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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월 Oct 26. 2023

맥시멀리스트의 1일 1비움

이라 쓰고 비움벼락치기라 읽는다

조금 숨통 틔였다 싶었는데 둘째를 낳고 돌아오니 주로 살림하던 내가 없는 동안 고생한 남편과 양가 어머니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고마운데 안 고마웠다. 정돈되어 있지만 정신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남편은 나와 정리스타일이 달라 대청소마다 싸웠더랬다. 남편은 밖에 나와 있는 것들을 모두 안으로 넣는 것에서 정리를 시작하고 반면에 나는 안에 있는 것들을 모두 끄집어내어 정리를 하고 나서야 밖에 있는 것들을 안에 넣는다. 그러니 남편이 보기에 나는 정리를 한다고 하면서 더 정신없게 물건을 늘어놓는 이상한 사람이었으리라. 그렇지만 그 단계를 거치지 않으면 물건을 넣을 자리도 없을뿐더러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파악하기가 어렵고 자칫하면 다 포기하고 일단 쑤셔 넣기만 하게 되는데 내 기준에 그것은 정리가 아니다. 내가 돌아왔을 때 집은 남편 기준으로 정리되어 있었다. 그래서 깨끗하고 정돈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었지만 당시 냉장고에 붙여뒀던 내 친구와 찍은 인생네컷 사진은 남편의 손을 타고 사라져 버렸다(분명 버리지 않았으니 어딘가에 잘 두었을 텐데 어디에 뒀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여기 어디 저기에 놨다는데 안 보인다. 집을 다 뒤엎고 나면 찾을 수 있길 바랄 뿐이다).



그나마 냉장고는 결혼 후 유일하게 미니멀하게 유지하는 공간(?)이었는데 출산 전에 누구든 내 큰아이 밥 차려줄 때 고생하지 말라고 해놓은 반찬을 소비하지 않은 상태에서 양가 어머니가 더 채워두는 바람에 어지러운 상태에 놓여 있었다. 제일 윗 칸은 음료, 두 번째 칸은 완성된 반찬과 소분해 놓은 밥, 세 번째 칸은 각종 장 종류와 다진 마늘 등 양념, 손질된 채소, 그리고 과일과 손질 전 채소 칸으로 공간 침해가 없던 냉장고였는데 서로 영역다툼이 살벌하게 진행된 상태였다. 갑갑했지만 눈을 감았다. 그 뒤로 한 달여간 산후도우미님께서 냉장고를 맡았다.






기대반 걱정반이었는데 막상 살림을 산후도우미님께 맡기고 보니 편했다. 밥도 빨래도 청소도 신경 안 써도 되니 좋았다. 그러다 어느덧 다가온 이별의 시간. 남편은 필요하면 산후도우미님의 도움을 더 받으라 했지만 더 이상은 경제적으로 무리였다(돈 얘기는 빠질 수 없다). 슬슬 하면 못할 것도 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첫째 때는 조리원만 가고 산후도우미님의 도움은 받지 않았는데 잘만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산후도우미님과의 이별 후, 이제는 짐이 아니라 일에 압도됐다. 해도 티가 안 나지만 안 하면 티가 나는 집안일에 압도됐다. 해도 해도 끝이 없었다. 애 낳기 전처럼 어느 공간을 붙잡고 정리하고 싶어도 정리할 새가 없고 물려받은 아기물건들은 다시 켜켜이 쌓이는데 골라낼 정신이 없었다.


새벽에 일어나서 둘째 수유하고 첫째 밥해 먹여서 학교 보내고 먹은 것 치우고 둘째의 낮잠 1, 그동안 뭐라도 하면 좋은데 안기거나 업혀서만 자는 둘째 덕에 정리는 어렵고 청소나 좀 하고 세탁기 좀 돌리고 나면 다시 둘째 수유타임. 먹었으니 싸는 둘째 엉덩이를 닦아주고 부모와의 안정적 애착 형성과 건전한 정신 발달을 위해 잠시 놀아주다 보면 또 졸리다고 울어재끼면 안거나 업어주기. 그 상태로 건조기의 빨래 꺼내 개다가 허기가 져 시계를 보면 지나버린 점심시간. 반찬 꺼내 밥 먹고 나면 또 치워야 하는데 토끼잠자는 둘째는 또 깨서 수유타임. 와 제발 누워서 좀 자줘라 염불을 외며 수유 후 좀 놀아줄까 싶으면 첫째 학원 마치고 집에 돌아올 시간 임박. 냉장고에 들어간 반찬 다시 잘 안 먹는 첫째 위해 새 반찬 준비하고 부엌 정리하고 나면 저녁시간. 왜 때문에 또 부엌이 엉망인가 생각하며 정리하려는데 또 졸린 둘째. 업고 정리하고 깨워서 목욕시키고 또 수유타임. 줄째 업고 첫째 패드학습 봐주고 놀아주다 보면 드디어 남편이 와서 둘째를 업었다. 첫째 책 읽어주고 재우고 나면 거의 그냥 기절. 새벽에 두세 번 밤중수유하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






어느 날은 설거지에, 어느 날은 빨래에, 또 어느 날은 자리를 찾지 못해 그저 겹쳐지고만 있는 아기물건들에, 아니 그냥 그 모든 것에 대한 통제권을 잃은 나에 압도되었다. 그리고는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이르면 내년 초, 늦어도 내년 중반엔 복직을 해야 할 텐데. 그때는 이 집안일들을 어쩌지. 집이 무겁게(무섭게 아니고) 느껴졌다. 집이 편해야 하는데 집이 부담스러웠다.


집안일만 하며 내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글도 쓰고 싶고 책도 읽고 싶고 영어공부도 하고 싶고 운동도 해야 하고. 프라엘 마스크 쓰고 세라젬에도 누워 있고 싶고, 궁둥이가 뻐근하고 고관절이 뻑뻑하니 스트레칭도 좀 하고 싶은데. 시간이 없어하지 못하는 크고 작은 것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집안일은 아무리 힘을 써도 따라잡을 수 없이 생기고 또 생겼다. 하면 할수록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할 때마다 처음부터 제로베이스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방법은 하나였다. 빨리 매 맞기, 즉 미루지 말고 해 버리기. 해야 하는데, 해야 하는데 중얼거리기만 하지 말고 하기. 해버리고 마음 편하게 있기. 그게 나에게 필요한 거였다. 단순화된 집에서 집안일로부터 조금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려면 정리해야만 했다. 정리하려면 비워야만 했다.



인스타그램에서 미니멀하게 살며 정리에 도가 튼 사람들의 피드와 릴스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유튜브도 보기 시작했다. 꿀팁을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면(싱크대, 식탁 위 등)에는 물건이 없어야 한다는 말을 되뇌었다. 바닥에 물건이 없어야 청소가 단순하고 쉬워진다는 말을 새겼다. 수납장에는 물건이 가득 차 있으면 안 되고 얼마간의 유휴공간이 있어야 한다는 말을 품었다. 늘 그렇듯이 적용을 위해 집안 곳곳을 째려보기 시작했다.



*사진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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