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사 카르텔 엘 니도에서 프라이빗 보트를 빌리다
“12,000페소(276,000원)입니다.”
여행사에서 프라이빗 투어 금액을 내밀었다. 현지 식당에서 둘이 밥 한 끼 먹는데 120페소(약 2,760원). 12,000페소라니. 밥 100번 먹을 값이다. 푸에르토 프린세사에서 만난 친근한 트라이시클 아저씨가 잘 아는 곳이 있다며 데려간 여행사였는데... 터무니없는 가격에 믿었던 우리가 바보지, 하고 나선다.
아름다운 섬이 가득한 엘 니도에 도착했다. 그러나 투어를 통하지 않고선 바다를 건널 수 없단다. 친구들이 충고했던 ‘관광지화’가 이런 걸 말한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수많은 보트들 중에 우리를 실어줄 보트가 없다니. 환경 보호를 위해 그 외 관광객들은 제한한다는 그들의 설명. 이미 정부가 무분별한 난입을 막기 위해 비싼 환경보호세와 특별세라는 조치를 취했음에도 ‘오로지’ 무언가를 통해야만 한다는 건, 우리가 봤을 때 그 뒤에 비즈니스가 있단 뜻이다. 여행사 투어 다신 안 하겠다 맘먹은 게 불과 이틀 전. 정말 방법은 없는 걸까?
엘 니도에는 경치 좋은 섬, 비치, 라군, 동굴들을 서너 군데씩 묶어 A, B, C, D로 나눈 투어를 진행한다(요즘은 E도 생긴 것 같다). 대부분 그룹 투어를 이용하고 가격은 1,200~1,500페소(약 28,000~35,000원) 선이다. 몇 군데의 여행사를 가니 가격과 방식과 설명이 모두 같다. 환경보호세와 인기 지역에 들어가기 위한 특별세(라 부르지만 우린 ’입장료’라 해석했다)까지는 정부 관할이니 같은 가격일 수밖에 없다 생각하지만, 몇 군데를 돌아도 여행사들의 재량이 없다. 흥정도 없고, 고객이 떠날 때 아쉬운 마음도 없다. 그저 고객을 연결하는 느낌.
“저희는 가고 싶은 곳과 가는 시간을 직접 정하고 싶어요.” 하니
“아 조금 더 특별한 걸 원하시는군요.” 하며 프라이빗 투어를 권한다. 그렇다. 이곳에서 ’투어’는 디폴트다. 정기적으로 운항하는 셔틀이 있거나, 따로 보트를 빌릴 수 있냐는 물음엔 하나같이 절대 불가능이란다. 우리는 확신한다. 여행사 카르텔. 마피아!
니콜라스 생각은 확고하다. 만약 어쩔 수 없이 투어를 해야 한다면 그룹 투어는 절대 하지 않겠다고. 알아보니 프라이빗 투어는 이것저것 빼면 9,000페소 정도에 가능할 것 같다. 그래도 여전히 비싸다. 배가 고파지며 니콜라스 사고가 정지된다. 밥 먹으며 생각해 보기로 한다.
엘 니도는 참 작은 마을이다. 입구의 거대한 석회암 절벽을 지나 5분 정도 걸으면 막다른 끝인 항구에 닿는다. 항구 언저리의 나무집들엔 현지인들이 산다. 동쪽에 위치한 항구에서 서쪽 끝까지도 5분이 채 안 걸리고 가로 세로 도로가 만나는 사거리에 여행자 펍이나 호텔, 기념품 샵들이 있다. 많은 건물들이 공사 중이고, 셀프 빨래방이 들어선 네모나고 거대한 5층 호텔이 주위의 학교와 성당과 목조 가옥들을 사뿐히 누른다. 운동장엔 농구 경기를 하는지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 있다. 여행자 무드를 느끼고 싶어 펍으로 들어선다. 붉은 등, 루프탑, 선풍기. 오랜만에 보는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 삼삼오오 모여 감자튀김에 맥주를 마신다.
“그래! 이게 바로 배낭여행 기분이지! 니코, 동남아시아 유명한 도시들엔 이렇게 꼭 여행자 거리가 있는데, 무드가 항상 비슷해. 난 그 무드가 좋고. 와 진짜 오랜만이다. 너무 좋아.”
그러나 좋은 기분도 잠시. 현지 물가에 너무 익숙해진 탓일까? 어제만 해도 레드 호스 한 병에 밥을 120페소에 먹었는데, 여긴 감자튀김 하나에 120페소 한다. 엘 니도는 무엇이든 비싸구나. 여기선 관광객 모드로 살아야 하나 보다. 어니언 링과 감자튀김 그리고 시럽 넣은 맥주를 두 잔 시킨다. 건너편으론 오늘 만난 듯한 남녀가 맥주잔을 기울이며 호감 어린 눈으로 서로의 이야기를 듣는다. 낯선 여행지에서 만난 운명. 설레는 기분. 얼마나 좋을까. 한참을 쳐다보다가 니콜라스가 꺼낸 보트 이야기에 현실로 돌아온다.
“항구에서 보트 선장들이랑 직접 얘기해 보는 건 어떨까? 보트만 빌리는 거지. 작은 보트 정도는 혼자 운전할 수 있어.”
“만약 안 된다고 하면?”
“같이 가는 거지. 선장도 일이 생겨 좋을 거야. 더군다나 여행사를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 돈을 받는 거잖아. 선장은 복잡한 일 덜어 좋고, 여행사 수수료만큼 우리도 흥정해 볼 수 있고. 사실 프라이빗 투어가 돈으로 자유를 사는 거잖아. 그런데 돈의 차이가 너무 크다면... 투어 하는 동안 괜히 더 가성비를 따지게 될 거야. 기대보다 별로면 괜히 후회되고, 아깝고. 적은 돈이 아니니까 최대한 줄일 수 있는 데까진 줄여 봐야지.”
와, 이 사람의 모험심은 어디까지일까? 해결되지 않는 부분이 생기면 무엇이든 부딪혀 보는 니콜라스. 직접 이야기하고, 추천을 받고, 소개를 통해 어떻게라도 알아내고 가는 거다. 그렇게 얻은 정보들을 신뢰한다. 나 혼자라면 그 시간과 그 돈에 차라리 그룹 투어를 두 번 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그렇게 또 난 남들을 기다리면서 똑같은 경험을 얻고 아쉬워하겠지만 결국 가는 데 의의를 두고 합리화하겠지. 어쩔 수 없다. 사람 하루 이틀에 바뀌는 게 아니니까. 그러나 그의 말과 행동이 본질적으로 맞기 때문에 또 수긍한다.
다음 날 아침 숙소 앞 작은 나루에 가 본다. 입구를 못 찾아 호텔로 들어갔는데, 마침 나온 주인에게 보트를 빌리거나 선장을 만나는 방법을 물어본다. 갑자기 바뀌는 주인의 표정. 잠시만요, 하더니 자기가 아는 선장이 있다며 연결해 주겠다 한다. 전화를 안 받으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며. 우리는 번호를 알려 주고 떠난다. 우린 느꼈다. 표정이 바뀌던 그 순간, 이거 사람들이 원할 만한 일이구나. 이렇게라면 금방 구하겠구나.
엘 니도 항으로 나가 본다. 빈 보트들만 출렁거리고 선장은 없다. 비수기여서 그런지 관광객도 없다. 아마 있어도 다들 일찌감치 투어를 나간 모양이다. 스쿠버다이빙 샵과 근처 레스토랑에 가서도 물어보지만 다들 함구한다. 사실 정말로 작은 마을이기 때문에, 누가 어떤 배를 가지고 있고 누가 누구와 일하는지 모두가 알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조심하는 걸 테다. 괜히 알려줬다가 불똥이 튈지도 모르니까.
미궁에 빠질 무렵 니콜라스가 “아!” 하더니 성큼성큼 트라이시클로 걸어간다. 아니, 지난번에도 트라이시클 아저씨에게 덤터기 쓰일 뻔했는데, 또? 나는 돈에 관련된 일이라면 기사들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직업이 기사인 니콜라스는 직감적으로 기사들을 안다. 기가 막힌 타이밍에 레스토랑에서 전화가 와서 프라이빗 투어 6,000페소를 부른다. 와. 여행사를 안 꼈더니 순식간에 3,000페소가 깎인 거다. 첫 여행사로부터는 무려 반값. 대략적인 가격을 알았으니 흥정할 수 있겠다. 다시 연락 주겠다고 하고 끊는다.
트라이시클 아저씨가 자기 동생이 보트를 가지고 있단다. 섬과 암초가 많아 위험하기 때문에 선장 없이 출항하는 건 안 된다며, 대신 가고 싶은 장소와 시간을 충분히 상의하겠다고 한다. 현지인 입장에서 솔직하게 카들라오Cadlao 섬을 추천한다며 거긴 꼭 가라고 덧붙인다. 그러고선 얼마 생각하냐 묻는다. 우린 스노클링 장비까지 포함해서 5,000페소를 부른다. 딜. 바로 성사된다. 우린 아저씨의 브라더가 된 거다.
5,000페소(115,000원). 그렇게 우리는 두 시간 만에 7,000페소(161,000원)를 아꼈다.
흥정이 허무하게 끝난다는 건 더 적은 돈으로도 가능하단 뜻이니 아쉽기도 하지만, 5,000페소도 충분히 저렴하기에 후회하지 않기로 한다. 1인 150페소씩 받는 스노클링 장비도 포함이니 4,700페소로 내려간 셈. (와, 여행사 수수료가 이다지도 비싸단 말인가.) 아저씨는 자기 동생한테 큰일을 물어다 줘서 신난 거 같아 보인다. 우리도 여행사 말고 진짜 현지인에게 돈을 주게 되어 좋다. 1,000페소를 보증금으로 주고 내일 아침 8시에 항구에서 만나기로 한다.
사실 전혀 계획에 없던 큰 지출이다. 이 나라에서 5,000페소는 아저씨가 한껏 신났듯, 한 탕 번 것처럼 큰돈이다. 모터바이크를 10일 탈 수 있고, 여전히 밥을 40번 먹을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하고 싶은 마음과 주머니 사정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충분히 노력했기 때문에 그 지출을 홀가분하게 받아들인다. 가장 중요한 건 남들과 다르게 생각하기. 발상을 전환하고 스스로 해 보기. 그로 인해 깎인 어마어마한 가격을 보라.
아저씨가 추천해 준 기사 식당으로 간다. 필리핀에서 먹은 것 중에 제일 맛있어서 니콜라스가 이제부터 그 아저씨를 신뢰하자 한다. 내일 투어도 분명 좋을 거라며. 환경세를 미리 납부하러 시청에 간다. 400페소. 내일 아침 서두르지 말고 여유롭게 출발하고 싶다. 좋아. 시청 직원에게 수영을 하고 싶다 하니 북쪽의 낙판Nacpan 비치를 알려 준다.
기분 좋게 바다로 달린다. 텅 빈 도로에서 스쿠터 일행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경주한다. 진흙탕을 지나 온 신발과 옷들이 엉망진창이 되어도 즐겁다. 다 벗어 버리고 바다로 뛰어든다. 첨벙 첨벙. 필리핀 바다는 여전히 따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