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여행자의 푸껫

두 시간 만에 갈 곳을 하루 종일 가고 있어도

by 전윤혜


밤이 떠들썩하다. 야시장을 안 들릴 수 없다. 여긴 태국이잖아. 푸껫의 시원한 생과일주스에 맛들려 버린 니콜라스는 도착하자마자 보이는 가게로 가 또 리치 주스를 시킨다. 나 어릴 적 피자헛 샐러드바에서 실컷 먹을 수 있었던 그 리치는 프랑스에서는 1kg에 10유로나 주고 먹어야 하는, 그것도 크리스마스 시즌에만 맛볼 수 있는 고급 과일이었던 것이다. 신선한 리치와 차가운 얼음을 잔뜩 갈아주는 그 시원하고도 달짝지근한 맛. 그에겐 천국이나 다름없겠지.


야시장에서의 시간은 여행자 거리와는 또 다른 기분을 선사한다. 태국엔 마을마다 야시장은 하나쯤 있는데, 포장마차의 큰 버전이랄까. 더운 밤 무언가 굽는 연기가 자욱한 시장에서 출출한 아저씨가 누들을 먹기도 하고 회식차 들러 다들 맥주 한 잔 걸치는 곳이기도 하고. 푸껫의 밝디 밝은 야시장은 특히나 관광객들에게 인기 만점이다. 음식과 술, 기념품 쇼핑 한큐에 해결 가능하고 음식은 정찰제여서 흥정에 지칠 필요도 없다. 열대 나라의 생기를 꿈꾸며 날아온 그들에게 걸맞은 해산물과 열대 과일들이 늘어선 가판대, 한쪽에는 금방 튀겨주는 감자튀김, 오징어 튀김, 생선 튀김과 타르타르소스, 게살 튀김, 각종 튀김이 죽 늘어서 있고 한쪽엔 해산물, 다른 줄엔 주꾸미와 새우, 닭, 소시지 꼬치류... 허기진 우리는 생선 튀김과 게살 튀김, 감자튀김(약 6,000원)을 시켜 앉는다.


푸껫에 온 뒤로 마음이 편하다. 꼭 가보아야 할 것만 같은 관광지가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람들은 그냥 리조트에 푹 쉬러 왔다. 성수기라 붐볐던 발리보다 확실히 비수기(우기)인 이곳. 인구밀도가 덜한 것이 확실히 여행을 덜 피곤하게 만든다. 어디든 30분 안에 도착하는 조그만 섬은 우리와 같은 게으르고 즉흥적인 여행객에게 딱 좋다.


코코넛 껍질에 아이스크림을 담고 초콜릿 캐러멜 시럽과 땅콩을 잔뜩 뿌린 코코넛 아이스크림을 들고 야시장을 배회한다. 태국을 다녀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만한 기념품들인 무에타이용 반바지, 태국 맥주 창Chang이 그려진 슬리브리스, 코끼리 바지, 여러 향과 꽃이 그려진 사기 향 받침들이 이어진다. 니콜라스가 복싱하는 동생에게 선물하고 싶다고 집어 든 무에타이 바지는 350밧(약 14,000원)을 불러 고민하다 내려놓는다. 그러다 광장에서 닥터 피쉬를 마주한 니콜라스의 눈이 둥그레진다.


“윤혜! 이것 봐, 물고기가 사람을 공격하고 있어! 너무 웃겨. 이 물고기 뭐야?”


“닥터 피쉬라고, 처음 보는 거야? 우리나라에선 10년 전쯤에 한참 유행했어. 찜질방이고 마사지 샵이고 이렇게 들여놨었다? 이 물고기가 죽은 각질을 먹고 산대.”


“와, 우리가 물고기들에게 먹이를 주는 거네? 발도 깨끗해지고! 서로 윈윈 하는 거잖아?”


15분에 100밧. 니콜라스는 “나 이거 해도 돼?” 조심스레 물어본다. 방금 전만 해도 바지를 들었다 놓았다 고민하던 그의 심각한 눈빛이 이젠 초롱초롱 빛난다. 처음엔 엄마처럼 돈이나 내어주고 기다리려 했던 나는 같이 하자는 그의 표정에 마지못해 올라선다. 발을 씻고 수조에 담그자마자 물고기들이 무섭게 달려든다. 한국에서처럼 간지러울 줄로만 알았는데 빨판의 흡입력이 대단하다. 느낌이 삐죽삐죽한 게 영 징그럽다. 옆의 아라비안 커플은 이내 포기한다. 수조 속 물고기들은 한국에서 보던 아기 닥터 피쉬가 아니라 정말 손가락만큼 큰 아이들이다. 나도 포기하고 싶지만 낸 돈이 아까워 참는다. 포기할 거였으면 무에타이 바지를 샀지! 처음 겪는 감촉이 신기하기도 하고, 간지럽기도 한, 그러면서도 물고기를 관찰하느라 바쁜 니콜라스는 뭔가 모를 희열을 느낀다.


“이제 진짜 관광객이 된 느낌이야. 때론 남들처럼 여행하는 것도 좋은 걸?”


ⓒ Yoonhye Jeon

아무 계획 없이 태국으로 왔다. 우리는 다음 행선지를 카오락으로 정한다. 푸껫 북쪽으로 작은 휴양 마을이 있다는데 보다 한적하고 여유롭대서. 이미 발리와 푸껫을 연이어 오느라 관광 기분은 실컷 냈으니까, 이젠 조용한 곳으로 가 볼까? “와이 낫?(Why not, 왜 안 되겠어?)” 좋아. 마음 가는 대로 떠나자.


푸껫의 마지막 날 아침이 밝는다. 스쿠터 바닥에 내 가방을 놓고 나는 니콜라스의 배낭을 멘다. 보조가방을 안장 아래 짐칸에 싣는다. 옆집 의류 도매 상가 앞에 행거가 덜렁 나와 있어 보니 ‘50 batt’ 쓰여 있다. 2,000원? 지나칠 수 없어 둘러보다 기하학 문양의 점프슈트를 집어 든다. 안에 들어간 니콜라스는 새파란 통바지를 들고 나온다. 선물이라며. “나는 자주색이 더 좋은데...” 감사한 줄 모르고 아기처럼 입을 삐죽 댔더니 자주색까지 두 개를 사 준다. 350밧(14,000원). “고마워 니코... 이 돈이면 너 무에타이 바지도 살 수 있는데...” 그가 해맑게 웃으며 50밧짜리 옷 사 주는 남자 친구는 되고 싶지 않다며, 그저 내가 웃는 모습을 보고 싶었을 뿐이란다. 과일주스를 먹으러 어제 찾았던 시장을 다시 가 본다. 야시장답게 낮엔 텅 비어 있다. 다행히 입구의 과일주스 가게는 열려 있다. 과일 종류를 섞을수록 가격이 올라가는 주스. 니콜라스는 리치와 포도를 섞고, 나는 레몬과 라임을 섞는다. 살얼음 섞인 시원함이 덥고 습한 푸껫의 기분을 날린다. 스쿠터 뒤로 자주색 바짓단이 펄럭인다. 다시 구시가로 향한다.


ⓒ Yoonhye Jeon

스쿠터 렌털 샵은 구시가 중심에 있고, 시외버스 터미널Phuket Bus Terminal 2은 북쪽으로 도보 한 시간 정도 떨어져 있다. 썽태우를 타볼까 했지만 체력도 든든하니 걸어가 보자, 한다. 처음에는 신난다. 스쿠터 없이 오랜만에 걷는 여행. 구시가의 촌스런 마네킹들도 다시 만나고, 자그마한 라운드어바웃(로터리)과 가지런히 잔디 심긴 중앙분리대를 구경한다. 그러나 이내 휑해지는 거리. 구시가 가운데 자리했던 구 터미널과 달리 새로 지은 2 터미널은 외곽 중에서도 외곽, 자동차 도로와 인도뿐인 곳에 지어졌다. 구경할 곳도, 무언가 마실 곳도 없이 여름 땡볕을 기약 없이 걷다 지치다를 반복한다. 오늘따라 검은 티셔츠를 입은 니콜라스는 온 푸껫 햇빛을 몸으로 흡수하고 있다. 가뜩이나 펄럭이는 나의 새 바지는 길기도 길다. 배낭 무게에 점점 굽어지는 나를 본 니콜라스는 내 가방을 뺏어 앞에 둘러멘다. “걱정 마. 하나도 안 무거워. 앞뒤로 균형도 잡히고 좋네.”


ⓒ Yoonhye Jeon

이까지 걸은 마당에 포기하고 택시를 타고 싶지도 않다는 이상한 오기로 40분쯤 걸었을까, 땀이 비 오듯 하는데 멀리 Big C 마트가 보인다. 주저 없이 들어가 배낭을 팽개치고 에어컨 바람을 쐰다. 아아, 살 것 같아. 테스코와 함께 태국의 양대 마트 산맥을 이루는 빅씨. 코스트코 같은 거대한 규모에 손님은 없는 기이한 풍경에 압도된다. 식초와 간장, 기름의 향연. 태어나서 가장 많은 간장을 본 니콜라스의 표정은 내가 프랑스에서 와인 코너의 거대함을 마주했던 표정과 비슷하다. 버스에서 먹을 주전부리와 더위 먹은 우리에게 간절한 맥주 두 병을 산다. 어디라도 앉아 바로 마실 요량으로. 그러나 바깥은 그 흔한 그늘막 하나 없고, 마트 안에도 벤치 하나 없다. 지친 몸을 이끌고 마트 안에 있는 KFC로 가 이러저러한 사정을 말한다. “목이 너무 말라서 그래요. 아무 데도 앉을 데가 없네요. 우리 최대한 금방 마시고 나갈 테니까 테이블을 잠시 빌려줄 수 있을까요?” 딱하다는 표정의 점원이 알았다며, 배려해준다. 그녀의 호의에 누가 되지 않게 가장 구석자리로 가 앉는다. 보조 배터리로 뽁, 소리 죽여 병을 딴다. 병째로 벌컥벌컥 맥주를 들이킨다. 햐, 살 것 같다. 오락실 지나치기가 아까워 10밧씩 넣고 게임까지 하고 나니 그제야 다시 출발할 힘이 난다.


ⓒ Yoonhye Jeon

20여 분을 더 걸어 터미널에 도착한다. 새 터미널답게 나름 쾌적하다. 검정 섀시와 대리석 마감, 창구에 흰 바탕 보라색 파란색 글씨 시트지가 붙은 모습이 꼭 고등학교 때 자주 다니던 춘천 터미널 같아 정겹다. 12시간 걸려 방콕 가는 2층짜리 럭셔리 버스, 남부의 또 다른 작은 휴양 마을 끄라비로 가는 미니밴, 크고 작은 버스가 분주히 오고 간다. 지금은 오후 4시. 4시 10분 차는 매진됐고 다음 차는 5시 40분에 있다. 우리 12시 30분에 출발했지? 썽태우를 탔으면 30밧에 시원한 바람 쐬며 와서 버스까지 타고 벌써 카오락 도착했을 시간이겠다, 사서 고생한 우리는 헛웃음이 난다. 더우니 맥주 마시고, 앉아서 쉬고, 오락하고, 돈은 돈대로 더 쓰고 말았지.


“니코, 우리 오늘 하루 종일 뭐 한 거야?”


“카오락 가고 있잖아.”


“두 시간 만에 갈 수 있는 곳이잖아?”


“아무렴 어때. 즐거웠잖아?”


두 시간 걸려 갈 수 있는 곳을 하루 종일 가고 있지만, 아무렴 어때. 버스 기다릴 동안 뭘 할까, 휴대폰에 저장된 시리즈 <기묘한 이야기>가 떠오른다. 발리에서 ‘혹시 몰라’ 안 보고 남겨 놓은 마지막 에피소드를 재생한다. 우린 작은 화면에 붙어 실종된 꼬마 윌이 돌아오는 엔딩을 본다. 선선한 바람이 땀을 씻는다. 버스가 천천히 들어온다. 110밧(약 4,400원) 짜리 버스. 보통 사람들은 공항에서 1,000~1,500밧(약 40,000~60,000원) 들여 택시로 카오락을 간다. 우리는 시간은 많은데 돈은 없는 가난한 여행자니까, 생수까지 제공되는 버스도 충분히 호화롭다.


검표원 아주머니가 표를 확인하고 사람을 센다. 밀려드는 승객에 아주머니가 살포시 니콜라스 허벅지를 빌려 앉는다. 당당한 아주머니의 자태에 당황한 니콜라스. 아무렴, 어디라도 앉고 싶으시겠지. 우리는 서로 킬킬 웃고야 만다. 길목마다 서는 버스엔 현지인들이 오르내린다. 창밖으로 해가 진다. 버스는 이내 혼잡한 시내를 지나 북으로, 북으로 올라간다. 푸껫의 도로는 여전히 깨끗하게 잘 닦여 있고 우리는 타오르는 해를 보며 뽀시락 뽀시락, 즐겁게 과자를 까먹는다. 그러고 보니 우리의 첫 버스 여행이었다.


ⓒ Yoonhye J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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