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오락 펍에서 마주한 16살의 나
그때 나는 중학교 3학년이었다. 대구 한 고등학교의 큰 강당. 벽과 바닥은 니스칠을 한 어두운 나무로 마감돼 있었고 창문마다 자줏빛 두꺼운 벨벳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다. 어두운 커튼 틈으로 희미한 햇살이 들었다. 중앙에는 무대가, 그 위론 노란색 술이 달린 자줏빛 커튼이 열려 있었다. 고등학교 중창대회였다.
나는 예술고등학교 입시를 준비하던 차였다. 다니던 교회의 오빠가 자신이 단장으로 있는 중창단 반주를 맡겼다. 곡은 플랫이 다섯 개 달린 전투적인 곡이었다. 조금 어렵긴 했지만 괜찮았다. 여중생 신분으로 남고로 찾아가 음악실에서 연습하는 것도 재밌었고, 연습이 끝나면 떡볶이에 튀김을, 혹은 짜장면을 시켜 먹으며 시시껄렁한 농담이나 하던 시간도 좋았다. 어린 나이에 반주자'님' 대접을 받으니 꼭 내가 주인공이 된 것만 같았다. 오랫동안 피아노를 쳐 왔지만 가끔씩 교회 중고등부에서 반주를 했을 뿐 콩쿠르를 나간 적도, 초등학교 학예회 때 피아노 명곡집의 ‘알프스의 저녁놀’을 친 것 외엔 무대에 서 본 적이 없던 내게, 중창대회는 첫 대외 무대 데뷔이기도 했다.
무대는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듯싶었다. 순간 악보 넘길 타이밍을 놓쳤다. 오른손 화음이 쉼 없이 나오는 부분이었다. 재빨리 따라잡는답시고 왼손으로 넘기려다 그만 두 장을 넘겨 버렸다. 다음 소절을 못 찾은 나는 당황해 반주를 멈췄다. 정적이 흘렀다. 중창단은 무대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서 있었다.
이후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어찌어찌 다시 반주를 시작했고, 다행히 노래의 끝은 냈다. 너무 부끄럽고 미안해 단원들 얼굴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같이 퇴장하지 않고 혼자 강당으로 내려가 의자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눈물도 안 났다. 그저 충격적이었다. 당연히 대회에선 떨어졌다. 단원들은 그럴 수도 있다고 위로했다. 그러나 나는 ‘나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는 걸 용서할 수 없었다. 그 정적의 시간 동안, 자기들도 얼마나 당황하고 부끄러웠을까. 다른 학교 학생들도 다 보고 있는 마당에 외부인인 반주자가 노래를 망쳐버렸으니.
몇 달 후 원하던 예술고등학교에 진학하며 나는 대구를 떠났다. 새로운 생활에 옛일은 잊혔다. 그 후로도 반주는 쭉 했다. 기억력이 별로라 워낙 힘든 일, 어려운 일까지도 잘 잊는 나였고 또 다른 실수를 할 때면 사람이니까 실수할 수 있다고 덮었다. 시간이 지나며 그런 돌발 상황을 커버할 기지가 생겨났다. 악보를 두 장 넘기면 다시 한 장 전으로 돌아올 수 있으며, 어려운 부분은 대강 몇 화음을 생략하면서 구렁이처럼 넘어가는 재주도 생겼다. 어릴 때의 나는 경험이 없었던 거다. 대학교에서도 악기 반주를 하거나 매년 연주회에 출연했다. 졸업 연주, 임용 시험까지 무사히 마치고 나니 치명적인 기억은 자연스레 어린 날의 실수로 치부되었다. 그래서 괜찮은 줄 알았다.
직장 생활도 무난하게 거쳤다. 가르치고 쓰고 고치며 점차 건반 대신 키보드를 두드리는 일이 늘어났다. 삶은 호주로 옮겨왔다. 시드니에서 급하게 반주자를 구한다는 청에 한인교회의 성가대 반주를 맡게 되었다. 어려운 곡을 받을 때면 교회 사무실에 연습하러 가곤 했는데, 니콜라스는 따라와서 피아노를 듣는 것을 참 좋아했다. 으레 그렇듯 악기 하는 여자 친구에 대한 환상은 누구에게나 아름다운 법이니까.
모히또 바에서 칵테일을 마신 그날 밤 야시장으로 향했다. 근처의 유명한 방 니앙Bang Niang 마켓이 문을 닫아 멀리의 새로 생긴 야시장Build Market을 찾았다. 철제 기둥에 커다란 메탈 슬레이트 지붕을 덮은 시장은 조금은 허술한 태국식 힙플레이스였다. 청년이나 젊은 부부들이 음식과 액세서리를 팔았다. 생긴 지 얼마 안 된 모양인지, 입점도 다 안 되었고 손님도 별로 없었다. 꼬치로 배를 채운 우리는 멀리서 들리는 이글스Eagles의 <호텔 캘리포니아Hotel California> 멜로디를 홀린 듯이 따라갔다. 작은 펍이었다. 솔로 기타리스트가 노래를 부르고 한 손님이 나무 의자를 퍼커션 삼아 두드리며 박자를 맞추는 중이었다. 신나게 지켜보다 “윤혜, 너도 나가 봐!” 하는 니콜라스의 부추김에 “그럴까?” 나가 나도 같이 연주했다. 니콜라스는 그런 나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파할 때가 되자 사장님은 의자를 한데 모아 조촐한 술자리를 만들었다. 우리는 옹기종기 낡은 소파에 앉아 맥주를 기울였다. 친화력 좋은 니콜라스는 금세 노래를 부르던 팬Pan과 친해졌다. 그러다 내가 피아노를 전공했다며, 우쭐하게 나를 추켜세웠다. 작은 소리로 “니코, 그러지 마, 하지 마.” 그의 허벅지를 꼬집었지만 니콜라스는 “왜 어때~ 허풍도 아니고 진짠데!” 이내 사람들은 박수를 치며 나를 바라보았다. 사장님이 키보드를 가지고 왔다.
처음엔 장난감을 가져온 줄 알았다. 50건반쯤 그러니까 4옥타브쯤 되었고 페달이 없었다. “이 키보드론 칠 수 있는 곡이 없는데...” 가까스로 김광민의 <대니 보이Danny Boy>의 첫 세 음을 눌렀다. 띵땅땅- 아동용 키보드 소리가 났다. 순간 안 하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모두가 나를 보고 있었다. 시작했는데 또 어떻게 끝내겠어, 억지로 연주를 이어갔다. 페달 없이 뚝뚝 끊기는 음들은 마치 아기 장난 같이 들렸다. 사람들은 점점 자기들끼리 얘기를 하기 시작했고 결국 니콜라스만이 들어주고 있었다. 나는 피아노 치기를 그만두었다. ‘이럴 거면 왜 시킨 거야?’ 급격하게 기분이 나빠졌다. 그러다 곧 ‘내가 못 쳐서 흥미가 떨어진 걸까?’ 하는 이상한 자책감이 들었다. 억지 같은 상황보다 멋지게 보여주지 못했다는, 그런 상황에서도 멋지게 해냈어야 하는데 못한 내가, 연장 탓을 한 내가 결국 모자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기가 앵앵대는 밤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말은 안 들린 지 오래다. 생각할수록 이 일을 일어나게 만든 니콜라스가 원망스러웠다. 왜 시키지도 않은 일을 부추기고, 자리를 만들었니, 너는 나를 자랑하고 싶었니?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으스대는 거인 걸 알면서. 감정은 점점 격해져 네가 나에 대해 뭘 알아, 까지 치달았다. 모기에 너무 많이 물렸다며 이만 들어가 봐야겠다고 했다. 니콜라스가 급하게 따라 나왔다.
길가에 서서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당황한 니콜라스에게 “왜 그랬냐”며, 이 상황을 만든 그에게 애꿎은 비난을 해댔지만 사실 그의 탓이 아니었다. 그냥 내가 싫었던 것이다. 나는 사람을 실망시키는 것을 너무나도 싫어했던 것이다. 이 기분이 잊고 살던 그 날을 기억나게 만들었다. 사람들의 실망한 얼굴 너머로 그때 그 자리, 관중석의 그 사람들, 단원들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 같았다. 15년 전 강당에서도 안 나온 눈물이 그제야 나올 것 같았다.
모든 장면은 내 머릿속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니콜라스는 내가 갑자기 나와서 집에 가겠다며, 이게 다 너 때문이라고 자기를 비난하다 울자 적잖이 당황했다. 내가 던진 가시 돋친 말과 내 눈물을 이해하지 못했다. 사실 그건 나 스스로 치부를 들키기 싫어 남을 공격한, 나쁜 방어기제였다. 그는 그럼에도 나를 다독였다. 그것뿐이냐고, 다 이야기해 보라고. 나는 훌쩍대며 16살 어두운 강당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건 세상 억장이 무너지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어렸던 내게만 아주 큰일이었을 뿐 남이 들으면 하나의 작은 사고였다. 그의 반응은 그랬다. 나도 이 일이 그렇게 기억되길 바라며 어딘가 억눌러 두었던 걸지도 몰랐다. 하고픈 것들을 하고픈 대로, 표현하고 싶은 것을 대로 표현하며 살아온 니콜라스는 이런 압박감과, 그 불편한 기억을 내가 마음 한구석에 품고 살아왔단 사실에 놀랐다.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그의 모습에 더욱 억울했다. 당연했다. 나도 이해하지 못한 걸로 남의 공감을 구하다니.
“나도 몰랐어. 나도 몰랐단 말이야. 이게 이렇게 내게 큰일이었는지.”
“윤혜, 네가 이런 깊은 상처를 가지고 있었는지 몰랐어. 아직도 너의 마음을 내가 백 퍼센트 이해하진 못하겠지만... 내 행동이 상처를 줬다면 미안해. 정말 몰랐어. 다음부터 조심할게. 그런데 왜 하겠다고 한 거야? 앞으로 싫으면 싫다고 해. 사람들이 박수친다고 기대한다고 덥석 하지 말자구. 오늘 일은 네가 실수한 게 아니야. 피아노를 친다는 사람에게 그런 싸구려 건반을 가져오고, 시켜놓고 듣지 않는 태도를 보인 그 사람들이 예의 없는 거지. 당장은 이 기억이 아주 커 보여도, 내일이면 모두가 잊을 일이야. 그 사람들은 기억하지조차 못할 걸. 그렇지만 이 일이 너의 안 좋은 기억을 떠오르게 한 것 같아서 나도 마음이 아프다.”
신경숙의 자전적 소설 『외딴 방』에서 그녀의 잊고 싶었던 여공 시절의 아픈 기억이 야간학교 급우에게서 문득 걸려온 전화 한 통, “너 왜 우리 얘기는 안 쓰니?” 한 마디에 모든 것이 세상 밖으로 힘겹게 튀어나온 것처럼, 띵땅띵땅 <대니 보이>가 울리던 그 펍이 16살의 나를 세상 밖으로 나오게 만들었다. 『외딴 방』 속 어린 그녀가 문장에 쉼표와 말줄임표를 이상하리만큼 많이 썼던 것처럼, 내 이야기를 그에게 고백하는 데에도 참 많은 쉼표와 눈물이 필요했다. 횡설수설하느라 그를 모두 이해시키진 못했지만 일단 꺼내 놓으니 후련했다.
스쿠터를 타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생각했다. 누구에게나 어떤 쓸쓸한 구석이 있게 마련이다. 부끄럽거나 상처 받은 기억들은 있을 수밖에 없다. 그 기억은 또 다른 비슷한 상황을 만나 확대되고 되풀이되고 더욱 쓸쓸해지기도 한다. 나는 정말 몰랐다. 괜찮다고 그저 덮어 놓고 있던 기억이 이렇게 터져 버릴 줄은. 상황이 엉망진창이어도 훌훌 털고 일어나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나로 비롯된 엉망 앞에서 나는 한없이 작아지는구나. 이 모든 부끄러움이 이 내가 의도하지 않은 부추김에 떠밀렸기 때문이라 화살을 돌리며 마음 편하려 했구나. 나 때문에 소중한 사람을 상처 받게 할 뻔했다. 앞으론 싫으면 싫다고 하고, 오로지 내가 자신 있을 때만, 하고 싶을 때만 할 거야. 내가 선택해서 오로지 내 몫으로 감당할 거야.
“윤혜, 괜찮아?”
“응, 니코, 오늘 일은 미안해. 그리고 걱정하지 말아줘. 다 쏟아냈으니 다음엔 덜할 거야. 그 일보다 모기 물린 데가 더 신경 쓰이는 거 보니까... 벌써 극복한 것 같은데? 하하.” 허벅지를 긁으며 애써 괜찮은 척 웃는 내게 그는 말했다.
“윤혜, 약속해줘. 무슨 일이 있으면 내게 말해주겠다고. 힘들더라도, 아프더라도 말해주겠다고. 나는 남이 아니야. 숨길 필요도 없고 꽁꽁 닫을 필요도 없어. 오늘 나는 네가 마음 문을 열어줘서 너무 고마워. 그거 알아? 너에 대해 더 많이 말해줄수록 내가 사랑해줄 수 있는 부분도 더 많아진다는 걸? 잊지 마, 나는 언제나 네 편이야.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