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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유빈 Aug 26. 2024

내 생애 특별했던 한 선생님 (단편)

단편 : 나에게는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은사님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의 이야기이다.

여느 때와 다름 없이 평범한 학교 생활을 보낼 때였다.


한창 친구들과 점심시간마다 축구를 조지던 4학년이 끝나고,

5학년이 되던 때, 나는 '신'반으로 들어왔고, 담임 선생님이 할머니뻘 되시는 분으로 보였다.

(그 때는 할머니 뻘로 보였지만, 나이를 알고 나니 부모님보다 조금 더 나이가 많으신 분이셨다.

당시 내가 다니던 학교는 1반, 2반 이런 식이 아니었고, '인,의,예,지,신'반으로 분류되었다. 역시 율곡 이이 선생의 고향 아니랄까봐.. )


당시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 비교적 신설 학교였기에 시설이 좋았다. (인터넷 사진 발췌)


학기 초창기, 담임 선생님은 우리에게 정말 엄격하고 카리스마 있는 스타일이셨다.

남자 선생님과는 또 다른 카리스마였지만, 무언가 선생님께 나오는 그런 연륜의 카리스마가 있었던 것 같다.


학기가 얼마 지나지 않아, 담임 선생님께서는 학급 내에서 비둘기 기자를 뽑는다는 말씀을 하셨다.

비둘기 기자는 당시 어린이강원일보라고 하는 신문사에서 초등학생 대상의 기자를 뽑던 시스템이었는데,

나는 너무 재밌을 것 같아서 선생님께 하겠다고 말씀드렸다.

(어린이강원일보는 찾아보니 아직도 있는 것 같다. 들어가보면 초등학생들이 쓴 기사들을 찾아볼 수 있다.)


이 후, 나는 비둘기 기자로서 당시 강원도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한 쓰기도 하고, 시를 쓰기도 했다.


당시 어린이강원일보에 기재했던 시 (2005년)



학교 앞 산을 다녀오다.


당시에는 주요 교과목 수업을 제외하고 일 주일에 두 번 정도 자율학습 시간이 있었다.

다른 반은 어떤진 모르겠지만, 우리 반은 정말 특별한 활동들을 많이 했었다.


어느 날이었다.


자율학습 시간이 되서, 선생님께서는 우리를 데리고 학교 앞 산으로 데려가셔서, 당시 시에서 진행하던 ’생명의 숲'이라는 프로그램에 참석시켰다.


당시 우리 학교 앞 산의 자연 환경은 정말 좋았기에, 여러 종들의 식물들이 많이 살고 있었던 곳이었다.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프로그램인 것 같다. 그 때는 몰랐지만 '생명의 숲'이라는 프로그램의 목적이 '사람과 숲이 공존하는 숲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쉽게 말하면 ESG 활동'의 개념이라고 하더라.)


앞 산에 올라가니 아버지 뻘 되는 2분이 소형 마이크를 끼고 우리에게 이곳저곳 설명해주셨다.

 

당시 식물에 1조차 관심도 없던 나였지만,

지루한 책상 앞을 벗어나 선생님, 그리고 학급 친구들과 함께 밖에 나간다는 것이 정말 좋았다.

당시 친구들도 밖에 나간다는 생각에 다들 들떠 있었다.


참 단순한 나였지만, '아 이런 식물도 있구나, 우리 학교 바로 앞 산에 이런 버섯들도 살았구나.' 라는 것을 보았다. (물론 지금은 그 식물들의 이름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당시 우리가 갔던 학교 앞 산 (인터넷 사진 발췌)



시골에서 학급 친구들과 함께 지냈던 하룻밤


얼마 지나지 않았다.

담임 선생님께서는 어느 날 학부모들에게 안내장을 돌렸다.

체험 학습을 위해, 금요일 토요일 아이들과 함께 시골의 체험 학습장에서 시간을 보내려고 한다는 안내장이었다.


우리는 금요일 수업이 끝나고 저 먼 시골로 향했다.

시내에서도 버스를 타고 40분 들어가야 했던 시골.


'보광리'라는 곳이었다.


그곳에는 폐교를 다시 가꾸어 놓은 학교 건물이 있었고, (현재는 노인분들 평생학습, 교육 용도로도 쓰이는 것 같다.)

그 바로 옆에는 오리, 닭 등 조그마한 동물들을 키우는 곳과 함께, 바로 앞에는 계곡이 펼쳐져 있어 자연환경이 정말 좋았던 곳이었다.


당시 담임 선생님과 함께 우리를 지도해주셨던 분은 꽤나 마르시고 안경을 쓰셨던 강원도 사투리가 심하셨던 50대 분이셨는데, 하나하나 '이곳은 무엇을 하는 곳이다, 저곳은 이런 것을 하는 곳이다.' 설명해주셨던 기억이 난다.


우리가 갔던 보광리 현장 모습 (인터넷 사진 발췌)


당시 폐교였던 건물 내부에는 내가 유치원 때 보았던 그 나무 마룻바닥으로 채워져 있었고,

한 교실 안에는 피아노가 한 대 있었다.


당시 학급 친구들 앞에서 피아노로 윤도현의 '사랑했나봐'를 쳤던 기억이 아직도 난다.

(참 오래된 노래였지만, 당시 정말 유행했던 곡이었기에, 친구들이 박수를 치며 함께 노래를 불렀던 기억이 난다. 학급 친구들 전부 인싸 기질이 장난 아니었다.)


학급 친구들과 계곡에서 물놀이도 하고, 그곳에서 키우던 오리와 함께 놀기도 하고,

그렇게 낮 시간을 보내고 저녁이 되었다.


물놀이를 하니 배고팠던 것은 당연치사.


저녁이 되고, 우리는 계곡 앞 테이블에 6명이 한 조로 나뉘어,

선생님께서 준비해 주셨던 삼겹살을 구어 먹었다.

(당시 술맛을 몰랐던 우리였지만, 지금 다시 만난다면 그곳에서 함께 소주 한잔하며 삼겹살 먹고 싶은 생각이 날 정도이다.)


초등학생 당시 학급 친구들과 이런 경험을 했던 것이 참 값지지 않았나 싶다.  


저녁이 되고, 우리는 캠프파이어를 했다.

담임 선생님께서 준비해주셨던 깜짝 이벤트였던 것이었다.


체험장 운동장 가운데 장작에 불을 켜고 학급 친구들 모두가 둘러 앉아 당시 유행했던 윤도현의 '사랑했나봐', SG워너비의 '살다가' 등등 노래를 불렀던 기억이 난다.

당시 노래에 자신 있다던 친구들이 나와서 버즈의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을 불러 흥을 돋구기도 했다.


참 묘하더라. 어디 가서 학급 친구들이랑 이런 경험을 해보겠는가. 그것도 캠프 파이어를 하고.


담임 선생님께서는 당시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아직도 기억에 새록새록하다.

"너네들과 이렇게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어 정말 좋다. 너네들이 집에 돌아가면 부모님이 계시지만, 학교에 등교하면 학교에서는 선생님이 엄마야. 누가 괴롭히면 얘기해."


그 이후로 우리는 선생님께 '학교엄마'라는 명칭을 주로 썼었다.



어버이날에 깜짝 서프라이즈?


참 신기하게도, 그 이후였을까?

우리 학급은 일심동체가 정말 잘 되었다.


학급에서 체육대회를 준비한다고 할 때에도 모두가 나서서 본인이 계주를 하겠다고 했었고, 모두가 나서서 줄다리기를 하겠다고 했었다. 참 이런 학급 전국에서도 보기 드문 곳일 것이다.


5월 스승의 날이 얼마 안 남을 때였다. 우리 학급은 선생님을 위해 케이크와 이벤트를 준비하고 있었다.

당시 학급 반장이었던 여학생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은 '학교 엄마'인데 스승의 날 말고 어버이 날에 선물 드리는게 어떨까?"


모두가 찬성했다.

그래서 우리는 '학교 엄마, 가르쳐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문구를 케이크에 새기고,

선생님이 생전 상상도 못할 어버이 날에 케이크를 들고 깜짝 서프라이즈 이벤트를 열었다.



값진 경험, 그리고 느꼈던 보람


얼마 지나지 않았다.

담임 선생님께서 말씀하신다.

"강릉에 예전에 불 났던 것 본 적 있지? 화재를 경험해본 친구 있니?"

그 질문에 모두가 조용했다.

"불이 한번 나면 생명을 한번에 잃어버릴 수도 있어.
앞으로 소방 화재 관련 공부를 너네들과 해보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니?"


모두가 동의했다.

가끔 2주에 한번 정도 강원도 소방청에서 소방관 아저씨들이 와서 교육 해주기도 했었고,

소방서에 가서 실제 화재가 날 경우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실습해보기도 했었다.


우리는 학급 자율 학습 시간에 소방 화재 관련 공부를 했었고, 문제를 풀기도 했었다.

남들이 등교하지 않던 토요일에도 나와서 공부를 했었다.

선생님도 당시 해보지 않았던 소방 공부였기에, 쉬는 시간에는 항상 교재를 붙잡고 계셨던 기억이 난다.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토요일에도 나와서 공부를 한다는게 참 쉽지 않았겠다 생각이 든다.

근데 그 때는 희한하게도 참 재밌었다.

신기하게도 그 누구도 '안하겠다'라는 소리를 안하더라. 모두가 문제 풀기에 여념이 없었다.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 교실 내부 (인터넷 사진 발췌)


1달 정도 지난 토요일이었을까.

소방서에서 소방관 아저씨들이 나와서 우리의 시험을 감독하게 되었는데, 당시 무슨 시험인지 우리는 몰랐었다. (지금도 명확하게 기억은 안난다.)

1시간 가량 걸린 우리 학급의 시험은 끝났고, 다음 주였을까? 선생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 학급 소방 시험 성적이 도내 1위라고 합니다. 여러분들이 열심히 해 준 덕분입니다."


이게 도내 소방 경진대회 시험이었더라.

근데 우리 학급이 1등을 했었다. 표창으로 몇 백만원의 표창이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내가 살던 동네에는 아직까지도 가스가 제대로 들어오지 않아, 고생하시는 빈민가의 분들이 많이 계셨고, 담임 선생님께서는 그 분들을 위해 그 금액을 사용하자라고 말씀하셨는데, 당시 우리 학급 모두가 찬성했다.


당시 겨울이었다.


그 큰 금액을 우리 학급에서는 전부 구멍탄 (연탄)을 사는데 썼고, 우리가 직접 그 조그만 손으로 연탄을 나르며 보람을 느꼈던 기억이 난다.

연탄을 받으신 분들 집은 다 쓰러져 갈 듯한 모습이었고, 나 조차도 처음 보는 환경이었지만,

'너희 덕분에 연탄을 받게 되서 고맙다'는 그들의 얘기 하나가 초등학생인 나에게 큰 보람을 느끼게 해주었던 것 같다.


당시 공부했던 소방 관련한 지식은 약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내 머리에 잊혀지지 않고 있다.


빈민가에 연탄 나눔 활동 (인터넷 사진 발췌)



은사님과의 재회


나는 이 선생님과 8년 전에 마지막으로 만났다.


왠지 모르겠지만, 대학교 재학 당시 이 선생님 생각이 너무 많이 났던 것이다.

하지만, 선생님 연락처를 알 수는 없었으니, 당시 강원도 교육청에 있었던 스승 찾기 사이트에 들어가 연락을 넣었고, 담당자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 ㅇㅇㅇ 선생님은 현재 장학사시네요~"


담당자님께 연락처를 받아 개인적으로 연락을 드렸고, 어머니가 운영하던 카페에서 선생님을 뵈었다.

나는 나이를 먹었지만, 선생님은 여전히 그대로시더라.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당시 그 때의 모습이셨다.

전혀 늙지를 않으셨다.


"선생님 그 때가 정말 많이 생각나요. 제가 이렇게 돌아보면서 생각해보면, 선생님 같은 분이 없었어요.
주도적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여러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해주시고.
'생명의 숲' 참 재미는 없었지만, 지루한 책상 앞에 앉아 공부하는 것보단 재밌었거든요.

전 보광리 캠프가 아직도 기억납니다. 그 때 그 기억을 잊을 수가 없어요.
그 때가 처음으로 학급 친구들과 함께 밤을 보냈던 때였으니까요. 감사해요. 선생님"


다시 그 떄로 돌아가고 싶다. 그 때를 생각해보면 너무 즐거웠거든.

당시 담임선생님이랑 둘이서라도 다시 보광리, 생명의 숲 등등 추억의 현장에 가보고 싶은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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