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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윤혜 May 29. 2021

옆집 여자의 살인 下

파리 오페라의 <파우스트>가 보여주는 파리 서민들의 일상

그곳에 우리가 상상하는 파리는 없다-

진짜 파리의 모습을 알고 싶다면, 토비아스 크라처의 <파우스트>


옆집 여자의 살인 上에서 이어집니다. 


악마와 인간이 맺은 계약. 인간의 끝없는 욕심과 뿌리칠 수 없는 유혹들. 1,2부로 이루어진 괴테의 <파우스트>(19세기 초 출판)는 당대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작품이었음에도 쉽사리 오페라화되지 못했다. 인간의 존재를 성찰하는 심오한 철학, 악마와 주고받는 상징적인 대화들을 기승전결이 분명한 노래극으로 만들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괴테의 명성에 누가 도전장을 내겠는가. 잘해야 본전이다. 40년쯤 후 가까스로 프랑스 작곡가 베를리오즈가 원작이 아닌 연극 대본을 바탕으로 한 오페라 <파우스트의 겁벌>(1846)을 만들었고, 이에 구노도 다른 연극 대본으로 <파우스트>(1849)를 올린다. 두 작품 모두 파우스트 전체 내용을 담기보다 비극적 남녀 이야기가 주가 되는 1장 '그레첸의 비극'(오페라 속 이름은 '마르그리트')만 다룬다. 


이야기는 이렇다. 자살하려던 늙은 파우스트는 악마의 도움으로 젊음을 되찾는다. 젊은 파우스트는 값비싼 보석으로 순진한 처녀 마르그리트를 꾀어 하룻밤을 보내고, 마르그리트는 그의 아기를 임신한 채 파우스트를 기다린다. 이를 알게 된 오빠 발렌틴은 파우스트와 결투를 벌이다 죽고, 마르그리트는 실성해 결국 아기를 죽이고 감옥에 갇힌다. 뒤늦게 찾아온 파우스트가 같이 떠나자고 청하지만, 마르그리트는 그의 청을 거절하고 죽음을 택한다. 


젊음을 향한 욕망, 순수한 여자를 농락한 남자, 사랑으로 인한 살인, 자살... 뻔하다. 전형적인 아침 드라마 스토리. 150년 전 귀부인들이 즐겼을 법한 치정 드라마 정도 될까. 당시 오페라들 대부분은 내용이 이렇다. 아름다운 클래식 음악과 발레로 포장되어 있지만 스토리는 결국 남녀의 사랑이며, 비극으로 끝맺는다. 


구노의 <파우스트>도 그렇다. 슬프고도 뻔한 사랑 이야기니 일단 화려하게 만들었다. 아예 대규모 합창, 발레 군무 같은 볼거리를 넣어 그랑토페라(Grand Opera, 주로 3막 구성인 오페라와 달리 5막 구성에 화려하게 구성한 큰  오페라)라는 새로운 오페라 장르를 창시했을 정도다. 철학은 뒷전으로 미뤄도 볼거리가 많으면 흥행하듯 그때도 그랬다. 흥행하면 된 거니까. 괴테에게는 못 미치지만 오페라 작곡가로서는 본전을 뽑은 셈이다. (실제로 당시 독일 사람들은 구노의 <파우스트>를 파우스트 이야기로 인정하지 않고 <마르그리트 이야기>라 불렀다) 


150년 전에야 화려하면 되었겠지만, 이 오페라가 지금 우리 시대 사람들에게도 어필이 될까? 이 3시간짜리 크고 긴 오페라를? 연출가 토비아스 크라처는 이 고루한 이야기를 불쌍한 옆집 여자의 이야기로 바꾸어 놓았다.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를 마치 옆 원룸에서 일어듯, 초정밀한 현실주의 오페라로 연출한 것이다. 토비아스 크라처의 <파우스트>에는 지금 파리의 모습이 담겨 있다. 파리 외곽 어느 가난한 공동주거지. 그곳엔 우리가 상상하는 낭만적인 파리는 없다. 




원작 오페라 1막 : 파우스트의 서재. 

자살을 시도하는 늙은 파우스트와 그에게 온 악마 메피스토펠레와의 계약. 청춘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파우스트의 소원대로 메피스토는 젊음의 물약을 주고, 둘은 함께 아름다운 여인 마르그리트를 찾으러 간다. 


크라처의 연출 1막 : 파리 구시가 건물의 서재

토비아스 크라처는 파우스트의 집을 통해 지금 프랑스 할아버지 세대의 전형적인 거실을 보여준다. 지난 시절 돈 꽤나 벌다가 이제는 홀로 남아 연금으로 살아가는, 남은 인생이 무의미한 흰머리 할아버지의 집. 곡선 장식의 오래된 갈색 가구, 액자식 몰딩이 세로로 길게 들어간 벽, 천장까지 짠 고동색 책장, 나무 바닥, 황토색 카펫, 작은 티비, 금색 프레임의 큰 거울, 90년대 스타일의 메탈 프레임에 검은 가죽 의자, 긴 세로창과 커튼. 구시가에 자리잡은 할아버지는 젊은 시절부터 지금까지 쭉 이곳에 살아왔다. 모든 건 과거에 멈춰 있고 어두운 가구들엔 후회가 묻어있다. 


첫 장면. 매춘부와 매춘을 하고 잠에서 깬 파우스트 할아버지.
악마와의 계약으로 다시 젊음을 되찾은 파우스트.
밤의 파리를 날아 마르그리트를 찾으러 간다. © Yoonhye Jeon


원작 오페라 2막 : 부활절 축제 중인 거리

떠들썩한 거리에서 입대를 앞둔 마르그리트의 오빠 발렌틴이 마르그리트의 앞날을 걱정하고, 마르그리트의 오랜 친구(이자 그녀를 짝사랑하는) 시벨이 그녀를 지켜주겠다고 약속한다. 이들을 본 메피스토가 나타나 둘을 저주한다. 파우스트는 마르그리트를 찾아 헤매다 그녀를 만나 집까지 에스코트한다. 


크라처의 연출 2막 : 파리 외곽의 동네 농구장

'부활절 축제의 거리'라니. 예수님이 부활해서 기쁜 축제는 이제 퇴색됐다. 아이들은 부활절 초콜렛을 기다리고 어른들은 그런 아이들에게 초콜렛을 쥐어주고 휴가를 떠나기 바쁘다. 시끌벅적한 전통 장날 풍경은 기억 속으로 사라져간다. 그럼 요즘 사람들은 어디에 모일까? 크라처는 축제 거리를 집 근처 농구장으로 연출했다. 어두침침한 농구장. 거리 젊은이들의 상징. '돈 안 내고' 모여 즐길 자리가 이제는 동네 농구장밖에 없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축제에서 와인을 마시는 장면은 레드불을 나눠주는 것으로 대체했다. 온통 검정 투성의 운동복과 흰색 운동화를 신은 남자들. 컬러풀한 크롭셔츠와 쇼츠 혹은 조거 팬츠의 여자들. 농구장이 너무 깨끗한 것 빼고, 또 담배 피는 사람이 없는 것 빼고는 정말 그 풍경 그대로다. (그래피티까지 있으면 금상첨화.) 이제 파우스트는 마르그리트를 찾아 클럽으로 간다. 


실제 공중파 방영 장면. 축제 거리를 농구장으로 바꾸었다. 공연 중에 농구를 하는 오페라는 처음 본다. 파우스트도 골을 넣는다. 물론 메피스토가 도왔지만. ©Yoonhye Jeon
마르그리트를 찾는 파우스트. 그녀는 클럽에서 놀고 있다. 오른편 메피스토 대사는 "여기 친절한 소녀들을 봐"(소름) 다만 왈츠에 맞춰 춤추는 건 무리수.. ©Yoonhye Jeon


원작 오페라 3막 : 마르그리트의 집

시벨이 문앞에 꽃을 놓고 가자 메피스토는 이에 지지 않으려 파우스트에게 보석 목걸이를 건넨다. 메피스토가 이웃집 여자를 꾀어 집을 비운 뒤, 건물에 홀로 남은 둘은 사랑에 빠진다.


크라처의 연출 3막 : 파리 외곽, 마르그리트의 아파트

가장 전형적인 파리 외곽의 삶. 19세기 후반 오스만 시장이 계획한 5층 도시 파리는 이제 옛말이다. 구도심을 제외하고 이를 둘러싼 도시 외곽은 이제 고층 아파트 지대가 되었다. 우리는 아파트를 최고의 주거 환경으로 치지만 프랑스는 그렇지 않다. 아파트는 가난한 이들의 공간이다. 자신의 공간을 '공유'한다는 발상은, 돈이 없어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이다. 결국 아파트에 거부감이 없는 이민자들과 외국인들, 돈 없는 프랑스인들이 공동주거로 모인다. 이는 출입구 앞 우편함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프랑스에서는 주소를 쓸 때 대개 아파트 동까지만 쓰고, 호수 대신 이름을 쓴다. 우체부는 이름을 찾아 넣는다. 숫자가 아닌 '내가' 내 공간의 대표인 것이다. 반대로 생각하면, 이제 이곳에 사는 개인은, 내 집의 주인으로서가 아니라 이 공동주거지 거주자 이름 중 하나인 것이다. 이사 할 때마다 덕지덕지 갈아끼운 이름들, 전단지 금지(NO PUB) 스티커, 1990년대 지어진 듯한 무성의한 시멘트 건물과 공장식 유리문. 남자의 사랑에 고픈 옆집 아줌마의 참견도 현실 그대로다. 


마르그리트의 방은 전형적인 아파트의 2p(거실/침실 처럼 공간이 두 개란 뜻)로, 거실 겸 다이닝 공간(지금 마르그리트가 앉아있는 곳)과 작은 침실, 화장실, 욕실로 구성된다. 공동주거 건물의 전형인 작은 창, 아무 장식도 없는 네모난 벽과 복도와 화장실, 아무리 작은 화장실이어도 욕조를 놓는 오래된 프랑스식 설계(현 세대에게는 샤워 부스를 넣은 이탈리안 욕실이 대세다.) 파우스트 집의 긴 창과 긴 커튼, 오래된 가구, 널찍한 구조와 대조적으로 이곳은 모든 것이 네모낳고 작다. 가난한 동네에서 태어난 젊은이의 주거는 이렇다.


이 허름한 아파트에 파우스트가 찾아와 비싼 보석을 건네고, 가난한 마르그리트는 그에게 홀린다. 등장인물들이 건물 안에 들어가면 연출 방식이 조금 바뀐다. 메피스토의 하수인들이 주인공들을 따라다니며 영상을 찍는데, 영상은 고스란히 건물 외부로 전면 재생되어, 동시에 사람들의 표정도 자세히 살필 수 있게 된다. 무대에서도 티비나 영화처럼 투 채널 감상이 가능한 것. 집 안에서는 등장인물들을 자세히 볼 수 없기 때문에 마련한 장치라는 생각도 들고, 서로 다른 관점의 장면을 한꺼번에 볼 수 있어 흩어졌던 집중력을 모으는 역할도 한다. 


마르그리트의 집을 찾아온 젊은 파우스트. 전형적인 파리 외곽의 아파트 입구 모습. 앞은 우편함, 문 왼편은 이름별로 누를 수 있는 초인종. 사는 사람이 많아 초인종 수도 엄청나다.
건물 안에서 일어나는 상황은 메피스토의 하수인이 안에서 직접 촬영하는 영상을 건물 벽면에 동시 재생해, 한 번에 두 개의 관점을 볼 수 있도록 연출했다.




원작 오페라 4막 : 마르그리트의 집

마르그리트는 파우스트의 아기를 가졌다. 그러나 파우스트는 돌아오지 않고, 이에 시벨이 파우스트에게 복수를 다짐한다. 마르그리트가 교회에 가서 아기를 위해 기도를 드리던 중에 메피스토가 나타나 그녀를 저주한다. 마르그리트의 집 앞. 오빠 발렌틴이 돌아오고, 마르그리트의 사정을 알게 된다. 발렌틴은 그녀를 잊지 못해 다시 찾아온 파우스트와 결투를 하다 죽고, 실성한 마르그리트는 아기를 죽인다. 


지하철을 타고 산부인과로 가는 마르그리트. 


크라처의 연출 4막 : 파리의 지하철, 산부인과와 마르그리트의 아파트.

파우스트의 아이를 임신한 마르그리트는 지하철을 타고 산부인과로 간다. 교회에서 기도하는 마르그리트를 지하철 속 불안한 여자로 바꾸었다. 달리는 지하철에서 메피스토의 환청에 시달리는 마르그리트. 환청에서부터 진짜 메피스토를 만나게 되기까지 연출이 압권이었다. 역에 도착한 승객들이 우루루 내릴 때 그 발을 클로즈업 해 전체 화면으로 투사했는데, 나가는 발들이 관객을 향해 3D처럼 다가왔고, 관객이 전체 화면에 정신이 팔린 사이 오른편의 작은 지하철 칸엔 갑작스레 마르그리트와 메피스토만이 홀로 남아 있게 된다. 오싹. 


마르그리트의 복장은 파리 사람들의 상징 스트라이프 티셔츠와 청바지. 한편 전장에서 돌아온 오빠 발렌틴은 모든 사실을 알고 파우스트와 결투를 신청한다. 후줄근한 퇴역 군인들이 지나고, 동네 주민(대개가 이민자로 이루어진)들이 모인 가운데 발렌틴은 죽음을 맞이한다. 사랑하는 남자에게 버림받고 오빠까지 잃은 마르그리트는 결국 실성해 욕조에 아기를 담가 죽인다. 파우스트에게 목걸이를 받고 행복해 하던 그 욕실에서 말이다. 옆집에서 일어났다고 해도 믿을 법한 디테일로. 



파우스트의 아이를 임신한 것을 알게 된 마르그리트. 초음파 사진 역시 동시에 따로 재생되도록 했다.
전장에서 돌아온 마르그리트의 오빠 발렌틴, 파우스트와 결투 후 죽다.

원작 오페라 5막 : 악마의 연회. 발푸르기스의 밤 -> 감옥

파우스트가 메피스토의 꾐에 빠져 망각의 술을 마시려던 찰나 마르그리트가 환영에 나타난다. 파우스트는 술 마시기를 거절하고 그녀가 있는 감옥으로 간다. 마르그리트는 함께 도망치자는 파우스트의 청을 거절하고 쓰러진다. 감옥이 무너지고 천사들이 마르그리트가 구원 받았음을 노래한다. 파우스트는 천사의 칼에 쓰러진 메피스토와 함께 지옥으로 떨어진다. 


크라처의 연출 5막 : 파리의 거리 -> 감옥

처음 마르그리트를 찾아 파리를 날았던 1막처럼, 다시 하늘을 날아간다. 이번에는 불타는 노트르담이다. 불길은 점점 거세어진다. 땅으로 내려온 두 사람은 말을 타고 파리 거리를 달린다.  미리 제작된 영상 속 두 사람이 일순간 무대에 등장한다. 특수 제작된 말을 타고서. 말은 제자리에서 달리지만 주변 영상이 바뀌며 파리 시내를 다니는 듯한 효과를 준다. 파우스트는 달리면서 마르그리트가 아기를 죽이는 환영을 본다. 


파우스트는 감옥에서 마르그리트를 만나 함께 오열하고 (여기서 마르그리트와 파우스트, 메피스토의 3중창 '순결한 천사여, 빛나는 천사여Anges purs, anges radieux'가 압권....) 감옥에 면회를 온 짝사랑남 시벨이 마르그리트 대신 악마에게 붙들려 가는 것으로, 그래서 마르그리트가 구원을 받는 것으로 끝이난다. '예수 다시 사셨네Christ est ressuscité'하는 합창과 함께-


악마의 연회를 건너, 마르그리트를 찾으러 가는 길은 파리를 날아서 가로지르는 것으로 바꿨다. 불타는 노트르담을 배경으로.
파우스트에게 보이는 환영. 마르그리트의 살인 장면. 
마지막 장면. 마르그리트 대신 지옥으로 떨어지는 시벨과 오열하는 마르그리트, 다시 늙어버린 파우스트. © Yoonhye Jeon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무도회나 하는 오페라? 아름다운 장식과 샹들리에, 별천지 사교계 생활을 보여주는 낭만? 그런 건 이미 깨진 지 오래다. 유흥할 것이 없던 시절 오페라에서 사교와 친목을 쌓던 귀족 관객들의 모습을 오페라하우스가 아직도 흉내낸다면, 그런 정신으로는 이제는 퇴보할 일만 남았다. 이제 관객은 상류 사회를 올려다보지 않는다. 현대를 배경으로 한 새 연출조차 엘리트 집안이나 갑부의 생활을 그리지 않는다. 그건 아침 드라마가 다 보여준다. 아니 드라마까지 갈 것도 없고 SNS만 봐도 모나코에 사는 호화 컨설턴트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는 시대다. 


아이러니하게도, 여전히 오페라를 보러 가는 사람들은 화려한 옷을 입고 인터미션에서 샴페인을 마시고 친목을 다지곤 한다. 정작 농구장의 사람들은 농구장에 머물고. 티켓 값이 200유로씩 하는 오페라를, 월급 1,200유로를 받고 절반을 월세로 내는 사람들이 올 수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연출도 결국은 오페라 관람 계층의 서민 탐험 같은 것일까?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금요일 밤의 <파우스트> 공중파 방영은 정말 중요한 것이었다. 첫째 오페라를 누구에게나 열었고, 둘째 고전을 마치 옆집에서 일어나는 듯, 가깝게 묘사해 우리 삶에 들였으니까. 젊은 여자와 즐기고 싶은 할아버지, 선물에 홀려 그와 잠자리를 한 여자, 그러다 그의 아기를 가지고 남자를 기다리던 여자가 버림받고 미쳐버린 이야기. 그렇게 아기를 죽이고 감옥에 갇히기까지. '가난한 아파트에 살며 클럽에서 젊음을 즐기지만, 한편으론 낭만을 꿈꾸는 젊은 여자가 부자 남자의 꾐에 빠지는 이야기' 라는 타이틀을 갖다 붙이니 제법 그럴싸해진다. 미쳐버린 옆집 여자가 우리집과 똑같이 생긴 화장실 욕조에서 아기를 익사시켜 죽인다고 생각하니 끔찍하다. (19세기 뼈대를 그대로 둔 작품이니 페미니즘적으로 접근할 수는 없다. 아마 어느 시점이 되면 남녀 역할을 바꾸거나 줄거리를 수정한 연출도 나오겠지.) 


오페라에 현실을 들이는 것은 언제나 중요하다. 귀뿐 아니라 눈이 감상하고 공감해야 하는 예술이니까. 공감이 없는 예술은 언젠가는 고립된다. 낡고 고루해진다. 만약 오페라가 귀족 놀음이라는 정체성에 매여 점점 현대인의 삶과 분리된다면, 그땐 고립조차도 넘어 결국 소멸에 이를 것이다. 그렇기에 오페라 연출가는 매번 새로운 시선으로 새롭게 연출해야만 한다. 어떻게라도 그 이야기들을 우리 삶에 집어넣을 수 있도록.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볼 수 있도록. 토비아스 크라처의 <파우스트>처럼 말이다. 


*카피라이트가 없는 사진은 모두 © Monika Rittershaus/O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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