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수기여서 감사합니다

태국 카오락 화이트 샌드 비치, 코코넛 비치

by 전윤혜


버스 안은 이내 어두워졌다. 한참을 흔들리다 “카오락~” 외치는 소리에 우리는 손을 들었다. 주섬주섬 선반의 배낭을 내리고 사람들을 헤쳐 내렸다. 커다란 버스는 부릉, 하며 떠났다. 시골길에 뚝 떨어진 느낌이었다. 좁은 4차선 도로는 마을을 둘로 갈랐다. 건물들은 조촐했고 멀리 레스토랑 불빛들이 반짝였다. 숙소 이름이 적힌 붉은 간판을 따라 언덕을 올랐다. ‘Les Fleurs’ 꽃들. 프랑스어로 이름을 지은 덴 의미가 있을 것만 같았다.


리셉션에 사람이 없어 종을 울렸다. 하얀 타일 바닥에 고양이가 누워 쉬고 있었다. 조금 뒤 나온 젊은 아가씨는 막 샤워를 끝낸 듯 머리가 젖어 있었다. 영어는 잘 못 했지만 친절했다. 어떻게 9시도 안 된 시간에 리셉션을 비울 수 있었을까? 며칠이 지나고서야 알았다. 카오락엔 손님이 없었다.

카오 락Khao Lak. 태국 말로 '카오'가 산이니, 락 산이란 뜻이다. ⓒ Yoonhye Jeon

아침이 밝았다. 식탁 유리병에 꽂힌 이름 모를 풀꽃과 조개껍질을 엮은 모빌이 바람에 엇갈리며 흔들렸다. 세 개의 소박한 나무 테이블. 일곱 여가지 되는 조식 메뉴도 간단한 토스트와 계란 프라이로 통일됐다. 차에서 한 여자가 내렸다. 환영한다며, 여기 주인 되는 웬디라고. 목소리에서 강한 생활력이 묻어 나왔다. 우리가 어디서 만났는지, 어떻게 여행하고 있는지 궁금해했다. 알고 보니 그녀의 남자 친구는 벨기에 인이었다. 태국에 휴양 온 벤자민을 만나 사랑에 빠졌고, 함께 벨기에로 여행을 갔다가 돌아와, 여기서 살기로 했다고. 뭔가 모를 친밀감이 느껴졌다. 체크인도, 체크아웃도 없고 조식 먹는 손님도 우리뿐이니 수다 떨 시간은 넘쳤다. 갑자기 한 손님이 거미가 나왔다며 방에서 뛰쳐나왔다. 소리를 들은 키 큰 서양 남자가 리셉션 방에서 성큼, 걸어 나왔다. 벤자민이구나. 우리는 그제야 다른 손님도, 벤자민도 여기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저 손님은 오늘 떠나요. 그럼 여러분들만 여기 있는 거예요.”


하루만 머물다 가느냐는 웬디의 물음에 우리는 특별한 계획은 없다며, 마음에 들면 카오락에 며칠이고 머무를 거라고 했다. 내일 아침에 알려줄게요, 하고는 식사를 마저 했다. 커피에 넣을 우유를 부탁했는데 마침 우유가 떨어졌다. 그녀는 스쿠터를 타고 편의점에 가 우유를 사 왔다. 비수기에는 냉장고를 필요할 때만 채운다고 했다. 7월 중순, 비수기이자 우기의 한중간이었지만 운이 좋게도 비 오지 않는 날들이 이어졌다. 벤자민은 계획 없는 우리에게 그 자리에서 또박또박 리스트를 적어 주었다. 비치 네 곳과 두 개의 폭포, 국립공원, 바 하나, 식당 두 곳.


“알잖아요. 우리한테 필요한 것. 여기요. 타이 식당 중에는 이곳이 가장 입에 맞았고, 피노키오는 프로슈토(이탈리아식 햄) 피자가 맛있어요. 가격은 조금 되지만 어쩔 수 없죠...”


그는 무심하게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말했다. 동남아를 한 달 여행한 니콜라스도 힘들게 버텨가고 있는데 여기 살고 있다는 그는 오죽할까. 사 먹기에는 벅찬 가격이라 직접 밀가루와 파스타를 사 요리해 먹고 있다며. 아마 우리가 유럽 가서 한국인을 만나 한식은 여기가 좋고, 젤라토 맛집은 거기로 꼭 가세요, 하는 반가움이겠지. 좋은 리스트를 얻은 우리는 한껏 더 게을러지기로 했다. 스쿠터를 빌려서 천천히, 순서대로.




카오락이 아름다울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는 끝없이 뻗은 해변에 있었다. 푸껫 위로부터 장장 30km, 말도 안 되게 곧게 뻗은 해안선이 카오락을 만들었다. 덩달아 도로도 일자로 나 있어 어디나 헤매지 않고 찾아갈 수 있는 쉬운 마을. 직선 도로에서 왼쪽의 구불구불 좁은 비포장길로 들면 그 끝에 비치가 있는 식이다. 가장 먼저 적어준 화이트 샌드White Sand 비치로 갔다. 비치는 커다랗고 완만했고, 한편은 리조트와 연결돼 있었다. 선베드의 가족, 비치 타월을 깔고 앉은 몇 사람. 열 명 남짓되는 사람이 이 넓은 비치를 누렸다. 성수기에는 우리와 그들 사이에 여러 가판이나 펍이 있을 모양새였다. 바다는 옅은 에메랄드빛으로 빛났고 파도는 완만한 해변 모양만큼이나 잔잔했다. 하늘은 맑지만은 않았다. 두꺼운 구름의 움직임에 따라 바닷빛이 바뀌었다. 자그만 파도를 넘고 물속을 달리며 시간을 보냈다. 신비로운 이 바다가 온통 우리 것이었다. 사람이 없음에 감사했다.


바람이 점점 세어졌다. 해변가의 인도아몬드나무Terminalia catappa가 잔가지들을 휘청휘청 흔들기 시작했다. 소나무가 심긴 우리나라 해안에 비해 갑절은 드라마틱했다. 몇 사람이 짐을 챙겨 선베드를 떠났다. 나무의 늙은 잎들이 속절없이 떨어져 뒹굴고 귀에 휘이잉 소리가 끊이지 않던, 흡사 폭풍 전야와 같아진 무렵 그곳을 떠났다.


“우리도 바람에 날아갈지 몰라. 도망가자.”


ⓒ Yoonhye Jeon

바람도 피할 겸, 허기가 져 식당을 찾아 헤맸다. 근처에 먹을 곳이 없었다. 리조트가 많은 탓이었다. 카오락은 한국 사람에게 이름난 JW 메리어트를 비롯해 그 곧은 비치마다 리조트들이 하나둘 들어선 전형적인 리조트 마을이다. 리조트란 자고로 숙식, 놀이, 스포츠, 유흥 모든 것을 그 안에서 즐길 수 있는 숙박 시설 아닌가. 거리에 사람이 적은 또 하나의 이유였다. 원래도 많지 않은 바깥 식당은 비수기여서 대개 문을 닫았다. 배가 고파오는 니콜라스는 예민해졌다. 좁은 길을 뱅뱅 돌다 겨우 문을 연 한 로컬 식당을 발견해 앉았지만 온 데 앉은 파리와, 때 낀 플라스틱 물통의 물로 요리하는 모습을 본 그의 심기는 조금 더 불편해졌다. 치킨 안 돼, 비프 안 돼, 매운 것 안 돼, 야채 싫어, 국물 별로... 그의 ‘아시아 음식 물림 현상’이 다시 찾아왔다. 나는 북부식 매운 파파야 무침인 쏨땀Somtam을 시키고 그는 새우볶음밥을 시킨 뒤 뚱하게 앉아 있었다. 평소 같으면 발랄하게 용기를 북돋우거나 이해하려 노력했지만 왜인지 이날만큼은 힘들었다. 차갑게 쏘아대고 말았다. “니코, 그만 좀 해.”


귀여운 노래가 나오는 빨간 아이스크림 차가 지나가도, 하늘이 점점 파랗게 개어 와도 우리는 아무 말이 없었다. 숙소에 들어가려다 멀지 않은 곳에 코코넛Coconut 비치가 있으니 들렀다 가기로 했다. 텅 빈 모래사장. 파도가 빠져나간 물 머금은 모래는 반질반질 투명했고 겹겹이 쌓인 구름 뒤로 어른어른 노랗고 붉은 해가 비쳤다. 멋진 풍경 아래 우린 말없이 각자 가고 싶은 대로 흩어졌다. 파도 소리와 찰박 찰박 발소리만이 들렸다. 분위기는 좀체 수그러들 줄 몰랐다.


날 선 우리를 이어준 건 뜬금없게도 꼬마 게들이었다. 그들은 바닷물이 소금기를 남기고 간 모래를 휙 휙, 뒷발로 퍼내며 굴을 만들었다. 땅굴을 완성하면 밥을 먹는데, 퍼다낸 모래를 입으로 동글동글 굴려 맛을 보고 남은 모래는 발으로 슥 밀어냈다. 해변엔 꼬마 게가 만든 조그만 동그라미들이 가득했다. 직선, 동그라미 혹은 아무렇게나... 버려진 모래들을 줄 세운 모양마저 게마다 달랐는데, 페루의 나스카 그림 못지않게 훌륭했다. 외계인이 하늘에서 내려다본 나스카의 그림들이 이런 느낌이었을까? 우리는 집을 밟지 않으려 무진 애를 쓰며 그네들을 관찰했다. 꼬마 게의 작품들이 너무나도 작아서 집을 구경하려면 어쩔 수 없이 서로 가까워져야만 했다. 머리를 맞대니 조용히 쉬는 그의 숨이 느껴졌다. 철썩 싸아아 파도가 부서졌다. 그 소리와 감촉과 떨림, 쉴 새 없이 굴리는 작은 게들의 움직임이 너무 아름다워 모든 것이 용서가 될 것만 같았다. 해가 낮아지며 파도가 점점 뭍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힘들여 지은 집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꼬마 게들은 축축해진 모래로 다시 집을 짓고 공을 굴렸다.


모래사장의 얼룩들은 모두 꼬마 게들의 집이었다. ⓒ Yoonhye Jeon


꼬마 게보다 보잘것없는 게 우리 둘이었다. 한 발 물러서 이해하면 될 것을 입을 꾹 다물고 머릿속에 먹구름을 만들었다. 분명 거센 바람을 피해 온 자리였건만 우린 더 냉랭한 바람을 일으켰다. 집이 없어진 것도 아니고, 순식간에 친구를 잃은 것도 아닌데 고작 밥 때문에 서로를 차갑게 쏘아붙였다. 시간이 지나면 부질 없어질, 꼬마 게가 굴린 공보다도 더 작은 일들로. 우리는 서로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파도와 싸우며 꼬물꼬물 기어가는 소라게를 보려 니콜라스는 무릎을 꿇었다. 너른 바다와 겹쳐진 그 모습이 참으로 겸손하고 거룩해 보였다.


우리는 함께 모래성을 쌓기 시작했다. 크고 단단하게, 그는 그의 방식대로 두껍고 높은 벽을 쌓았고 나는 혹시나 파도가 올까 해자를 먼저 팠다. 우리는 이렇게 달랐다. 그러나 그 모래성도 파도에 무너졌다. 해자는 자기를 희생해 벽을 지켰고 높은 벽은 몇 번의 파도가 들이칠 때까지 잘 견뎠다. 성은 점점 무너져 갔지만 우리는 함께여서 행복했다.


바닷가를 천천히 걸었다. 해변의 나무들이 가꾸어진 모습은 날것은 아니었지만 깨끗하고, 단정하고, 차분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본격적인 우기가 시작된, 구름 낀 태국의 일몰은 어제의 푸껫에서도, 오늘의 카오락에서도 오묘했지만 푸껫과 달리 텅 빈 카오락은 성수기를 기다렸다. ‘SEE YOU NEXT HIGH SEASON’ 그러나 우리는 비수기에 이곳에 온 것을, 그 덕에 더욱 아름다운 하루를 보낼 수 있었음에 감사했다.


코코넛 비치의 일몰. ⓒ Yoonhye J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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