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리 바투르 산 1 어둠 속, 가이드 연합과 벌인 사투
새벽 3시 반, 어둠을 가르며 바투르Batur 산으로 향한다. 드디어 우리도 화산섬 발리에서 화산 트레킹을 하는구나. 예상 트레킹 시간은 2시간, 챙긴 것은 전날 좋아하는 식당에서 포장해 온 과일 주스 1리터와 위에 걸칠 긴 옷. 프랑스인들이 참고한다는 웹사이트 Guide de routard(배낭여행자를 위한 가이드)의 ‘운동화, 긴 옷, 손전등, 물과 간식’을 챙기면 좋다는 조언을 충실히 따른다.
구글맵에 Batur로 검색해 제일 먼저 나오는 ‘트레킹 스타팅 포인트’를 찍는다. 멋진 일출을 기대하며 밀려오는 잠을 떨친다. 북쪽으로 뻗은 도로에는 우리뿐. 날이 춥고 별이 높다. 천천히 고도가 높아진다. 새벽바람을 가르는 니콜라스의 얼굴이 점점 차가워진다.
한 시간을 달려 산길로 접어든 우리. 스쿠터 불빛에만 의지하기에는 너무도 어둡다. 일출로 유명한 산이라는데, 이 시간에 왜 우리뿐이지? 불안하다. 도로는 점점 구불구불 경사가 급해진다. 꼭대기에 다다르니 멀리 흰 불빛들이 일렬로 반짝반짝한다. 등산객이다. 저기로 가면 되는구나. 바투르 산은 분화구 안에 또 다른 분화구가 있는 겹화산이다. 땅에서 올라왔으니(바깥 산) 다시 내려갔다가 올라가야(안쪽 산) 하는데, 어두운 도로 문 닫은 상가 사이에서 도통 내려가는 길을 찾을 수가 없다. 스쿠터 한 대가 빙빙 우리처럼 헤맨다. 길을 아냐고 물으니 자기들도 어깨를 으쓱하고선 다른 데로 가 버린다. 구글이 10분 느려질 거라 말하는 다른 길을 시도한다. 덜컥 덜컥 비포장으로 바뀌고 점점 사람의 흔적이 사라진다. 이건 아니야. 다시 꼭대기로 돌아간다. 그제야 식당 입구 뒤에 내리막길이 보인다.
지금 시간 4시 45분. 일출은 6시 반이니 6시까지 올라가면 돼. 20분만 하면 더 가면 스타팅 포인트니까, 5시 15분쯤 거기 도착한다 치고, 뛰어올라 일출을 보자. 빠듯하지만 가능한 시간이다. 조급해하지 않기로 한다. 산길을 오른 만큼 다시 내려간다.
다 내려올 즈음 검은 차가 우릴 따라오더니 스쿠터를 세운다. 남자는 어디 가는 길이냐며, 길을 잃었냐며, 이 트레킹은 위험해서 혼자는 못하는 트레킹이라고 가이드를 대동해야 한단다. 낌새가 좋지 않아 빨리 갔으면 좋겠는데 친절한 니콜라스는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묻고선, 대답 대신 가이드 영업하는 남자의 말을 다 들어주고 있다. (나중에 물어보니 현지인의 팁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나... 퓨어 니코...) 그런데 점점 남자가 등산도 하고, 온천도 가고, 어디도 구경하고 하면서 가격을 부르기 시작한다. 120달러, 140달러. 우리끼리 올라가겠다고 정중하게 거절하고 길을 재촉한다. 그런데 이 남자, 계속해서 따라온다. 미치겠네. 길을 찾느라 스쿠터를 세운 사이 옆으로 온 남자는 ‘가이드 없이는 산에 절대 못 올라간다’며 ‘지금 여기서 결제하지 않으면 자기가 온 가이드에게 전화해서 너희 인상착의를 다 알릴 것’이라 한다. 지금부터 가는 길마다 가이드를 마주칠 거라며. 정중히 거절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시동 걸고 외친다.
“우리 힘으로 할게요, 좀!” 했더니 돌아온 답은
“우리는 너네 같은 관광객 필요 없어! 너희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배고픈 거야, 너희 나라로 꺼져 버려!”
누가 우리고 누가 너희인지 모르겠다. 우리라는 건, 발리 사람일까? 너희는 누구일까? 여행사 안 끼고 온 사람들? 그럼 모든 사람이 가이드를 대동하고 산에 올라야 한단 말인가. 국립공원도 아닌 그냥 산에. 우리나라에도, 하물며 히말라야에도 그런 법칙은 없다. 가이드는 도움이지 강제 사항이 아니다. 여행사(가이드) = 고객 = 돈이라 인식하는 행태에 화내고 떠난다.
“우리도 당신 보러 발리 온 줄 알아요? 오케이 우리 꺼질 테니 당신도 지옥으로 꺼져 버려!”
남자가 진짜 어디론가 전화를 건다. 태연한 척 화는 냈지만 불안하다. 가다가 또 튀어나오면 어떡하지? 시간을 많이 뺏겼다. 이대로라면 일출을 못 볼지도 몰라. 산으로 오르는 불빛 행렬은 점점 짧아진다. 다들 도착하는 모양이다. 스쿠터 속도를 올리고 서두른다. 뒤로 한 스쿠터가 따라붙는다. 윤혜,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
못 본 척 길을 가는데 막다른 골목에 도착한다. 아뿔싸, 구글맵에 찍은 ‘트레킹 스타팅 포인트’는 (그 의도가 분명하게 이름 지은) 투어 에이전시였다. 이름만 보고 생각 없이 찍은 내가 멍청이다. 하 미치겠네 이젠 어디로 가야 하는 거지? 라이트 방향을 보니 주차장 쪽으로 가야 할 것 같다. “미안해 니코.” 뒤따라온 스쿠터에서 아저씨가 내린다.
“어디 가세요.”
무섭다. 아저씨와 석탑과 우리뿐인 골목. 나가려면 아저씨를 지나야 한다. 우리는 일출을 보러 간다고 대답한다.
“일출 볼 때 가이드랑 같이 가야 되는 거 아시죠?” 묻는다. 자기가 가이드라며,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80달러 내면 입산할 수 있다고 한다.
“여기 국립공원이에요? 왜 정부도 아니고 가이드가 돈을 걷죠?”
정책이 그렇다며 무조건 가이드가 붙어야 한단다. 너무 위험하다며. 동남아시아에서 ‘무조건’이라는 말, ‘예외 없다’는 말은 믿을 수 없다. 그 뒤로 누군가, 혹은 어떠한 이익 집단이 강력하게 컨트롤하는 거다. 경찰도 눈감는 대가로 얼마를 챙길 테고.
“트레킹이 위험해서 제재하는 거면 왜 지금 같은 더 위험한 상황을 만들면서까지 돈을 받으려고 하는 거죠?”
아저씨에게 이렇게까지 하는 목적이 뭐냐 묻는다. 좀 다른 그럴싸한 이유라도 들면 모를까, 앵무새처럼 위험하다며, 법이 그렇다는 말을 반복하는 아저씨. 그렇다. 그들도 ‘위험’ 외엔 대답할 거리가 없는 거다. 필요 없다고 거절하고 갈 채비를 한다. 아저씨 태도가 변한다. 우리를 가로막더니 지금 갈 수 있을 거 같냐고, 가이드 대동하기 전엔 출발 못할 거라 막는다. 아니 제발 좀.
“비켜요!” 소리를 빽 지르고 만다. 분위기는 점점 험악해진다. 아저씨가 갑자기 우리 스쿠터 사진을 찍는다.
“이 스쿠터 어디서 빌린 지 조회하면 다 나와. 내가 너희 누군지 조사해서 신고할 거야. 법 어기는 몰염치한 외국인들.”
진심으로, 이런 거에 넘어가면 안 된다. 전형적인 협박 멘트. 전산 하나 안 된 나라, 영수증도 손으로 쓰는 나라에서 어디를 조회해서 뭐가 얼마나 나온단 말인가. 설령 있다 하더라도 아저씨는 무슨 권리로 전산망을 조회할 수 있는지. 꾸따 아줌마가 보스 덴파사르 산다고 겁주는 거랑 똑같은 원리다. 나는 왜 사진 맘대로 찍냐고, 나도 아저씨 사진 찍을 거라고, 아저씨 스쿠터도 다 찍어서 발리 관광청에 협박죄로 다 신고해 버릴 거라고 엄포를 놓는다. 아저씨는 움찔하더니 태연한 척 자기도 니콜라스 사진을 찍는다. 플래시가 찰칵 터지고 니콜라스는 한다. 김치...
“헤이, 만약 우리가 올라가는 데 문제 있으면 거기서 해결할 거예요. 지금 아저씨한테가 아니라 주차장에서 직원이랑 해결할 거라고! 렛 미 고! 플리즈 렛, 미, 고!(Let me go, 나 좀 가게 해 줘요!)”
도저히 비켜줄 것 같지 않아 그냥 스쿠터 사이로 빠져나간다. 아저씨가 뒤에서 소리친다.
“너희 주차장으로 간다고 했지. 내가 이따 너희 스쿠터 불지를 거야!”
왓? 머더퍼커 고 퍽 유어셀프가 저절로 나온다. 와우. 머더퍼커라니. 내가 이런 욕도 할 줄 알았던가. 스스로 놀란다. 사람 오래 살고 볼 일이군. 근데 이 사람들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단순히 돈 때문에 이렇게 한밤중에 협박하는 건 아닐 것 같은데. 왜. 왜. 온 길을 다시 돌아간다. 아까 첫 번째 남자가 우릴 혼란시킨 그곳이 주차장으로 가는 갈림길이었다.
5시 30분. 조금 더 들어가 드디어 ‘바투르 산’이 쓰인 입구에 도착한다. 트레킹이 시작되는 길이 아니라, 식당이 있는 공터. 설악산 국립공원 입구쯤 될까. 다 와 간다. 조금만 더 힘내자.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바투르 산 에피소드는 길어서 두 편으로 나누었습니다. 2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