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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윤혜 Mar 26. 2021

우리는 뾰족하지 않다 下

켜켜이 겹쳐진 산, 한국의 삶


* 上 편에서 이어집니다.



바다 건너 살다  보니 비로소 알게 되었다.
우리의 삶은 겹겹이 둘러싼 주름,
주름과 주름의 ‘ 있었다.
자글한  능선이 오르락내리락하  풍경.
살아 있는 . 저절로 그러한 것.
그것이 한국의 삶이자 영감이었다.



수류산방에서 일하면서 건축가 조성룡 선생님을 가까이 모시게 되었다. 선생님은 언제나 땅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산과 물과 더불어 살며 지은 오래된 집들에 대해, 사람이 산 따라 물 따라다니며 자연스럽게 생겨난 길에 대해 이야기하셨다. 앞주머니의 만년필을 꺼내 테이블 위에 냅킨을 척, 두고 사대문과 북악·인왕·남산·낙산을 차례로 그리셨다. 그리고 산으로부터 흘러나온 물을 그리셨다. 물은 곧 길이었다. 냅킨 안에는 도시가 생겨났다.


몇 해 전 선생님이 잠실 5단지 재건축 현상 설계 공모에 지명되었을 때, 수류산방은 공동 참여팀이 되었다. 우리는 아파트 촌村에 가려진 잠실의 굴곡을 읽으려 했다. 역사와 그곳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삶 말이다. 선생님은 잠실벌과 몽촌토성, 잠실에서 바라다 보이는 네 개의 산(아차산·관악산·남한산성·삼각산)을 가장 먼저 그리셨다. 그 능선에 누가 되지 않는 아파트를 설계하고자 한 것이다. 아파트는 높을수록 좋은 것도, 빛날수록 좋은 것도 아니다. 수류산방의 박상일 방장님은 설계 공모안의 이름을 ‘잠실대첩蠶室大帖’이라 지었다. 이 ‘첩’은 풍경을 담는 화첩畫帖도 되고, 오래된 것과 새것의 중첩重疊도 되고, 사람과 사람을 잇는 경첩도 되었다.


방장님은 켜켜이 겹쳐진 주름이 우리 문화의 정체성이라 말했다.  들뢰즈Gilles Deleuze ‘주름 언급했다. 주름은 멈춘 형상이 아니다. 끊임없이 접고 펼치는 운동이다. 하나의 선이 아니라 독특한  하나하나가 이어져 살아 있는 선이  것으로, 외부에 초월론적인 어떤 기준을 두지 않고 자체적으로 존재한다. 자율적인 것이다. 주름은 구부리고 펴지며 서로 다른 방향으로 운동하는데, 자신을 떠났다가 되돌아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러한 움직임을 무한히 밀고 나가는 것이 주름이다. 어떠한 정신의 , 영혼의 . 주름 위에 주름을 만들고, 주름을 따라 주름을 만든다. 주름의 작은  하나하나가 관계를 맺고 영향을 미친다. 살아 움직이는 우주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때는 주변의 산과 들뢰즈의 주름과 우리의 땅이 무엇을 주는지 명확히 알지 못했다. 바다 건너 살다  보니 비로소 알게 되었다. 눈을 들면  자글한  능선이 오르락내리락하는  풍경이 바로 한국의 삶이자 영감이. 우리의 산은 겹겹이 놓여 더욱 매력적이다. 고불고불한 곡선이 켜켜이 겹쳐 보일 , 우리는 그것에 우리 삶의 모습을 연결시켜볼  있다. 그것은 살아 있는 것이었다. 우리의 삶은 겹겹이 둘러싼 주름, 주름과 주름의  ‘ 있었다.


잠실대첩이 당선된 후 홍성에 있는 이응노의 집에 들렀다. 조성룡 선생님은 이 건물로 2013년 한국건축문화대상을 받았다. 이응노의 집을 감싼 월산은 안온했다. 그 편안함은 낮게 굽어보는 산의 따뜻함에서 비롯했다. 선생님은 건물의 귀퉁이를 산의 능선에 맞춰 설계하셨다. 건물 안에 앉아 통창으로 네모난 끝이 따스하게 산자락에 가 닿는 풍경을 보았다. 사람이 지은 건물人工이 스스로 그러한 자연自然과 연결되어 있었다. 옛사람들의 집도, 그 처마 끝도 그러했겠구나. 저녁 해가 들자 해를 등진 뒷산은 금세 어두워졌고 앞산은 남은 빛을 어깨에 지고 명암을 달리했다. 옛 지도에 나온 대로 구불구불 되돌려 놓은 길을 따라 연밭과 밭두렁을 거닐었다.


사람 사는 모습은 땅으로부터 나는 것이라 믿는다. 아리랑 아라리요 넘는 고갯길도, 우리의 구슬피 꺾는 목도, 수묵화의 부드러운 번짐도, 명주실의 울림도 둥그렇다. 우리는 뾰족하지 않다. 한복의 주름도 우리의 내딛는 발걸음도 그렇다. 서양의 음악이 피날레를 향해 커지다 일순간 끝나지만 우리는 오히려 , 하고 떨어져 조용히 사라진다. 공기 중으로 녹아든다. 일본의 고토琴와 중국의 고쟁古箏이 가조각(상아 조각) 인조 손톱으로 현을 뜯어 쨍쨍한 소리를 내지만 우리는 무언가 증폭하지 않는다. 울림은 저절로 그러할 뿐이다.


우리에겐 대륙의 황산과, 일본의 화산과  다른 우리의 산이 있다. 주름과 주름은 인조적으로 형성할  없다. 올라가는 처마 끝과 뒷산의 능선을 생각한다. 보따리 메고 고개고개를 넘는 사람들의 걸음걸이를 생각한다. 굽이진 질곡을 닮은 소나무를 생각한다. 반도의 아름다움은 섬세하다. 알프스를 떠올려 보라. 캐나다의 어느 호숫가를 상상해 보라. 필시 그곳에는 거대하고 날카로운  앞에 호수가 있다. 우리의 산을 떠올려 보라. 무엇이 보이는가. 바로 그것이 우리의 멋이다.



글 전윤혜 음악교육을 전공하고 월간 ‘객석’에서 서양음악과 우리 음악을 다뤘다. 지금은 수류산방의 편집자로 있으며 한국과 프랑스를 오가며 산다. 여행 책 <별것 아닌 것>을 썼다.

+ 사진 서헌강



* 경기아트센터 격월간지 <예술과만남> 2021년 02.03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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