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카오락 방니앙 마켓
숙소 책장에서 집어 든 태국 가이드북은 영어가 아닌 독일어로 쓰여 있었다. 피자집 화장실의 주의 문구도 독일어였고, 식당의 메뉴판 역시 독일어를 병기했다. 독일 사람이 많이 찾겠거니 정도로만 여겼는데, 야시장에 가서야 눈으로 보았다. 방니앙 마켓은 태국 시장이 아니라 독일 시장이었다.
“와, 다 독일 사람이야. 역시 다들 키가 크네...”
키 큰 금발들이 북적이는 시장, 여기저기서 독일어를 들은 니콜라스가 부러운 농담을 던졌다. 어휴, 독일 사람들을 여기서 또 보네, 하는 익살도 빼놓지 않는다. (프랑스와 독일은 우리나라와 일본 같은 애증의 관계다.) 그에게 물었다.
“내가 우리나라 사람, 중국 사람, 일본 사람 구별할 수 있는 것처럼 너도 프랑스와 독일 사람을 구분할 수 있어?”
“아니, 유럽인들은 외모로 국적을 가늠하기 어려워. 국경이 워낙 자유롭기도 하고 다른 민족끼리 결혼도 많이 한 걸. 그래도 전통적으로 금발에 키가 크면 독일 사람 혹은 북유럽, 아무래도 좀 뾰족하고 마르면 프랑스 사람, 그렇지. 프랑스 사람은 대개 말랐어. 음.. 스페인이랑 이탈리아 사람들은 갈색 머리가 많고 인상이 진하긴 해.”
우문愚問에 열답熱答. 성큼성큼 지나는 독일인들을 보며 나는 중얼거렸다. “게르만의 피는 이렇게 긴 사람들을 만들었구나...”
독일 관광객들은 가족 단위가 많았다. 아니, 관광객이라기보다는 휴양객의 모습이었다. 젊은 부부는 맥주를, 마주 앉은 어린 아들은 콜라를 마시거나 중년 부부와 다 큰 아들딸이 함께 맥주병을 기울였다. 검은 밤 노란 조명에 저녁을 먹으러 나온 가족들. 마켓은 소소했고 유흥과도 거리가 멀었다. 푸껫 야시장에서 시끌벅적 중국인들과 태국인을 보던 것과는 사뭇 다른 기분이었다. 대관절 어떻게 이 조그만 동네가 게르만 민족에 사랑받는 휴양지가 되었을까?
카오락은 조용하고 깨끗하고 한적하다. 야시장도 시끄럽지 않고 무언가 질서가 있었다. 독일의 국민성을 생각해 보니 언뜻 어울리기도 했다. 일반화할 순 없다만 그래도 국민성이란 것은 분명 존재하니까. 깔끔하게 정리된 것을 좋아하고, 시간과 규율을 지키고, 무엇이든 확실하려 하고. 그래서 자유분방한 프랑스인들은 원칙이 우선인 독일 사람을 답답해하면서도 프랑스 차 탈래, 독일 차 탈래? 물으면 독일 차를 선택한다. 그네들의 성격을 더 신뢰하기 때문이다. 카오락의 독일인들은 카오락처럼 조용하고 여유로웠다. 문득 여기만 이런 걸까? 궁금해졌다. 독일에서 오래 산 언니에게 물어봤다.
“독일 사람들에게 휴가는 말 그대로 ‘쉼’이야. 어디를 가고, 보고, 체험하고 모험하는 것보다 책 읽고 여유롭게 쉬는 것. 장소도 대도시보다 조용하고 한적한 곳을 선호하더라고. 휴가는 부활절, 여름, 크리스마스 휴가를 중심으로 일 년에 한 달 정도 유급으로 받는데, 눈치 보지 않고 굉장히 자유롭게 써. 워낙 병가나 연차부터 자유로이 내는 나라니까.”
“오, 정말 제가 받은 인상이에요! 여기가 정말 조용하거든요. 아무도 없어 보이는데 리조트나 바다에 가면 다들 누워서 책 읽고 있더라고요. 한 번 오면 오래 머무는 것 같았어요.”
“응. 친한 친구 부부도 매년 크로아티아 작은 동네로 휴가를 가는데, 갈 때마다 읽을 책은 물론이고 이젤, 낚시 장비까지 잔뜩 챙겨 가.”
독일 사람들은 한 번 여행한 도시와 묵은 숙소를 기억하고 다시 찾는 일이 많다고 했다. JTBC <비정상회담>에서 독일 대표를 맡았던 다니엘 린데만Daniel Lindemann도 비슷한 인터뷰를 했었다.
독일 사람은 대부분 쉬러 가는 게 (여행의) 목적이에요. 해변에 누워서 책 읽고 수영하고 저녁에 괜찮아 보이는 데 들어가서 맥주 한잔하고. (...) 독일 사람은 평소에 굉장히 알뜰하게 지내다가 여행할 땐 여유 있게 소비하는 편이에요. 그래서 (음식이 맛이 없어도) 화를 내기보단 그냥 대충 먹고 돈을 내고 나오죠. - <트래블러> 2014년 9월호 중
둘 다 휴가에 돈을 아끼지 않는다는 말을 콕 집어내는 것도 신기했다.
“평소에 참 검소한 독일 사람들도 휴가엔 아낌없이 쓰더라고! 휴가를 정말 중요하게 생각한단 뜻이야. 그래서 미리미리 준비해. 연초부터 부활절부터 여름 휴가까지 예약해 놓을 정도로. 참, 바다가 귀한 독일은 물이 있는 휴양지를 선호해. 여름에 바다 가는 거 싫어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독일은 유난히 더 좋아하는 것 같아.”
1990년대 초 우리나라가 발리, 사이판 직항을, 2000년대 초 세부, 보라카이 직항을 개척하며 한국인의 휴양지로 만들었던 것처럼, 독일은 카오락을 뚫었다. 마을이 크지 않고, 길도 쉽고, 검색도 쉽고, 조용하게 책을 읽을 수 있고, 온종일 자리를 맡아도 여유 넘치는 바다. 어른 전용 리조트가 많은 것도 일조했다. 카오락의 메르디앙과 풀만 리조트는 독일인에게 동남아 휴양의 대명사였다. 온 김에 저렴하게 양복을 맞춰 가는 게 한때 유행이었는데, 그 여파로 아직도 길가에 오래된 양복점이 남아 있다. 싼 물가와 평화로운 풍경을 잊지 못한 이들은 은퇴 후 이곳에 정착했다. 2018년에는 독일 회사인 로빈슨 클럽이 카오락에 직접 ‘독일인을 위한’ 리조트를 지으며 도전장을 내기에 이르렀다. 스페인, 이탈리아, 스위스 명소에 리조트를 짓던 회사가 머나먼 동남아시아, 그것도 한낱 작은 마을에 리조트를 세우다니. 심심찮게 보이는 리뷰마저 독특했다. 직원이 영어를 못한다는 것. 독일어를 할 줄 아는 직원을 우선으로 뽑아서 생긴 불상사다.
많은 독일인들에게 사랑을 받음에도 여전히 카오락이 여유로울 수 있는 큰 이유 중 하나는, 그들의 조용한 여행 방식 외에도, 아직 중국 단체 관광객이 진출하지 않은 것도 한몫한다. 방콕, 치앙마이, 치앙라이, 푸껫 등 인기 많은 태국 도시 들이 단체 관광으로 몸살을 앓는데 반해, 이곳은 한국인들 사이에서도 ‘중국인 없는 곳’이라 종종 인증되곤 한다. 왜 그럴까? 카오락은 크고 북적이는 도시도 아니고, 눈 앞에 화려한 바들이 혼란시키는 것도 아니고, 문 옆에 가게가 있는 것도 아니다. 바다는 언제나 여유로우며 리조트에선 딱히 움직이지 않아도 모든 것이 해결된다. 어디에 나가려면 썽태우를 불러야 할 만큼 이동이 불편하기도 한데, 그런 만큼 나만의 자유가 오롯이 보장되기도 한다. 아마 관광을 목적으로 온 사람들에게는 별것 없는 이 시골 마을이 심심할 테고, 평화로운 휴가를 즐기는 독일인에게 제격일 것이다. 와르르 몰려와 소비해버리기보단, 조금씩, 조금씩 천천히 여유롭게 즐기기. 독일인이 들어온 지 20년 이상 되었음에도 카오락에 젠트리피케이션이 덜한 이유다.
펍에 앉았다. 오늘은 밥 말리Bob Marley의 음악을 따라왔다. 독일 꼬마와 태국 꼬마가 테이블을 요리조리 돌아다니며 함께 총놀이를 하고, 벽걸이 선풍기는 뱅글뱅글 돌며 더운 바람을 몰아냈다.
여행을 다니면서 나라마다 특별히 사랑하는 도시가 있구나 느낀다. 그들이 사랑하는 방법에 따라 도시의 모습도 바뀌어감도 보게 된다. 특히 태국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와 가까운 남쪽 바다부터 중국과 접한 북부 산간까지, 길고 큰 땅을 둔 만큼 도시마다 삶이, 느낌이, 또 여행객이 다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아기자기한 치앙 마이Chiang Mai에 한 달씩 머물며 맛난 음식을 먹고 요가하는 것처럼, 아나키스트들이 빠이Pai의 자유로움에 눌러앉아 음악을 만들고 파티를 여는 것처럼, 치앙 라이Chiang Rai의 화려한 사원들에 중국 사람이 끊이지 않는 것처럼. 그 가운데 카오락을 향한 독일인의 조용한 사랑은 오래오래 단단하고 꾸준하며 확실하다. 마치 그들의 성격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