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월 Oct 23. 2023

맥시멀리스트는 왜 비우기 시작했나

미니멀리스트가 되고 싶은 이유

시작은 둘째의 탄생이었다. 7년 만에 둘째를 임신하고 출산하게 되면서 짐에 압도됐다. 남편과 나, 그리고 첫째, 이렇게 세 명이 살던 집에 아주 작은 존재 하나 더 생길 뿐인데 왜인지 짐이 엄청 많아졌다. 아기 옷, 아기 장난감, 아기 침대, 유아차, 젖병 소독기, 기저귀 등 작고 많거나 엄청 크거나 계속 필요한 것들이 집 한 구석을, 아니 실은 부엌과 거실 모두를 점령했다. 배가 불러 둘째를 낳으러 갈 때 즈음엔 문득 어떠한 계기였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내가 죽고 나서 누군가 내 짐을 정리하러 왔을 때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는 내용의 무언가를 보고는 '내가 애 낳다가 잘못되면 이 많은 짐을 어떻게 처리하려나, 적당히 이고 지고 살아야겠다'라고 다짐했다. 그래서 부른 배를 부여잡고 에어컨 실외기실의 짐부터 정리해 나갔던 게 첫걸음이었다.






무언가 생각하고 결심할 때까지 오래 걸리고 한 번 마음먹으면 그걸 실행으로 옮기기까지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 사람은 임산부임에도 여기저기를 엎어나갔다. 첫 번째 타깃공간은 에어컨 실외기실. 실외기실에는 여행용 캐리어와 계절가전, 부피 큰 장난감 등이 아무렇게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꽤 큰 스피드렉이 있는데도 효율적으로 공간을 사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실외기실에 방치된 계절가전 상자와 대신 보관해주고 있던 남편 회사 동료의 바비큐통(?)을 비우고 나니 공간이 약간 생겼다. 받아놓은 아기 장난감 중 바로 쓰지 않을 것들을 분해하여 부피를 줄이고 비닐로 꼼꼼하게 포장하여 넣었더니 거실에 약간의 공간이 생겼다. 그래, 이거야.



그러자 앞베란다도 정리하고 싶어졌다. 우리 집 앞베란다는 두 개인데 하나는 안방 앞 베란다(이하 캠핑 베란다)이다. 우리는 그곳을 베란다캠핑을 하는 장소로 썼다. 이케아에서 나무데크타일을 사서 깔고, 테이블과 의자를 놓고 구이바다에 고기도 구워 먹고, 순대볶음도 해 먹고, 짜장면도 만들어 먹고, 당연히 라면도 끓여 먹는다. 물론 떡볶이와 어묵탕도 베란다에 구이바다지. 먹기만 하는 것은 아니고 첫째와 함께 놀이를 할 때도 종종 사용하면 마치 밖에 나온 것 같은 산뜻함을 느끼곤 했다. 그런데 옆으로 하나둘씩 캠핑용품이 쌓이기 시작하면서 처음의 쾌적함은 사라지고 겨우겨우 앉을 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사용빈도가 낮아지고 그냥 '창고1'이 되어가는 중이었다. 그걸 막고 싶었다. 이전의 공간을 찾고 싶었다.



그곳을 비우려고 보니 원래부터 창고처럼 쓰는 아이방 앞 베란다(이하 창고 베란다)가 가득 차 옮길 수 없었다. 우리 집은 팬트리도 창고도 없다. 이사오기 전 집에서 사용하던 스피드렉 중 넓은 것을 에어컨 실외기실에 두어 큰 짐을 보관하고 좁은 것을 창고 베란다에 두어 각종 공구들 위주로 정리하여 쌓아 두었다. 이전 집의 넓은 전실에서 쓰던 장식장은 전실이 없는 지금의 집에서 갈 곳이 없어 창고 베란다에 2층으로 쌓아 각종 물건을 켜켜이 넣어두었는데 폭이 좁아 너무 지저분했다. 베란다 바닥은 창고로 쓰면서 각종 짐들을 늘어놓았더니 어느새 가득 차 문을 열기도 비좁을 지경이었다. 저 짐들을 위로 쌓는다면 바닥이 확보될 텐데. 위로 좀 넓게 쌓는다면 캠핑 베란다의 캠핑용품을 옮겨 수납하고 다시 처음처럼 오롯이 휴식 및 여가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을 텐데.


기존의 스피드렉과 창고베란다 벽의 치수를 측정하여 스피드렉을 추가로 구입했다. 낑낑거리며 조립하고 높이를 맞춰주는 것은 남편의 몫. 모든 짐을 거실 한 편으로 빼내고 새로 주문한 스피드렉과 원래 있던 좁은 스피드렉을 결합하여 벽 안쪽에 고정했다. 낮은 장들도 빼내어 뒷베란다에서 실외기실로 가는 통로공간으로 옮겼다. 무겁고 자주 안 쓰는 아이스박스, 토르 박스로 스피드렉의 제일 아랫칸을 채우고 그 위로 텐트, 캠핑테이블과 의자로 차곡차곡 탑을 쌓았다. 그리고 스피드렉 옆쪽, 즉 아이방 창틀 아래쪽으로는 스피드렉에 넣기엔 키가 큰 하이브로우 우유상자를 세워두어 자잘하고 꼭 사용하는 캠핑용품을 담아두어 가져가기만 하면 되게 세팅해 놓았다. 원래 있던 공구도 용도별 크기별로 다시 담으면서 이사 이후 한번도 쓰지 않은 것들은 몽땅 버렸다. 쾌감이 느껴졌다. 남편의 갈 곳 없던 등산가방을 스피드렉에 고리를 달아 매달고나니 캠핑베란다도, 창고베란다의 바닥도 살아났다.


현재 캠핑베란다의 모습. 목표는 정리선반 비우기. 화분은 식물심어 아빠드리고, 각종 장난감은 서재와 놀이방 정리후에 이사시키고, 정리선반에는 구이바다정도만 넣고 덮개 덮기.





나도 살 것 같았다. 숨이 막혔던 두 공간이 살아나자 내 숨이 쉬어졌다. 아, 이거구나. 몸이 무거워 내가 숨이 막혔던 게 아니라 공간이 있어야 하는 거였구나. 그런데 문제는 이때가 출산 일주일 전이었다. 정리 시작했다 정리 끝났다. 오 이런.




*타이틀 사진 출처: Pixabay

*매주 월요일 연재합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