즈했지? 맞아, 아니야?



남편(놈을 붙이고 싶지만 참는다)은 매번 이렇게 묻는다. 그 입, 꿰매주고 싶다. 맞다. 엉겁결에 결혼하자고 먼저 말한 건 그가 아니라 나였다. 거의 유도심문에 가까운 말 때문이었지만 앞뒤 다 자르고 사실만 말하면 결혼하겠다고 입으로 뱉은 건 내가 먼저였다. 그리하여 불행하게도, 라고 하면 너무 과한 표현이려나. 아쉽게도, 내가 먼저 말을 했다는 이유로 남편은 프로포즈를 해주지 않았다. 너무 짜고 치는 고스돕(고스톱은 어감이 안 산다)이라고 한다쳐도 다들 꽃다발과 반지와 더 하면 명품백도 받고 양초와 꽃잎으로 둘러쌓인 길도 걷고 그러던데 덕분에 남들의 이야기였을 뿐, 나에겐 해당사항이 없었다.


그래서 결혼하며 노래부른 것이 '편지'와 '꽃다발'이었다. 편지는 돈이 들지 않지만 품이 들고 꽃다발은 돈은 들지만 쓸모가 없다. 그래도 나는 그걸 원했다. 그러나 남편은 프로포즈처럼 주지 않았다. 정확히는 내가 원할 때 쉬이 주지 않았다. 다만 언젠가의 언젠가 쪽지 한 통, 너무 힘들었던 날 편지 한 통, 그리고 칭얼거림이 커졌던 때였나 작은 꽃다발. 이게 지난 12년간의 기록이다. 이렇다보니 내가 그에게 지어준 별명은 '노맨스'. 로맨틱하지 않다(No)고 해서 노맨스라고 부른다. 앞에 '으이구'를 덧붙이면 그 맛이 더 살아난다.






꽃다발도 내가 사면 되겠지만 그는 원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내가 나를 위해 구독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다보니 꽃을 살 일이 없었다. 집 앞에 꽃집에서 어버이날에 양가 부모님께 꽃 한 다발씩 안겨봐드린 것 말고는 산 적이 없는 것이다. 그렇게 나 또한 매마르게 살던 그 어느 날.


꼼지락거리던 둘째가 커서 세상에, 발표회를 한다는 것이다. 아직 세돌이 되기 전, 만 1세 반의 재롱잔치라니. 이것들이 하면 뭐를 할 수 있을까. 그저 아장아장 무대 위에 걸어 올라가기만 해도 눈물 흘릴 준비가 되어있었다. 조금 보여달라며 앙탈을 부려봐도 아이는 아주 듬직한 목소리로, '무대에서 봐'라고 말할 뿐이었다. 기대감을 가득 안고 아이(들)과 함께 발표회 장소에 갔는데 아뿔싸. 사람들 손에 무엇인가 주렁주렁 한아름 들려있다. 꽃다발, 사탕 꽃다발, 인형 꽃다발, 응원봉, 얼굴이 박힌 응원 판넬 등등. 노맨스의 아내는 그만 노맨스 남편을 닮아 빈 손으로 가버린 것이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코로나 한참 창궐하던 때 어린이집을 졸업한 큰 아이의 어린이집 졸업식에는 인형꽃다발을 사갔더랬다. 그리고 여덟살 2월, 유치원을 졸업할 때도 어버이날 꽃을 샀던 그 꽃집에서 졸업식용 꽃다발을 샀었다. 그게 벌써 3년전이어 그런가 남편화되어 그런가. 노맨스 엄마는 그저 눈물만 가득 흘리고 아이 손에는 어린이집에서 준비한 선물만 들린 채로 집으로 돌아왔다.






다행히 아이는 아무것도 모르는 듯 그저 신나 있었다. 모두 멍때리거나 순서 내내 우는 친구들 사이에서 단 두 명만이 율동을 해냈는데 그중 한 명이 자신이라는 것에 기쁨과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으므로. 물론 무엇보다 아이가 느낀 그 감정이 중요했지만 노맨스 엄마는 마음을 먹는다. 중요한 날마다 꽃보다 환한 너희들을 위해 노맨스 엄마가 아니라 로맨스 엄마가 되어주겠다고. 꽃을 한아름 안겨주고는 꽃보다 더 밝은 너희의 얼굴을 보겠다고. 그렇게 화사한 기억을 안겨주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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