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오락 메모리즈 비치, 보드 빌려 우당탕탕 서핑하기
하루 둘러본 카오락이 마음에 쏙 들어 숙소를 이틀 더 연장했다. 이렇게 조용하고 참한 바다와 함께라면 훨씬 더 오래 머물지도 모른다. 벤자민이 써 준 리스트의 세 번째, 메모리즈Memories 비치에 갈 차례다. 서핑을 좋아하는 사람이 찾는다는 곳. 그러고 보니 지금껏 간 카오락의 비치들의 이름이 모두 영어식이었다. 화이트 샌드, 코코넛, 메모리즈. 누군가 이곳을 휴양 마을로 개척하면서 친근한 단어를 붙인 것 같았다. 누구라도 들으면 열대의 해변가를 떠올릴 수 있도록.
길쭉한 카오락 마을. 남쪽은 작은 규모의 리조트가 다닥다닥 붙어 있고, 북쪽으로 올라올수록 드문드문 큰 리조트들이 자리한 모양새였다. 벤자민이 알려준 비치들은 리조트의 느낌이 덜한, 북쪽 한적한 곳들이었다. 우리의 차림새와 무계획적 대답으로 여행 스타일을 단박 알아챘을 테지. 여느 때처럼 일자 도로를 타고 올라가다 왼쪽으로 꺾어 비포장길에 접어들었다. 흙바람 날리며 울퉁불퉁한 길을 달렸다. 마르고 높은 야자나무와 커다란 토란잎들이 둘러싼 신비로운 숲이 펼쳐졌다. 커브를 돌 때마다 달라지는 수종들, 나무 그늘에 컴컴해지다 낮은 풀들에 둘러싸인 햇살 좋은 길을 마주할 때면 마치 탐험대가 되어 숲 속을 누비는 것만 같았다. 오늘은 일요일. 노래가 절로 나왔다. “Quel beau temps aujourd’hui c’est dimanche-”
Quel beau temps aujourd'hui c'est dimanche
Dans les bois ils s'en vont tous les deux
Gentiment sur sa joue il se penche
Lui et elle elle et lui sont heureux
날씨 좋은 오늘은 일요일,
두 사람이 함께 숲으로 가요
아빠는 엄마 볼에 자상하게 뽀뽀해요
아빠와 엄마, 엄마와 아빠는 행복해요
프랑스 가수 이베트 지로Yvette Giraud가 8살 딸 엘리자베스Elisabeth와 함께 부른 <Papa aime Maman>(아빠는 엄마를 좋아해)는 우리에게도 ‘아빠 엄마 좋아, 엄마 아빠 좋아Papa aime Maman, Maman aime Papa’ 하는 후렴구로 잘 알려져 있다. 우리는 ‘니코 에므 윤혜, 윤혜 에므 니코’로 후렴을 바꿔 부르며 카오락의 숲을 가로질렀다. 이베트의 숲은 엘리자베스와 가던 파리 근교의 것일 테지만 우리의 숲은 카오락에 있구나. 대학교 시절 ‘샹송으로 배우는 프랑스 문화’라는 교양 수업에서 배운 노래가 아직도 맴도는 걸 보니 나 꾸준히 프랑스에 관심이 있었고, 어쩌면 이러한 작은 연결고리들이 프랑스 남자와 인연을 길게 이어준 것일지도 모른다.
길 끝엔 넓은 바다가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하천이 합류하는 곳이라 다른 곳보다 모래사장이 한결 널찍했다. 왼쪽으로 서핑 보드가 죽 세워진 서핑 클럽이 있고 멀리서 레슨을 받는 몇 사람이 보였다. 수돗가 근처엔 귀여운 강아지 세 마리가 쫄래쫄래 돌아다녔고 밀짚으로 지붕을 엮은 테이블들이 여러 개 놓여 있었다. 성수기에는 돈 있어도 못 앉을 인기 테이블임에 틀림없지만, 지금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상점들이 모두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과일 리어카에서 수박과 청포도를 샀다. 아저씨가 각얼음이 든 투명한 플라스틱 상자에서 조각낸 수박을 꺼내 줬다. 우리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꼬마들처럼 와라라락- 수박을 먹었다. 푸른 하늘, 마른 원두막에 새빨간 수박. 해를 많이 쬔 과일의 맛과 색은 강하고 달았다.
하나뿐인 서핑 클럽에 레슨 가격을 물었다. 초보자는 2시간 그룹 레슨에 1인당 1,800밧(약 69,000원), 2명이면 3,600밧(약 138,000원) 태국이라 조금 저렴할까 기대했는데 호주와 다를 바 없었다. 머리를 굴려본다. 2명이면 3,600밧(약 138,000원) 서핑 보드 대여는 1시간에 200밧(약 7,600원). 혹시 레슨이 있을지 몰라 보드를 두 개나 빌려줄 순 없단다. 일단 하나만 빌려서 번갈아 타 보기로 했다. 서핑 레슨을 몇 번 받은 나와 달리 니콜라스는 한 번도 타 본 적이 없어 살짝 걱정됐다.
“아무래도 레슨을 받는 게 좋지 않겠어? 보드에서 어떻게 일어나는지 정도는 알고 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룹 레슨의 오리엔테이션을 잠시 보던 그가 대답했다. “할 수 있을 것 같아. 안 되면 레슨할 돈으로 9시간 빌려서 타 보지 뭐. 하하!”
파도는 크진 않았지만 끝없이 밀려왔다. 바다엔 그룹 레슨을 받는 세 명과 강사들, 두어 명의 서퍼, 그리고 우리 만이 있었다. 엉망진창으로 타도 남을 겁줄 부담이 적었다. 파도치는 포인트가 가까워 패들paddle 부담도 적었고, 서너 겹씩 밀려오는 파도 사이에 자리만 잘 잡으면 보드는 무리 없이 나갔다. 왕초보를 갓 탈출한 나에겐 최적의 코스. 그래도 먼저 레슨 받아 봤다고 니콜라스에게 일어서는 법을 알려주려 했더니 그는 그것보단 자기에게 맞는 자세를 직접 알아가고 싶다고 했다. 프랑스인의 거절은 진짜 거절이란 걸 알고 있지만, 자신만만한 그에게 내 의견을 관철시키고픈 오기가 생겼다.
“그래도 어떻게 하는지는 알고 타는 게 낫지 않겠어?”
“먼저 타 보고 영 아니다 싶으면 물어볼게!”
그는 단호했다. 어쩌면 괜찮다는데 자꾸 묻는 내가 귀찮았을지도 모른다. 내가 몇 번 타는 것을 지켜보던 니콜라스가 결심한 듯 외쳤다. “마이 턴!(My turn, 내 차례!)” 뒤뚱뒤뚱하나 싶더니 이거야 원, 보드 타는 방법도 몰랐으면서 두 번 만에 올라서 모래톱까지 가 버리는 그. 파도가 고른 간격으로 적당히 와서 뒤에서 밀어줄 필요도 없었다.
“이거 아주 재밌는데?”
그는 나를 보며 씨익 웃었다. 돈 주고 배운 나보다 잘 타는 것 같아 배가 조금 아프긴 하지만 비슷한 실력으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게 되어 좋았다. 가르쳐주지 않아도 중심을 잡고 좋은 자세를 잡는, 이를 테면 몸을 낮추고 세련된 팔 동작으로 균형을 맞추거나 발을 움직이며 더 안정적인 부분을 찾는, 그의 모습이 기특했다. 끊임없이 들어오는 파도 덕분에 한국에서 레슨 받던 것보다 훨씬 밀도 있게 보드에 올랐다. 옆 레슨을 힐끔 보며 타이밍을 잡기도 하고, 어쩔 땐 뒤돌아 서로 엄지를 척 내밀기까지 하면서 쉴 새 없이 파도를 탔다. 내 평생 이렇게 즐겁고 의욕적으로 서핑해 본 건 처음이었다. 아마 내 멋대로 탈 수 있어 더 신났던 것 같다. 만약 레슨을 받았다면, 선생님이 뒤에서 나를 보고 있고, 내 자세를 교정해 주고, 머릿속으로 내 자세를 계산하고, 어설프게 시도했다가 실패할 때마다 얼마 남지 않은 레슨 시간을 생각하며 ‘나는 왜 안 되지...’하는 기분에 즐거움을 놓쳤을 것이 분명하다.
스포츠는 한 번 잘못된 습관이 들면 위험할 수 있기 때문에, 또 탄탄한 기본기가 훗날 기량의 뒷받침이 될 것이기 때문에 시간을 들여 배우고 닦는 것이 중요하다. 고난의 시간도 필요하고. 그러나 대상과 허물없이 친해지는 시간도 분명히 필요하다. 허물에는 올바른 방법을 따라야만 한다는 강박이 포함된다. 그대로 따라가지 못할 때 오는 허탈감이나, 나처럼 시간을 투자해도 발전은 없는 듯한 초조함에 휩싸이는 것도 허물이 될 수 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흔히 좋아하는 스포츠를 취미, 취미 하지만 그렇다면 취미란 뭘까? 趣味, 결국 기분을 취하는 일이다. 순간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잘하고 싶은 마음’이 취미의 중심이 되어버린다면 나의 취미는 매번 자기 극복을 해야 하는 투쟁이 될 것이다. 물론 잘하고 싶은 마음이 취미를 이어갈 동력이 될 수는 있지만 언젠가는 지쳐 버리겠지. 못해도 상관없다. 중심은 즐거움이 먼저. 공자孔子도 ‘지식을 아는 사람은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을 이기지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그것을 즐기는 사람을 이기지 못한다’고 하지 않았나. 항상 아는 것이 먼저였던 나는 니콜라스와 다니며 진정으로 ‘즐기는 사람’이 무엇인지를 본다. 일단 부딪혀 즐기다가 좋으면 아는 것의 단계로 넘어가는 것. 멋진 일이다.
비키니를 입은 나는 마찰력을 높이기 위한 강습용 보드의 오돌토돌 한 표면에 피부가 여러 군데 쓸리고 말았다. “오늘은 여기까지!” 보드를 반납하고 모래사장에 벌러덩 누웠다. 발끝에 파도들이 닿았다. 오늘도 꼬마 게들은 신이 나 공을 굴렸다. 파도 타는 매력에 푹 빠진 그는 다음엔 돈을 많이 벌어와서 오래 머물며 레슨을 받고 싶다고 했다.
비치의 유일한 바이자 아마 여기서 해변 이름이 유래한 듯한 메모리즈 바는 역시나 닫혀 있었다. 스쿠터로 해변을 따라 달려 벤자민의 리스트 중 하나인 중심가의 모히또 바로 향했다. 투 샷 인 원 칵테일. 동남아의 펍에선 종종 가격을 높여 부를 수 있는 칵테일로 프로모션을 한다. 2+1이 대부분이라 두 명인 우리에겐 부담스러워 넘기곤 했는데, 여기는 한 잔에 알코올을 두 배로 넣어주는 투 샷이라니, 호객하는 스탭에게 진짜 투 샷이 맞는지 한 번 더 확인한 다음, 길가 메뉴판 옆 자리에 앉았다. 어스름이 질 무렵 상점에 하나둘 불이 켜지고 방금 도착한 듯한 배낭여행자들이 이따금 지났다. 우리는 블러디 메리와 피나콜라다를 시켰다. 정력 넘치는 헨리 8세의 비운의 딸이자 가톨릭 교도로서 수많은 프로테스탄트를 처형한 메리 1세의 별명을 딴 칵테일. 소금 넣은 토마토 주스와 보드카, 조금 들어간 타바스코 소스가 알싸하게 코를 찌른다. 피나콜라다를 마시는 니콜라스에게선 은은한 코코넛 향이 난다. 서로 좋아하는 칵테일에 대해, 내가 좋아하는 진Gin과 니콜라스가 좋아하는 가니시ganish 종류에 대해, 몰랐던 칵테일의 후일담에 대해 오래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비싼 가격에 비해(잔당 300밧, 한화 약 11,500원) 우리 기준에는 못 미치는 칵테일이었지만, 하늘이 온통 깜깜해질 때까지 하하호호 웃으며 오랜만에 펍이 아닌 바에 온 기분을 냈다.
여름 밤바람과 텅 빈 바, 한갓진 마을길 뒤로 어스름히 보이는 평화로운 구름들. 더 말해 무얼 할까. 숙소를 며칠 더 연장해야겠다.
* 아무리 평화로운 곳이라도 언제나 조심. 원 샷 가격으로 투 샷을 넣어 준다고 호객한 이 가게는 원 샷 가격이 아닌 투 샷 가격으로 계산서를 주었고, 다행히 계산 전에 발견해 원 샷 가격으로 계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