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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윤혜 Mar 26. 2021

우리는 뾰족하지 않다 上

전통의 재발견, 산


한국의 산은 거대하고 화려하진 않아도 사람을 끄는, 섬세한 매력이 있다. 
그것이 어디에서부터 온 것인고 하니 
바로 그 고불고불한 멋으로부터 온 것 아닐까. 


횡성에 다다를 즈음 고개를 들었다. 창밖으로는 마른 겨울의 버석한 논이 이어졌고 뒤로는 아스라이 산이 이어졌다. 얼마간 높이를 두고 나란히 선 앞 등성과 뒤 등성이 잔물결처럼 굽이쳤다. 한 폭의 그림 같았다. 횡성역 정차 안내가 나오고 땅에 발을 디딜 때까지도 나는 그 풍경에서 눈을 떼지 못해 플랫폼 난간에 두 팔을 괴고 한참을 바라봤다. 어쩌면 시골 역 앞의 평범한 풍경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무엇이 그렇게나 마음에 남은 것일까.


지난 겨울에는 몽블랑Mont Blanc이 가까운 알프스 작은 마을에서 지냈다. 유럽에서 가장 높은 몽블랑(해발 4,808m)은 신생대의 날카로움보다는 마치 탁상이 우뚝 솟은 듯 우람하고 평평했다. 봉우리가 높은 만큼 계곡도 넓고 둥그랬다. 골은 깊게 내려왔으며 흘러내린 석회천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 집을 지을 수 있을 만큼의 경사에서 중턱까지 사람들은 점점이 집을 짓고 살았다. 흘러내린 물은 너무 많아 옥색 호수를 이루었고 마을은 거대한 봉우리 때문에 해가 항상 일찍 졌다. 고개를 넘어도 풍경은 변하지 않았다. 아니, 고개랄 것이 있을까? 고개가 곧 커다란 산이었다. 뒷산은 우뚝 솟은 앞산을 넘어야만 보였다. 여러 개의 능선이 각기 다른 모습으로 겹쳐 보이는 우리의 풍경과는 사뭇 달랐다. 


여름엔 남알프스 근처에 살며 모터바이크로 산속을 다녔다. 결이 뚝 뚝 끊어진 단층과 거대한 협곡은 지구 깊은 곳으로부터 뻗은 어떤 강력한 힘을 과시했다. 좁고 완만하게 올라가는 도로가 산 중턱부터 꼭대기까지 이어졌다. 길은 경사면을 따라 커다랗게 구불구불 돌았다. 트레커들은 바위와 나무 사이 오솔길 대신 가고 싶은 방향으로 너른 산을 개척했다. 한니발이 코끼리를 데리고 알프스 넘어 로마를 정복한 것도, 나폴레옹이 엘바 섬Isola d’Elba에 유배되었다 파리로 진격해 올라갈 때 걸어서 알프스를 넘을 수 있었던 것도 그 커다람이 있기에 가능했다. 


입이 떡 벌어지는 진풍경 속에서 나는 이따금 한국의 산을 생각했다. 커다란 구불구불함 대신 울진으로 넘어가는 불영사佛影寺 계곡의 고불고불함이 그리울 때가 있었다. 한국의 산은 거대하고 화려하진 않아도 사람을 끄는, 섬세한 매력이 있다. 그것이 어디에서부터 온 것인고 하니 바로 그 고불고불한 멋으로부터 온 것이라 생각했다. 그것은 지구 깊은 곳의 힘이 움직인다는,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의 것이 아니라 비와 바람이 오랜 시간 빚은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 같은 것이다. 


여린 골짜기와 매끄러운 바위들은 거친 듯하면서도 생기가 있다. 집채만 한 바윗덩어리가 거칠게 뚝 뚝 떨어진 알프스의 무섭고도 장엄한 모습이 아니라 이 바위를 딛고 올라서도 된다는 듯한 작고도 관대한 바위산이다. 그 곡선은 덧칠해 그리는 것이 아니라 한붓에 그려 농담濃淡으로 표현하는 그런 것이다. 바위 곁에는 하늘로 뻗은 침엽수 대신 골마다 살아남으려 애쓰는 소나무들이 제 뿌리내린 산처럼 굽어 자란다.


그런 산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산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는데, 그건 크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낮든 높든 어디든 산이 있기 때문이다. 어림잡아 우리 땅의 칠 할이 산이다. 태백산맥의 사방을 관망할 수 있는 해발 1,708m 설악산 대청봉도 산이고, 서울 서대문구와 종로구를 나누는 연희동의 300m짜리 안산도 산이다. 대구를 여름엔 더 덥고 겨울엔 더 춥게 만드는 네 개의 산도 산이다. 내가 횡성역에서 멈추어 산의 굽이를 한참이나 바라봤듯, 우리에겐 어디에서 바라볼 유려한 산이 있다. 그로부터 선조들이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끄집어냈음은 당연한 일이다. 지금은 둘로 갈린 강원도의 남쪽 고성에서 바라본 북쪽 고성, 일만 이천봉의 수려함을 짐작만 할 뿐인 그 실루엣을 떠올리며 우리 미美의 원천이 어디인지 다시금 생각했다. 



* 下 편으로 이어집니다.


* 경기아트센터 격월간지 <예술과만남> 2021년 02.03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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