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궁도 결국 사람 사는 집

우붓 왕궁.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 발리의 건축 이야기

by 전윤혜


우붓은 해질 무렵이 가장 활기차다. 투어를 다녀온 사람들이 차에서 하나둘 내릴 무렵이자 일찍 도착한 사람들이 우붓 마켓에서 기념품 쇼핑을 마치거나 마사지를 받고 나올 무렵, 혹은 숙소에서 쉬던 사람들이 저녁을 먹으러 나오는 무렵. 아침부터 일정을 보내던 사람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발리의 저녁을 맞이하는 그 무렵, 우리는 우붓 메인 로드에 도착한다. 아침엔 자연을 실컷 봤으니 이젠 사람이 만든 걸 보자. 스쿠터로 정처 없이 떠돌다 멋진 건물을 보고 멈춘다. 얇은 기둥이 인 금각 지붕이 돌담따라 이어진다. 군데군데 선 석상이 섬세하다. 우붓 중심가 사거리 동북쪽, 작은 우붓만큼이나 작은 왕궁인 우붓 왕궁이다.




건축에 관심이 많은 나는 여행을 할 때 가장 먼저 ‘집’을 본다. 사람 사는 모습은 집의 형태에서 드러난다고 믿기 때문이다. 소비되는 의(衣)과 식(食)에 비해 보존되는 주(住)는 오래도록 남아 그들의 삶을 보여준다. 왕궁은 왕이 사는 ‘집’이고, 집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집’이다. 때문에 가장 전통적이면서도 좋은 영향을 끼치는 방식으로 지어졌을 것이다. 자연과 다신을 섬기는 발리의 전통을 미루어보아 풍수지리적 의미를 둘 것 같다. 마치 이성계가 경복궁을 북한산 아래 청계천 위에, 좌우로는 사직과 종묘를 두고서 각 문과 모든 처소에 의미를 부여했던 것처럼. 그렇게 보니 왜 우붓 왕궁이 이곳에 있는지, 입구는 왜 잘 안 보이는 서쪽에 있는지, 왜 건물 배치는 이렇게 한 건지, 왜 석상을 두었는지 새롭게 생각하게 된다. 왜 그럴까?


© Yoonhye Jeon


발리 건축엔 ‘신’과 연결되는 엄격한 건축 규칙이 있다. 발리의 집은 집이자 개별 신전인 셈으로, 생활을 넘어 신에게 경의를 표하고 악령을 쫓기 위한 영적인 곳이다. 우리가 하늘(天), 땅(地), 사람(人)을 삶의 중심으로 두었듯, 발리 사람들은 자연과 사람과 신 세 요소의 조화를 최우선으로 둔다. 가장 큰 건축적 목표이자 삶의 목표, 우주의 질서. 그래서 집을 지을 때 먼저 땅을 신, 인간, 악마의 공간으로 나눈 뒤 의미에 맞는 각각의 독립된 건물(침실, 거실, 주방 등)을 세운다. 각 건물을 사람의 몸과 같은 유기체라 여기며, 건물마다 공간을 충분히 떨어뜨려 자연과 통하도록 둔다. 이것만 알아도 대략 발리의 집 구조가 보이기 시작한다.


신=머리=산

인간=몸=평원

악마=다리=바다


우붓 왕궁은 우붓 중심 사거리에서 동북쪽에 있다. 왜? 신들의 거처인 아궁산이 있는 ‘동북쪽’을 가장 길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왜 건물은 높은 돌담으로 둘러쳐 있을까? 벽은 외부의 악마를 막는 역할을 한다. 안으로는 아무리 공간이 트여 있어도 바깥과는 확실하게 구분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벽 바깥으론 일정한 간격으로 수호 동상을 두거나 부조를 새긴다. 왜 입구는 서쪽으로 나 있을까? 입구는 일몰 쪽으로. 신의 영역인 산 쪽으로 두지 않는 것이 규칙이다. 왜 들어가자마자 양 옆으로 건물이 나올까? 부엌이나 닭장, 화장실 등 폐기물과 관련된 곳은 항상 산에서 가장 먼 곳, 즉 일몰 쪽 입구나 집 밖에 놓이니 아마 이곳이 그 역할을 했을 것이다.


입구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중문(파두 락사Padu Rakss라 불리는 탑)을 지나야 비로소 왕이 거처하는 진짜 ‘집’이 나온다. 왜 들어가자마자 정원이 나올까? 발리의 집에는 필수적으로 자연과 교감할 수 있도록 남서쪽에 정원을 만들어야 한다. 싱그러운 나무 정원 사이에 띄엄띄엄 배치된 오픈 파빌리온(베란다 파빌리온. 우리로 치면 정자 같은 건물들)은 손님 접대용 공간이다. 벤싱가bencingah라 불리는 이 공간은 우붓 왕궁에선 공공 행사에 쓰이기도 왕이 지역 사정을 살펴보는 장소이기도 했다. 파빌리온의 크기와 비율, 기둥 숫자와 위치는 카스트에 따라 결정된다. 규모가 크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왕의 처소가 이 정도니, 계급이 낮은 일반 주택은 훨씬 작을 것이다. 큰 집의 정원 안에는 주로 사회적 후원을 상징하는 반얀트리(뱅갈 고무나무)를 심는데, 우붓 왕궁 역시 마찬가지다.


실제로 왕족이 사는 곳이라 우리는 정원과 일부 오픈 파빌리온만을 관람할 수 있다. 때문에 일일이 흔적을 좇지는 못했지만, 아궁산을 향하는 머리 부분엔 가족 사원이 있고, 팔로 여겨지는 침실이 근처에 있을 것이라 짐작해 본다. 모습은 전혀 달라도, 하늘과 땅에 예우하는 우리나라 전통 건축과 비슷한 개념에 정감이 간다.


중문 역할을 하는 탑 파두 락사. © Yoonhye Jeon


해질 무렵 방문한 것이 행운일까. 조용한 왕궁 안. 입구에 들어서니 금박 장식된 중문(파두 락사)에 서녘 해가 반사되어 신비롭다. 중문에는 힌두식 석상 드와라팔라Dwarapala가 서 있다. 산스크리트어로 ‘문 경비’란 뜻으로 우리나라의 금강역사나 장승같은 개념이다. 발리의 드와라팔라는 뾰족한 인도의 그것과 다르게 둥그렇고 익살맞은 모습이다. 해태 같기도 하고. 옆의 오픈 파빌리온엔 저녁에 열릴 전통 무용 공연을 위한 타악기 가믈란들이 놓여 있다. 발리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둥그렇고 묘한 소리를 내는 악기들. 서너 개의 오픈 파빌리온 사이, 왕궁의 것이라곤 생각지도 못할 좁은 길을 따라간다. 왕궁의 가장 동쪽 안까지 들어가(가장 안쪽이라지만 1분 만에 갈 수 있다.) 서쪽을 바라본다. 수호 석상과 나무들, 오픈된 파빌리온 사이로 주홍빛 해가 쏟아진다. 담 하나를 사이에 두었을 뿐인데 시끄러운 밖과 달리 안은 고적하다. 속세의 악령들을 이런 식으로 차단했겠구나, 싶다.


수호 석상들. 끝내 이름과 정체를 알아내지 못했다. © Yoonhye Jeon


여전히 왕족이 살고 있는 곳임에도 귀족적 뽐냄 없이 소박하고 입장료도 없다. 엄격한 종교적 건축 방식을 따랐음에도 사원처럼 경직된 느낌이 없고, 발랄한 색채들이 사람 냄새를 풍긴다. 여기도 사람 사는 집이네. 마음에 든다. 반얀트리를 둥그렇게 둘러싼 벤치에 앉는다. 드와라팔라 석상과 혀를 길게 뺀 여마왕 랑다Rangda 조각, 덩굴 식물과 원숭이를 새긴 부조들이 엉켜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고 건축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니콜라스는 원숭이와 신들이 함께 새겨진 모습이 궁금하다. “힌두교에선 원숭이 신도 믿거든.” 원숭이 장군 하누만Hanuman 이야기를 해 준다. 흥미로운 다신의 세계. 해가 지자 중문을 주변으로 레드 카펫을 깐다. 전통 공연이 시작된다며. “볼까?” 기다리다가 입장료가 있단 말에 고민하다 길을 나선다. “밥 먹으러 가자.”


왕궁 곳곳의 화려한 부조. 머리카락마냥 자라는 풀들. © Yoonhye Jeon


자발적 관심이 있지 않는 한, 발리의 전통 건축에 대해서 알게 되기는 굉장히 어렵다. 자료나 리플릿이 없고, 공식적인 국가 연구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사실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다. 우리가 가이드와 다니지 않아서일까? 인터넷 정보는 대개 우붓의 마지막 왕Tjokorde Gede Raka Sukawati(1899~1967)이 살았던 곳이고, 지금도 왕족이 살고 있으며, 규모가 작고 입지가 좋아 잠시 들러 관광하기 좋으며, 저녁엔 발리 전통 무용을 볼 수 있다, 정도로 재생산되고 있다. 우리는 우리 친구 위키 백과를 뒤져 더듬더듬 이해해 간다. 영문 논문 한두 건, 정말 드물게 보이는 건축 사무소의 연구 일부는 부실한 정보의 뒷받침이 된다. 발리의 많은 장소들이 이렇게 소비되고 있다. ‘발리만의 느낌’ ‘발리만의 매력’은 무엇인가? 피상적인 휴양지의 느낌일까.


© Yoonhye Jeon, Nicolas Riou


우붓 마켓을 가로질러 피상적인 휴양의 온상 고급 여행자 레스토랑에 들어선다. 소울풀한 여가수 목소리에 홀린 듯이. 그래. 이것도 발리의 한 모습. 창문 없이 오픈된 레스토랑엔 촛불이 일렁이고 바깥으론 스쿠터 경적이 빵빵댄다. 메뉴판을 보던 니콜라스가 매일 자기가 쐈지만 오늘은 자기가 특별히 ‘카드로’ 쏘겠다고 한다. 매번 싼 음식만 찾을 순 없지 않냐며. 우붓 왕궁에서 전통 공연 볼 돈 4배나 더 내고 먹고 마신다. 길에선 지나가던 연인 한 쌍이 음악에 맞춰 춤을 춘다. 우리도 들썩들썩. 왕궁에선 세상 진지하던 우리는 음악과 맥주에 금세 즐거워진다. 뭘 더 아는 척하겠어, 마시기나 마시자. 우리도 그냥 사람이다. 왕도 사람이고 나도 사람이고 니콜라스도 사람이고 우리 모두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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