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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월 Oct 13. 2023

고양이 세수를 하세요

찰리 채플린이 되었습니다

고양이 세수를 하세요. 물이 들어가면 안 됩니다.


피부과에서 상처를 치료해 주시며 의사 선생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인중, 턱, 무릎 모두 물이 들어가면 안 된다고. 모두 움직임이 많아 떨어지기 쉬운 곳이니 붙여놓은 것이 떨어지지 않도록 꾹꾹 눌러주고 절대 떼지 말고 이틀 뒤에 다시 오라고 신신당부하셨다.






어떻게 조심하라고 하자마자 넘어져?
어떡해. 코피 나. 엄마.


때는 바야흐로 20여 년 전...이 아니라 5일 전, 남편은 첫째를 태우고 나는 둘째를 업고 자전거를 타고 공원에 다녀오던 길이었다. 갑자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불안해졌다. 등에는 둘째가 업혀있었고 머릿속엔 빗길에 자전거를 타고 넘어져서 무릎이 깨진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3년쯤 전이었나. 그날은 눈을 사서 기분 좋았던 날이었다. 무려 10살 때부터 쓰던 안경을 드디어 벗게 되었던, 시력을 돈 주고 성공적으로 구매하여 기능상에 문제가 없는지 보러 가는 날이었다. 수술한 병원은 차를 타고 가기엔 거리에 비해 시간이 오래 걸리고 주차자리 찾는 시간은 가는 시간보다 더 걸리는 애매한 위치였다. 그렇다고 걸어가기엔 날도 좀 덥고 축축하고 시간도 걸리는 그런 곳이었다. 그래서 자전거가 딱인 곳이었다. 전날 시력 교정술을 한 눈은 렌즈를 낀 것 같이 선명한 세상을 보여주면서도 약간의 이물감도 없어 정말 신기했다. 수술을 하고 나면 새로 태어난 기분이 든다던데, 왜 이제야 했나 하는 후회가 된다던데 정말 그랬다. 태어나 세상을 처음 제대로 보는 느낌에 신나고 들뜬 나머지 자전거 속도를 마구 내기 시작하던 그때, 아침에 와 살짝 고인 빗물에 미끄러졌다. 꽈당. 그대로 넘어졌다. 손바닥은 엉망이 되고 무릎은 깨질 듯 아팠지만 눈이 잘 보이니 괜찮았다. 찢어진 청바지를 입었기에 바지가 찢어졌나 걱정은 안 해도 되어 좋았다. 웃으며 손을 탈탈 털고 일어났다. 수술이 잘 됐다는 이야기를 듣고 집으로 더 빠른 속도로 내달려 왔다. 바지대신 무릎이 찢어져 있었다.






다시 돌아와 5일 전 그날도 기분이 좋았다. 날씨는 좀 흐렸지만 공원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오랜만에 타는 자전거는 재밌었고, 등에 업힌 둘째가 아기띠 끈을 꼭 붙잡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도 귀여웠기 때문에! 귀여우면 끝난 거니까(?) 귀여운 아이를 비를 맞힐 수 없으니 아기띠 위로 머리를 고정시키는 덮개를 덮었지만 남편은 굳이 자전거를 세워 입고 있던 방수기능을 가진 바람막이를 입혀주었다. 다행히 아기띠를 하고도 꼭 맞게 잠글 수 있어 아기를 더 잘 가리고 다시 출발했다. 집까지 1km 정도 남았을까. 빗줄기가 거세졌다. 불안해진 남편이 인도 옆으로 넓게 난 자전거 도로 쪽으로 자전거를 옮겨달리며 말했다.


조심해
콰당탕탕탕 쿠당
윽!




말 그대로 얼굴을 바닥에 내리꽂고 말았다. 조심하라는 말에 대답하며 약간 긴장된 상태에서, 남편이 가는 대로 자전거 핸들을 틀었다. 달리고 있던 쪽의 보도블록보다는 남편이 간 쪽 보도블록의 재질이 더 거칠고 빗물에 덜 미끄러질 것처럼 생겼기 때문이었다. 아, 그래서 남편이 저기로 가는구나 하며 핸들을 꺾는 순간 미묘하게 있던 보도블록 간의 높이 차이에 의해 바퀴가 걸렸고 직각으로 넘어가는 게 아니라, 남편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자전거 앞바퀴가 블록을 타버려서, 넘어져버리고 말았다.



넘어지는 순간 손을 분명 짚었는데 뒤에 둘째를 업고 있어 아기무게가 쏠리며 머리가 아래로 쿵. 두 손과 무릎이 힘을 주었지만 순간적으로 가해진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보도블록에 딥키스를 해버렸다. 몸을 금방 일으켜 세웠지만 머리가 얼얼하고 입은 뜨거우면서도 감각이 없었다. 스윽 만져보니 피가 나는데 줄줄 흐르지는 않는 걸 보니 코가 깨진 건 아니었고 거울을 보지 않아도 인중이 갈려서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입 안에서는 자글자글한 느낌이 드는 것이 아차, 이가 깨졌다. 오른쪽 앞니가 쪽이 나갔구나. 혀로 만져보니 거칠 거리고 날카롭게 느껴졌다. 아니 도대체 왜 안쪽이 깨졌지, 무슨 수로 그랬지 하며 동생 얼굴을 떠올렸다. 바보 같은 동생도 자전거 타고 잘 넘어지곤 하는데 앞니를 깨 먹어서 놀렸더랬다. 사실 자전거를 타고 넘어진 게 한두 번이 아니었던 우리는 서로 보고하고 놀리는 사이였기에 300m 거리에 사는 동생을, 친정 식구들을 한동안 보지 말아야겠다, 들키는 순간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이런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스스로 조금 어이없어하며 얼굴을 드니, 눈앞엔 울상을 한 남편과 첫째가 눈에 물음표를 가득 담은 채로 타던 자전거를 급히 세워두고 뛰어왔다.



아니.. 아니.. 지금 말했잖아. 지금 조심하라고 했잖아.
엄마, 방금 말했잖아. 바로 넘어지면 어떡해. 엄마, 코피 나 흐엉
아니..여보 방금 말했는데 얼굴 좀 봐봐. 괜찮아?(괜찮냐고 했던가 가물가물)



결혼 초반이었나, 남편은 그런 말을 했다. "아니, 왜 사람들은 애가 넘어지면 조심하라고 했냐고 하며 뭐라고 하는 거야? 그냥 괜찮냐고 하면 되잖아." 나는 답했다. "걱정되니까 그렇지.", "그럼 걱정된다고 하면 되는데 왜 뭐라고 해?" 그 말을 잊었는지 남편은 엄청 뭐라고 했다. 엄청 걱정되나 보다 저 인간, 이라고 생각하려 했지만 너무 계속 뭐라고 했다.


  "아니 여보, 아니 진짜. 내가 너 자전거탈 때 불안했는데.. 왜 따라 올라왔어. 그냥 가던 길로 가지. 아니 그리고 보도블록 타면서 운전하니까, 차탈 때도 가끔, 저번에 기억나지? 아니 내가 불안했어. 자전거 팔아야겠다 진짜. 아니 아 봐봐. 아 정말, 방금 말했는데. 진짜 조심하라고 하자마자."


너무너무 아픈데 아프다고 말을 못 할 만큼 이어지던 남편의 잔소리 폭격 뒤로 그걸 그대로 학습한 첫째가 거든다.


  "엄마, 아빠가 조심하라고 했잖아. 방금 말했는데 진짜 방금 말했는데, 엄마 조심하라고 하자마자 넘어지면 어떡해?"



아오!!!!!! 아픈 건 난데 괜찮냐고 걱정이나 할 것이지, 그만하면 좋겠다 생각했지만 이를 꽉 문다. 사실 말할 때도 입이 아플 것 같아서 말을 못 했다. 건네받은 휴지로 윗입술과 인중을 꾹꾹 눌러가며 집으로 가는 그 길이 정말 멀게 느껴졌다. 자전거도로가 나있는데도 아주 낮은 턱이 있는 곳도 내려서 걸었다. 아, 무릎도 너무 아팠다. 오늘은 안 찢어진 청바지 입었는데 하며 무릎을 내려보니 다행히 바지는 안 찢어져 있었다. 무릎만 깨져서 다행이다 생각하며 집으로 가는 내내 아 일요일인데, 내일은 한글날인데 치과 여는 곳이 있나, 응급실은 안 가도 되겠지 등등 생각하느라 머릿속이 복잡했다.







집에 와서 거울을 보니 가관이었다. 인중은 정말로 짓이겨져 있고 윗입술은 같이 갈려나가서 퉁퉁 부어 안젤리나 졸리 저리 가라였다. 부어서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윗입술을 살짝 들어보니 그 안엔 쪽이 나간 앞니에 보도블록에서 묻은 것 같은 검은 무엇인가가 이에 생긴 금 사이에 껴있었다. 참나 저건 치실이 들어가지도 않을 텐데. 아랫입술은 꾹 눌려 보랏빛이었다. 임플란트 얼마나 하나, 보험 되는 게 없는데. 복잡한 마음은 남편이 소독약을 들이붓자 사라졌다. 아파 죽겠다 진짜 너무 아프다, 아파 아파 으으! 소독을 하고 거울을 다시 보았다. 정확히 인중에 빨간색 수염이 생긴 것만 같았다. 찰리 채플린이구나. 웃음이 났다.


찰리 채플린은 대충 씻고 죽을 시켜 먹고 일찍 누웠다. 깨진 오른쪽 무릎에 남편이 넓게 발라놓은 약이 이불에 묻을까 싶어 조심히 올라오는데 왼쪽 종아리 안쪽에 통증이 느껴져 보니 손바닥만 하게 큰 크기로 멍이 들어부어있었다. 아 넘어질 때 자전거 몸체에 부딪혀 멍이 들었는데 몰랐구나. 그래도 애는 안 다쳤고 어디 부러진 거 아니니 이만하길 다행이다 하며 잠에 들었다. 남편은 밤에도 아기를 자기가 보겠다며 걱정하지 말라고 아기띠를 하고 설거지를 했다. 오랜만에 편하게 혼자 잤다. 오히려 좋은 건가?








공휴일인 다음 날, 남편은 출근하고 애 둘을 데리고 119에 문의 후 진료 중인 치과를 찾아 30분 차를 달려 검진 및 처치를 받고 일단은 괜찮을 것 같다는 얘기를 들었다. 피부과는 여는 데가 없어 상처를 열어둔 채 또 애 둘을 데리고 한글날 행사하는 곳에 가서 맞춤법 골든벨 1등을 했다. 경품을 타서 아이에게 건네주니 체험부스에서 뭘 색칠하겠다고 하여 하던 중 속담 퀴즈를 하길래 또 얼른 가서 맞추고 비눗방울을 탔다. 어떤 아이는 내 얼굴을 보고 손가락질을 했다. 그래 좀 웃기게 생겼지. 일하고 온 남편에게 자랑하니 고생했다며 좀 쉬란다.


또 다음날에는 피부과에서 고양이 세수 처방을 받았다. 이젠 네모난 수염이 아니라 가로로 긴 수염이 있는 것 같이 생겼다. 첫째가 학교에서 떡을 만들어왔다고 보여주며 할머니, 할아버지, 이모에게 줘야 한다고 전화하는 바람에 그 꼴을 동생과 친정 부모님께 들켰다. 상처가 쓸릴까 싶어 반바지를 입고 있던 터라 무릎도 숨기지 못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웃음으로 승화시킨다. 어떻게 넘어졌는지 첫째는 옆에서 몸으로 재연한다. 동생은 내 수염을 보고는 연기파 배우 같다고 하며 "혹시 넘어질 때 내 생각나지 않았어?"하고 물었다. 열받지만 사실이라 그랬다고 했더니 만족스럽게 비웃는다. 엄마아빠는 으이구 바보 했다. 아무도 괜찮냐고 물어보지 않았다. 참나. 그래서 웃겼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찰리 채플린이 그랬던가. 뭐 대충 맞는 것 같다.




*사진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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