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간이 영원히 멈추었으면

팔라완 섬의 숨은 천국, 시발탄

by 전윤혜


이대로 떠나기는 아쉽다. 핸들을 동으로 틀어 시발탄Sibaltan으로 간다. 렌트 샵 아저씨가 그렇게나 아름답다고 추천한 마을. 숙소 예약 애플리케이션으로 본, 바다 앞 풀숲 점점이 방갈로가 있는 휑한 모양새 역시 우리 마음에 든다. 모래 위 텐트는 340페소(8,000원), 평상 위 텐트는 640페소(15,000원), 나무 방갈로는 1,300페소(30,000원) 정도부터. 화장실과 샤워실도 공용이고, 소음과 벌레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곳임에도 1,300페소라면, 자연이 그만큼 좋기 때문이 아닐까 기대해 본다. [그동안 에어컨과 화장실 딸린 방을 800페소(18,500원) 정도에 구했다. 조식 포함.] 땀이 많고 극히 여름을 타기에 에어컨 없는 곳, 공용 샤워실, 개방형 구조는 극구 반대라는 입장을 고수하던 니콜라스도 결국 가격 앞에 무너진다. 평상 위 텐트 낙찰.


“하루뿐이야. 진짜 ‘섬’에 온 기분을 즐겨 보자.”


섬의 동서를 가로지르는 대신 북쪽 끝까지 해안을 따라 둥그렇게 돌아가기로 한다. 엘 니도 항구 서편의 오르막길을 꼬불꼬불 올라간다. 며칠 모터바이크를 탔다고 자신감이 붙었나 보다. 이젠 비포장 도로에서도 딴생각하며 갈 수 있고 경치를 보는 데도 여유가 생겼다. 좌로는 북쪽 바다가, 우로는 정글과 논밭들이 펼쳐진다. 좌우로 고개를 돌리느라 정신이 없다. 유유히 흐르는 낮은 구름들. 머리 뒤로는 붉은 태양이 쏟아진다.



팔라완 섬의 북쪽 끝에서. © Yoonhye Jeon


“해가 지고 있어. 아름답다.”


백미러를 보던 니콜라스가 말한다. 날 위해 백미러를 이리저리 맞춰보다 안 되겠다 싶은지 유턴하더니 모터바이크를 세운다. 연둣빛 가득히 꼬여 올라오는 야생 풀들 뒤로 아스라이 바다가 보인다. 풀들은 바다가 육지와 맞닿은 지점부터 무성하게 자라고, 가운데엔 야자수를 병풍 삼아 일군 논들이 있다. 한편은 벼가 무성하고 한편은 추수를 끝낸 이기작 삼작의 풍경들. 열대 섬의 농촌 풍경. 더위에 처진 이파리들이 팔랑팔랑 흔들린다. 멀리 삐삐지삐 새 우는 소리, 앞에선 찌르르 찌르르 풀벌레와 꼬끼오 닭 우는 소리. 산 밑에서 노래 부르는 10대들의 목소리. 우린 말없이 이곳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 Yoonhye Jeon


논과 숲을 지나 팔라완 동쪽으로 넘어간다. 수많은 섬들이 나타났다 사라지고 섬과 섬 사이엔 모래가 비칠 정도로 얕은 바다가 이어진다. 태평양과 만나는 서쪽 바다와 달리, 필리핀의 다른 섬과 마주한 동쪽 바다는 놀라우리만큼 잔잔하다. 느긋히 도로를 지나는 뚱뚱한 도마뱀들 덕에 우리도 속도를 줄인다. 여유롭고 평화로운 풍경들이 계속된다.


날이 어두워진다. 구글맵이 모터바이크로 들어가도 되나, 싶을 정도로 좁고 험한 길을 안내한다. 오솔길 앞에 주차하고 좁은 바윗길을 걸어가니 그제야 나타나는 숙소. 세상과 분리된 곳. 나무 바닥에 회갈색 허스키가 무료히 누워 있다. 백사장에 놓인 의자들, 그 뒤엔 레스토랑 겸 리셉션. 머리 위론 아주 낮은 조도의 알전구 몇 개. 흑단 같은 머리칼을 가진 주인장이 나와 밤에 태풍이 올 예정이라며 텐트 대신 방갈로를 내어 준다. 전기도 와이파이도 없는 곳. 주인장은 아무도 없는 숲에 게스트하우스를 지었다. 자가발전으로 최소한의 전기를 마련하고선 대나무로 벽과 창을 만들고 말린 야자잎으로 지붕을 엮어 방갈로를, 평평한 돌로 길과 계단을 만들었다. 이 곳을 아는 사람만이 올 수 있는 곳. 큰 마을로부터 두 시간, 여섯 시간을 들여 올 여유가 있는 사람만이 머물 수 있는 조용한 공간을 만들었다.


Tapik Beach Park Guesthouse. © Yoonhye Jeon


금세 해가 진다. 후레시를 들고 앞장선 주인장을 따라간다. 비가 왔는지 돌길이 질척하고 미끄럽다. 방문을 열자 침대를 감싼 하늘색 모기장과 1980년대 드라마에 나올 법한 백열등 스위치, 메추리알처럼 생긴 그것이 대롱 매달려 있다. 어두운 공용 샤워실에서 겨우 샤워를 하고 방바닥에 젖은 수건과 옷, 더러워진 양말을 펼쳐 놓는다. 축축한 냄새들. 배가 고픈데 주변에 식당이 없다. 게스트하우스에서 먹으려니 적어도 500페소가 들겠구나. 남은 돈을 세어본다. 1,170페소. 이 돈으로 모레 출국할 때까지 버텨야 하는데.... 전기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이곳에 카드 리더기가 있을 리도 만무하다. 허기진 니콜라스 손이 차갑게 떨린다. 내일 점심, 내일 저녁, 모레 점심, 모레 저녁. 네 끼. 모터바이크 기름값과 물을 빼면 한 끼에 100페소(2,300원) 남짓 쓸 수 있다. 이미 여러 차례의 현금 인출로 수수료만 어림잡아 3,000페소(70,000원)를 지출한 니콜라스의 의지는 강력하다. 절대 다음 인출은 없어. 그렇다면 버티는 수밖에. 저녁을 포기하고 눕는다. 절망적이구나.


“자, 니코. 배고프더라도 조금만 힘내자.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다른 곳에 정신을 파는 것밖에 없어. 돈과 밥 생각에서 벗어나자. 놀다가 잠드는 거야.”


가난한 집 엄마가 배고픈 아이를 달래듯, 신파극이 따로 없다. 음악을 틀고 트럼프 카드를 꺼낸다. 초등학교 때나 하던 원카드를 한다. 레드 핫 칠리 페퍼스Red Hot Chili Peppers의 <스노우Snow>(2006)를 흥얼거린다. 에-오.



Come to decide that the things that I tried

Were in my life just to get high on

When I sit alone

Come get a little known

But I need more than myself this time


내가 인생에서 원한 건

더 높이 올라가는 것이었지

내가 혼자 앉아 있을 때

찾아온 작은 깨달음

지금 난 내 자신에 대해 더 알 필요가 있어



스르르 잠이 들었다 빗소리에 깬다. 대나무 창살 사이로 비가 들이치고 휭 부는 바람 소리가 무섭다. 밖은 아직 어둡기도 하고 희기도 한 것이 해가 뜬 건지 아직 새벽인지 모르겠다. 설핏 다시 잠이 든다. 잠귀 밝은 니콜라스는 다시 잠들지 못해, 내가 일어날 때까지 조용히 기다린다.



풀벌레가 찌르찌르 울고 그 위로 싸아아- 파도 소리가 겹쳐진다. 날이 개었구나. 일어나 조식을 먹으러 나간다. 하늘엔 구름이 옅게 끼어 있고 물 먹은 풀들이 싱싱하다. 파스텔색 하늘. 허스키가 밥 먹는 우리 사이로 하얀 얼굴을 부빈다. 미안해, 네 건 없단다. 어제도, 오늘도 우리뿐인 숙소. 조용한 바다. 설탕을 잔뜩 탄 필리핀 커피를 마신다. 단 냄새에 투명한 개미가 잔을 타고 오른다. 개미는 니콜라스 손가락을 따라 앞다리를 들었다 놓았다 한다.


나무 아래 해먹에 눕는다. ‘휴양’, 곧 ‘맑은 바다’ ‘야자수’ ‘해먹’과 같은 당연한 단어들을, 여행 시작하고서 처음 느낀다. 그동안 우리 고생 많았구나. 찰랑, 고요한 물결 맑은 바다. 눈앞에서 새가 집을 짓는 것을 본다. 파르르 날개 치며 기다란 풀들을 물어오는 아빠 새. 살랑 흔들리는 나뭇잎들. 나는 생각한다. 이 시간이 영원히 멈추었으면.





아무도 없는 바다로 걸어 들어간다. 니콜라스는 쉬겠다며 해변가에 머무른다. 드넓은 바다, 파도 없는 얕은 바다에 오롯이 혼자 떠 있다. 자유형, 배영, 평영, 배운 지 오래라 자세가 이상하든 말든, 그 무엇도 의식 않고 허우적허우적 내가 하고픈 대로 헤엄친다. 얕으면 땅을 짚고, 깊으면 잠수한다. 이러다 저 끝 섬까지 닿을 수 있을 것만 같다. 이 넓은 바다가 내 것처럼, 자유, 자유를 느낀다.



지금껏 필리핀에서 바다는 주로 둘이 전세를 내거나, 많아도 손꼽을 수의 현지인들과 함께였다. 우리가 여행한 여름이 비수기(우기)인 탓도 있지만 주로 관광객들이 잘 가지 않을 곳을 갔기 때문이다. 관광객들이 잘 가지 않는다고 해서 현지인이 많이 찾는 것도 아니다. 평생을 석회암 섬에서 나고 자란 그들은 ‘팔라완의 바다’에 대한 별다른 감흥이 없을 터. 우리는 이 사각지대를 다닌 거다. 그렇게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연에 홀로 남겨졌다. 도시 속 벽과 벽 사이로 분리된 ‘홀로’가 아니라 오롯이 나만이, 세상의 뉴스와 친구들의 SNS 소식과 유튜브로부터 벗어난, 세상의 모든 ‘이해관계’와 내가 세상 어디에 있든 그걸 전달해 주는 ‘기계’로부터 자유로운 순간. 이렇게 세상과 떨어지면 공중에 흩어질 것을 우리는 매달려 아등바등 살고 있구나. 내게 필리핀은 자연의 거대함, 무서움과 자애로움 그리고 아름다움을, 그에 적응해 살면서 때론 거만한 사람들의 작은 모습들을 다시금 생각하게 했다.




수영하느라 정신이 팔린 동안 니콜라스는 혼자 땀을 뻘뻘 흘리며 짐을 싸고 있었다. 천국에서 현실로 돌아온다. 그는 어쩌면 아직도 허기져 아예 없는 걸지도, 어쩌면 앞으로 운전할 시간을 위해 비축하는 걸지도 모르는 그의 힘을 짐 싸는 데 다 써 버리곤 탈진해 있다. 그러곤 밥 한 끼 할 돈을 여기 게스트하우스의 콜라 한 잔과 맞바꾼다.


“같이 짐 싸길 조금은 바랐는데, 정말 혼자 수영만 할 줄은 ‘몰랐어’.”


“전혀, 당연히 너랑 같이 하려고 했지! 수영 좀 하다가 체크아웃 십오 분 전쯤 시작할 생각이었어.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아? 네가 혼자 이렇게 일찍 끝낼 줄은 나도 ‘몰랐어’.”


끼니에 민감한 그와 아닌 나. 시간에 민감한 그와 조금은 늦어도 괜찮은 나. 그도 나를 ‘모르고’ 나도 그를 ‘모른다’. 혼자였을 땐 그저 지나쳤을 작은 일들을 같이 하니 깨닫는다. 왜 이렇게 급한 거야, 하다 이내 아 내가 너무 여유로운 건가? 되짚는다. 알고 보니 니콜라스는 원래도 정연하게 짐을 싸지만, 백팩을 모터바이크에 실을 걸 생각해 무게 균형을 맞춘다고 오래 걸린 거였다. 미래를 보는 그와 그저 지금이 좋아 미래를 희생하는 나. 함께 여행을 하면 할수록 지금껏 살아온 내 삶의 방식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I need more than myself this time.


앞으로 여섯 시간을 달려야 한다. 어제 듣다 만 레드 핫 칠리 페퍼스를 튼다. 그가 배가 고프다면 나는 내게 남은 두 끼 중 한 끼를 기꺼이 그에게 양보할 생각이다. 이렇게 점점 우리는 우리를 더 알아갈 테다. We need more than ourselves this time, too.


우연일까, 고개를 드니 니콜라스 머리 위의 들보가 내게 말한다.


‘STOP LOOKING FOR YOUR SOULMATE(소울메이트 찾는 것을 멈춰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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