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과의 추억이 담긴 옷과 헤어질 결심
둘째 옷을 정리하기 위해서는 옷장이 필요하다. 옷장을 또 살 수는 없었다. 정말 필요하면 사더라도 지금 가구를 늘리는 것은 짐을 정복하지 못하고 짐에 정복되는 것이라 생각했다. 일단 있는 것을 다 활용하고 난 뒤에, 그래도 부족하면 그때 사도 늦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내 옷을 비우기 위해 옷장을 열었다.
안방에는 드레스룸과 붙박이장이 있다. 요즘 아파트가 아닌 관계로 드레스룸의 크기는 작다. 안방에서 화장실로 연결과는 공간에 두 통의 붙박이장과 화장대가 전부다. 드레스룸 붙박이장 한 통은 아이가 쓴다. 안방에서 목욕 후 바로 옷을 입히기 위해서가 첫 번째 이유이고 아이방에 옷장이 없어서가 두 번째 이유이다. 아이가 쓰는 붙박이장에는 서랍장이 없이 상하부로 나뉘어 옷을 걸게만 되어 있는데 아이가 아직 아이인 관계로 위칸에는 두꺼운 겉옷을 걸고 계절옷을 리빙박스에 넣어 수납한다. 아래칸에는 계절에 맞는 상의를 걸고 바닥에는 수납함을 두어 속옷과 양말, 바지(접어서)를 정리해 두고 골라 입게 한다.
그 옆 한 통은 내가 쓴다. 여기엔 서랍이 두 개 있다. 짧은 외출복들은 걸어두고 서랍엔 속옷과 잠옷을 정리해 두었다. 두꺼운 외투는 방의 붙박이장에 이불 옆 칸에 가방들과 함께 보관한다. 아참, 달리기를 시작하며 산 두 벌의 러닝복과 필라테스할 때 샀던 레깅스도 서랍에 있다. 서랍이 얕아서 수납력이 영 좋지 않다. 어떤 옷부터 어떻게 처분해야 공간이 나올까 고민하는 중 옷들 사이로 빼꼼 엄마아빠가 사주신 옷들이 존재감을 드러낸다.
회색 호박 원피스, 그리고 빨간 스웨터. 원피스는 엄마가, 스웨터는 아빠가 사준 옷이다. 둘 다 최소 10년은 안 입은 것 같다. 용케도 버려지지 않고 살아남았던 이유는 엄마아빠가 사주셨기 때문에. 성인 된 이후에 사준 유일한 옷들이기에. 라고 썼는데 생각해 보니 엄마가 재수 후 대학입학 때 검은 코트를 사주셨던 게 생각났다. 그렇다면 '성인 된 이후에 사준 몇 안 되는 옷들이기에'로 바꾸어 적기로 한다.
회색 호박 원피스는 대학교 1학년 때쯤 겨울이었다. 연말에 있는 학과 행사에 입고 갈 약간은 격식 차린듯한 옷이 필요했다. 대학 입학과 동시에, 아니 입학하기 전부터 아르바이트를 했던 나는 옷을 살 돈이 없었다. 당시 시급 3800원~4000원을 받았는데 많이 버는 달에는 40만 원 정도를 벌었다. 집에서 매달 10만 원을 주셨는데 그걸로는 교통비내고 나면 얼마 남질 않았기에 아르바이트를 했다. 번 돈으로는 핸드폰 요금내고, 청약 넣고, 적금 넣고, 매일 밥(점심) 사 먹고 나면 데이트비용 내는 것도 부담스러웠으니 옷을 사는 건 백화점도 아닌, 아웃렛도 아닌 지하상가에서나 사는 것이었는데도 큰맘 먹어야지만 가능한 것이었다.
그래도 그건 그러려니 했는데 슬펐던 건 그건 엄마한테도 마찬가지였다는 것. 내가 중학생 때 아빠의 사업 실패로 살던 아파트가 경매로 넘어가버리고 우리는 반지하 단칸방은 아니고 반지하 투룸에서 월 15만 원을 내고 살았다. 부엌이랄 곳도 거실이랄 곳도 없이 신발장 옆 싱크대 옆 방-화장실-방으로 치열하게 나눠진 공간이 전부였던 그런 집에서 살았다. 연예인 박세미가 유튜브에서 엄마와 함께 그간 살았던 집을 돌아보며 진짜 최악이라고 말하는 걸 동생과 함께 봤는데, 우리가 살았던 집은 그것보다 나빴다. 그때의 기억 자체는 나쁘지 않아 그렇게 가난한 줄 몰랐다고 동생은 말했지만 그건 동생이 어렸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중학생인 나는 우리 집에 가난하다는 것을 알았다. 솔직히 좀 창피했다. 하지만 창피하지 않은 척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시간이 흘러 반지하 집에서도 나오고 좀 나아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넉넉하진 않았다. 적어도 내가 부모님과 함께 사는 내내 그러했다. 그러므로 아르바이트를 계속했고 또 그 돈을 쉬이 쓸 수 없었다. 물론 금액도 크지 않았지만 말이다. 격식차린 옷을 마련하는 건 정말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짜증이 났다. 구질구질하게 느껴지고 속상했다. 왜 늘 이런 식인가 답답했다. 엄마에게 하소연하듯 울분을 토하듯 말했더니 엄마는 지하상가를 지나가다 내가 사고 싶어 하며 고민했던 원피스를, 그때 당시 5만 5천 원인가를 주고 사주셨다. 난 그 옷을 입고 학과 행사에 참여했더랬다.
빨간 스웨터도 대학생 때였다. 쇼핑이라고는 같이 가본 적이 없는 아빠였다. 패션템이 아니라 꼭 사야 하는 상하의, 신발 등을 살 때 보통사람들과는 다른 기준으로 물건을 보고 사는 사람이었다. 상의엔 주머니가 꼭 있어야 하고 바지는 길이가 길면 안 되고 통이 좁으면 안 된다. 신발은 발등이 높아 꼭 신어보고 사야 하는데 운동화는 통고무로 바닥이 되어 있어야 한다. 모든 물건은 절대 인터넷으로 구매하지 않는다. 묘하게 까탈스러운 기준보다 더 까탈스러운 것은 그의 바디사이즈였다. 크지 않은 키, 불룩 나온 배. 아니 너무 불룩, 아주 불룩 나온 배. 그 배 둘레를 소화시킬 수 있는 하의를 찾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는데 설상가상으로 그는 참을성이 바닥이었다. 그렇기에 쇼핑을 갈 때마다 마음에 드는 것을 발견하기 전에 이미 참을성이 동이 나버려 쇼핑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집에 오기 일쑤인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나와 함께 옷가게에 갔더랬다. 어쩌다 갔는지는 기억나질 않는다. 어쨌든 그와 들어간 보세 옷가게에서 빨간 스웨터에 첫눈에 반하고야 말았다. 아주 도톰하고 부들부들한 것이, 그러면서도 쫀쫀한 것이, 아주 예쁜 빨간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그러나 가격은 4만 8천 원. 우물쭈물 쳐다보고 있는 나에게 아빠가 다가왔다. 아빠, 이 옷 예쁘지? 했더니, 마음에 들어? 사! 하면서 이 놈 주쇼 하고 결제를 했다. 아빠는 뒤를 생각 않고 쉽게 쓰는 스타일이라 엄마는 아빠 뒤통수에 '으이그~'하고 외쳤다. 아빠가 사준, 내 기억에서의 첫 번째이자 마지막 옷이었다.
그 옷을 나는 아껴 입었다. 아주 추운 날 나를 추위로부터 지켜달라는 의미로 골라 입었다. 꼼꼼하게 짜여 있어서 바람이 세어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옷을 입으면 아빠가 안아주는 것 같다는 상상을 하며 괜스레 더 든든한 느낌을 받곤 했다. 그래서 내가 가는 중요한 곳엔 빨간 스웨터가 함께 했다. 대학교 4학년 혼자 일주일 동안 기차여행을 가서 좀 두려운 와중에, 졸업 직전 임용고시를 보는 시험장에도, 한번 더 재수해서 가게 된 두 번째 임용고시 보는 시험장에도. 그리고 결국 합격소식을 받았다. 다 아빠가 응원해 줘서, 아빠 덕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옷들을 정리하려 마음먹었다. 주름진 호박 원피스, 보풀이 올라온 스웨터. 사진도 찍고 글도 남겼다. 기억에도 남겼다. 두어도 입지 않을 것이 뻔한데 두면 자리만 차지한다. 아니, 두어서 입는다 치더라도 난 더 이상 그때의, 대학교 1학년 때의 내가 아니다. 어울릴 리가 없다. 걱정스러운 것은 언젠가 부모님께서 돌아가신 뒤엔 엄청난 후회를 할 것 같단 것이다. 그러나 부모님이 가셔도 내가 그 옷을 보관한들, 입게 될 것 같진 않으므로 버리기로 한다. '-할까 봐'로 끝나는 생각은 정리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렇게 안녕을 고한다. 엄마아빠가 사준 옷도 버리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