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게 대수야?

카오락 오리엔탈 리조트

by 전윤혜


발리에서 호화 리조트 숙박을 걸고 한 카드게임 내기를 기억하는지. 여행 비용의 상당한 부분을 부담하던 니콜라스는 때론 내가 이 여행에 책임감을 잃지 않도록 한 번씩 돈을 쓰게 만들었는데, 이 내기 또한 그러한 아이디어였다. (여행 비용 문제는 초기에 필리핀에서 합의를 했다.) 애석하게도 그의 뜻대로 나는 졌다. 그래. 리조트로 가자! 지금껏 싼 숙소들을 전전하느라 어쩔 땐 전기가 안 들어오고, 어쩔 땐 바퀴벌레가 나오는 방에서 자기도 했었지. 이젠 호화를 누릴 때가 왔다. 무엇보다 리조트로 먹고사는 카오락이니 이곳이 적소다.


웬걸, 70% 할인이라니. 아무리 비수기라 해도 날씨가 이렇게나 좋은데, 믿기지 않는 세일률이었다. 지금 머무는 숙소도 성수기엔 1500밧(약 57,000원), 지금은 485밧(18,500원)으로 할인되긴 했지만, 리조트까지 이렇게 대폭 할인할 줄이야.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광경이다. 우리의 마음을 끈 건 자그만 성인 전용 리조트Khao Lak Oriental Resort로, 아담한 사이즈에 중심가와 가까워 기사를 부르지 않아도 되는 것이 좋았다. 기다란 수영장이 건물 사이사이로 들어서 있어 다리 위로 걸어 다녀야 하는 모양새도 멋졌다. 사실 휴양 여행은 다녀본 턱이 없던지라 다 멋져 보였다. 4,500밧(약 170,000원) 정도 하던 평범한 디럭스룸이 900밧(약 35,000원)으로 내려가 있었다. 하루만 묵자, 하던 게 가격을 보고는 며칠도 묵을 수 있겠는걸... 싶다.


아침부터 비가 왔다. 큰맘먹고 프라이빗 투어를 한 필리핀의 그날과 비슷했다. 눈을 뜨자 들리는 빗소리에 또 한 번 “Shit.(제기랄)” 내뱉고 말았다. 7월 16일. 태국에 도착한 뒤로 처음 보는 비였다. 알다시피 동남아시아의 우기는 언제 비가 왔다 개일지 모른다. 일기예보는 언제나 비와 천둥. 맑은 날도 천둥, 흐린 날도 천둥이라 가늠할 수 없다. 어제까지 맑다 하필 오늘에야 비가 오는 걸까. 우기에 여행을 하는 우리 탓이지, 요행을 바랐던 우리 탓이지, 하고 만다. 비에 젖은 모빌만 애처롭게 흔들흔들, 웬디와 벤자민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카오락의 낭만을 주었던 숙소 Les Fleurs. ⓒ Yoonhye Jeon

배낭을 메고 스쿠터에 올랐다. 굵은 빗방울에 몸은 금세 젖었다. 도착한 우리에게 리셉션 직원이 웰컴 드링크와 물수건, 과일을 조금 내 왔다. 물수건으로 흐르는 비를 조금 훔쳤다. 방이 덜 준비되어 기다려야만 했다. 들이닥치는 비에 직원들이 블라인드를 내렸다. 어두운 통로를 지나 2층으로 올랐다. 새파란 하늘이 비치던 사진과는 달랐지만 그래도 예뻤다. 감개무량했다. 리조트라니. 우리는 마치 평생을 저축한 돈으로 내 집을 마련한 부부처럼 발코니에 서서 오래도록 수영장을 바라봤다.


기분도 잠시, 뒤에서 스멀스멀 정체모를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화장실에서 나는 것이었다. 잠깐이겠거니 했던 것이 사라지지 않는다. 리셉션에 확인을 부탁했다. 냄새를 맡은 직원은 하수 구멍을 보고서 방향제를 뿌리고 나갔다. 눈 가리고 아웅? 냄새가 점점 심해져 다시 호출했다. 매니저가 오더니 갑작스런 비로 하수관이 어딘가 막힌 것 같다며, 지금 해결할 수 없으니 방을 바꿔준다고 했다. 매니저를 따라 1층으로 내려갔다. 새로 받은 방은 풀 액세스 룸(Pool Access Room, 방 발코니에서 바로 수영장으로 갈 수 있는 방)이었다. 70프로 할인받은 디럭스룸 가격으로 예약했는데 풀 액세스 룸으로 업그레이드되다니 황송했다. 기념으로 룸서비스를 시켰다. 아니, 쏟아지는 비에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던 거다. 차라리 잘 됐다, 비가 오니 어쩌겠어 호기롭게 누려보자, 하고선 마사지를 예약했다. 비 덕에 정원은 한껏 싱그러우면서도 차분했다. 빗방울이 찰랑, 찰랑, 연못에 떨어졌다.


Khao Lak Oriental Resort. ⓒ Yoonhye Jeon

리조트에서 받는 마사지는 사전 테스트도 하고, 차도 주고, 옷도 깨끗하고, 화장실도 멋졌다. 높은 담장 너머 길 건너와 백팔십도 다른 세계. 한국에서 일할 시절 마감이 끝나면 중국식 마사지, 태국식 마사지, 수기 치료, 심지어 세신 마사지까지 찾아 쥐꼬리만 한 월급을 탕진하던 나는 니콜라스에게 태국식 마사지가 어떻게 다른지 설명해줬다.


“태국 마사지는 다른 마사지처럼 문지르고 주무르는 게 아니라 맨손이나 팔로 지압을 하고, 네 몸을 잡아당겨서 스트레칭을 해줄 거야. 받을 땐 뻣뻣하고 아픈 것 같지만 끝나면 엄청 시원해. 태국에 스님들이 많잖아. 오랫동안 앉아서 수행하거나 하면 근육이 뭉치니까, 서로 안마하면서 풀어주던 게 지금까지 내려온 거래.”


방값에 육박하는 친절하고 체계 있는 태국 마사지는 발리에서 힘없는 초보 마사지사에게 첫 경험을 한 니콜라스의 ‘마사지 불신’을 거두기에 충분했다. 강한 지압에 “억” “제발 살살”해 달라기도 하며. 마사지를 마치고 내친김에 레스토랑까지 갔다. 태국식 새우탕인 똠 양 꿍Tom yam kung을 시켰다. 레몬그라스 향 퍼지는 시큼한 국물에 맥주까지 시켜먹으니 딱이었다. 캬, 맥도널드에서조차 두 번 울던 우리였는데(맛없어서 한 번, 비싸서 한 번) 고삐가 풀리니 걷잡을 수 없다. 다이어트에도 치팅 데이(Cheating day, 일주일에 한 번 맛있는 것 먹는 날)가 필요한 마당에 여행이라고 다를까. 배가 부르니 수영을 해야지. 부뚜막에 늦게 오른 고양이는 비 오는 수영장에서도 신났다. 세 방에만 불이 켜져 있었다. 비가 똑똑 떨어지는 수영장, 바닥의 노란 조명에 의지한 채 천천히 유영했다.


“아, 이 맛에 다들 리조트에 오는구나.”


불 켜진 방은 우리까지 4개뿐. ⓒ Yoonhye Jeon, Nicolas Riou

수영을 마친 우리는 방 앞 선베드에 누워서 비를 맞았다. 사람들 말로는 지금부터 쭉 비가 올 거라 했다. 본격적인 우기가 시작된 것이다. 지금껏 ‘시작되지 않은 우기’에서 한가롭게 태국을 즐겨왔는데, 앞으로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해졌다. 계획으로는 카오락을 떠나 동쪽 바다 섬 꼬 따오Ko Tao로 스쿠버다이빙을 가려했다. 그런데 비가 계속된다면 물속 시야가 안 나올 텐데. 안 그래도 섬이 인기가 많아지면서 물이 많이 탁해졌다고도 했다. 꼬 따오는 해가 쨍쨍할 때 가고 싶었다. 이미 우기의 바다는 투명하지도, 반짝이지도 않는다는 것을 경험해 왔기 때문에. 엘 니도에선 스노클링 하다 컴컴한 바다까지 맛본 걸. 그런데 꼬 따오는 니콜라스가 꼭 가고 싶었던 곳 중 하나였다. 친구에게 스쿠버다이빙 정보까지 확인해가며 기대했던 터인데.


“윤혜, 꼬 따오에 갈 돈으로 그냥 여기서 푹 쉬는 게 어때?” 그도 고민이 되었나 보다.


“그러자. 꼬 따오에 가면 분명 의미는 있겠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기대한 만큼 실망할지도 몰라. 물가 비싼 꼬 따오까지 배 타고 가서 돈 많이 써 봤자 비가 내리겠지. 후회할 거야.”


“그래, 대신 여기서 더 재미있게 노는 거야. 후회 없이!”


우린 쿨하게 다음 행선지를 포기했다. 대신 리조트를 며칠 연장하고, 내일도 또 마사지를 받기로 했다. 어떻게 재미있게 놀까, 궁리하다 서로 재밌게 본 영화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는 액션이나 기승전결이 분명한, 전개에 힘이 있는 영화를 좋아하는 전형적인 남자였고 나는 별일 없이 말만 많거나 엄청나게 빙빙 꼬아서 몇 번이고 생각해야 하는 영화를 좋아했다. 잔인한 장면에 무감각한 그와 달리 나는 극도로 꺼렸다. 그가 제임스 카메론의 <아바타>, 마틴 스콜세지의 <셔터 아일랜드>, 스티븐 킹 원작의 <그린 마일>에 감동받고 넷플릭스 <블랙 미러> 시리즈의 광이라면, 우디 앨런의 <미드나잇 인 파리>나 노아 바움백의 <프란시스 하>, 월터 살레스의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TvN <알쓸신잡> 팬이고 좋아하는 감독은 이창동인데 니콜라스가 알 리가 만무했다. 꼬리에 꼬리를 문 대화는 쿠엔틴 타란티노로 대동단결했다. 당연했다. 혈이 낭자하면서도 말은 엄청나게 많으니까. 한껏 잔인한 장면들을 유머와 치환하는 방식도 멋지고. 공교롭게도 둘 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를 거의 다 보았다.


<바스터즈 : 거친 녀석들>을 틀었다. 니콜라스와 사귀기 전 위스키를 마시며 이 영화에 대해 얘기한 적 있다. 독일 스파이로 위장한 영국 장교가 맥주 세 잔을 주문하며 숫자 3을 영국식으로 편 순간 독일 장교의 흔들리던 눈빛을 기억하냐고. 아슬아슬하던 줄을 툭 끊어버리는 순간의 쾌감. 오늘도 여전했다. 브래드 피트의 남부 억양도 여전히 유쾌했고 크리스토퍼 왈츠의 우아한 불어엔 니콜라스의 평가가 곁들여졌다. 그렇게 깜깜한 방, 나무 바닥은 어슴푸레 랩탑 빛에 빛났다. 그렇게 나무 침대 흰 침대보 이불을 둘러 쓰고 세계 2차 대전 이야기를 보았다. 총소리가 멈출 때면 어둔 밖 빗소리가 들렸다.


ⓒ Yoonhye Jeon

여행이 끝나면 쿠엔틴 타란티노와 마틴 스콜세지의 영화를 하나씩 돌려보기로 했다. 아무리 취향이 달라도 분명 어딘가에는 회색 지대가 있다는 걸 깨닫는다. 끊임없이 묻고 얘기하다 보면 언젠가는 다다르는 곳. 아, 오늘의 회색 지대는 그냥 모두가 좋아할 수밖에 없는 ‘잘 만든’ 영화다. 그렇게 비 잘 오는 날 잘 만든 리조트에 도착해 잘 하는 마사지를 받고 잘 수영한 다음 잘 만든 영화를 보았네. 음, 한바탕 잘 놀았군. 비 오는 게 대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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