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모험의 시작

태국 방콕, 빅 모터바이크를 빌리다

by 전윤혜


“창밖 풍경만 바라보며 갈 거야?”


모험은 언제나 간단한 명제로부터 시작된다.


“윤혜, 우리 모터바이크를 타고 가자. 가고 싶을 때 가고 쉬고 싶을 때 쉬는 거야. 예쁜 마을이 나오면 그곳에서 머물고.”


팔라완 섬에서 모터바이크를 빌리자고 설득하던 말과 똑같다. 그런데 니콜라스, 그때 길은 6시간짜리였지만 여기는 9시간, 것도 고속도로를 쉬지 않고 달렸을 때 9시간이잖아. 방콕에서 치앙마이. 남들은 1시간 타는 비행기를 고민할 때 우리는 9시간짜리 옵션을 염두에 두다니... 그때 겪었던 엉덩이 깨질 듯한 고통이 떠올라 미간을 살짝 찌푸린다.


“이번에는 정말 크고 편한 모터바이크를 빌리는 거야. 내가 보장할게. 네게 진짜 모터바이크를 타는 느낌이 어떤 건지 알려주고 싶어.”


니콜라스는 탈 것 마니아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열다섯 살 되던 해 스쿠터를 사주었다. 학교를 마치면 태권도 학원을 땡땡이치고 칸의 해안 도로를 달리는데 온통 시간을 보냈다. 함께 스쿠터를 몰던 친구는 지금 탑기어 프랑스의 유명한 라이더가 되었단다. 니콜라스는 직업으로 차를 몰고 여가로 모터바이크 라이딩을 즐긴다. 그런 그가 호주에 온 이후로 아무것도 몰지 못했으니... 얼마나 답답했을까.

불안정한 도로에서의 기동성에 초점을 맞춘 가벼운 모터바이크. 혼다 Honda XR150. ⓒ Yoonhye Jeon

그러다 팔라완 섬에서 처음으로 모터바이크를 빌렸다. 150cc짜리 혼다 오프로드용 트레일러Honda XR150. 우리가 그 섬에서 구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최고 속력은 130km/h까지도 나온다지만 두 사람 무게에 도로 사정까지 고려하니 100km/h도 감지덕지였다. 스쿠터에 비해선 당연히 훨씬 나았지만, 1,200cc를 몰던 사람이 150cc를 몰려니 오죽했겠나. 니콜라스에게 팔라완 섬 북부 일주는 그저 내게 ‘모터바이크란 어떤 것인가’ 경험시켜주는 정도였지, 그것이 진짜 그가 꿈꾸던 로드 트립은 아니었다. 물론 내게는 인생 최초의 오프로드 고생 트립이었지만 말이다. 태국에 도착한 뒤 종종 커다란 모터바이크를 발견한 그는 희망을 품기 시작했다. 어딘가 빅 모터바이크를 빌려 주는 곳이 있을 거란 희망. (그가 빅 모터바이크를 나누는 기준은 500cc다. cc는 엔진의 사이즈를 나타낸다. 정확하게는 엔진에 들어가는 연료와 공기의 용량. cc가 클수록 파워풀하다는 공식이 항상 성립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 같은 초보에게는 좋은 길잡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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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눈을 떼지 못해서야... ⓒ Yoonhye Jeon

방콕의 모터바이크 렌털 샵을 알아본다. 구글을 뒤져보지만 대부분 스쿠터 렌털이다. 태국에 온 여행자들은 특히나 스쿠터를 많이들 빌린다. 장기 대여 시스템이 잘 정착돼 있어 한 달, 세 달, 길게는 일 년까지 빌리는 사람도 있다. 하루에 250밧(약 9,500원), 한 달 이상 빌리면 대폭 할인까지 되니 웬만해선 대중교통을 타는 것보다 낫다. 방콕의 살인적인 교통체증을 돌파하기도 좋고, 근교 도시도 고생 없이 돌아보기 좋으니까. 그래서 한 번 스쿠터를 빌린 여행자들은 대중교통으로 돌아가기 어렵다. 스쿠터 렌털이 성행할 수밖에. 그에 비해 모터바이크는 가격도 운전도 부담스러운 수단이긴 하다.


세 시간 정도 떠돌다 샵을 하나 발견한다. 깔끔한 홈페이지에 스쿠터는 ‘시티 바이크City Bike’, 빅 모터바이크는 ‘투어리스트 모터바이크Tourist Bike’로 따로 분류하고 구비한 모델도 실용적이다. 보험 설명까지 깔끔. 무엇보다도 모터바이크로 가볼 만한 태국의 루트를 모아놓은 모습에 우리는 느낀다. 아, 이 사람 모터바이크 애호가구나. 여기로 가야겠다. 샵은 카오산로드에서 남동쪽으로 한참 떨어진 프라 카농Phra Khanong 있다. 샵은 7시에 닫는데 이를 어쩌나, 지금 시각 6시. 얼른 출발해야 한다.


“프라 카농까지 얼마예요?”


툭툭 아저씨들은 고개를 내젓는다. 하긴, 그 시간에 가까운 관광지에 두 번 가는 게 나으니까. 옆에 선 퀵서비스 아저씨들이 흥정한다. 한 명씩 따로 타야 한다고, 600밧, 700밧(약 23,000~27,000원)을 부른다. 우리의 거절에 돌아서는 아저씨들 뒤에서 한 분이 따로 나온다. 둘이 같이 타는 것으로 300밧(11,500원) 딜. 한꺼번에 태워준다는 것만으로 감지덕지인데 가격도 합리적이다. 문제는 퇴근 시간과 겹쳐 1시간 이상은 걸릴 것이란다. 샵에 전화해 자초지종을 설명하자니 듣고 있던 아저씨가 전화를 바꿔 직접 양해를 구해 주신다. 고맙다.


첫 방콕 도로 체험. 퇴근길 방콕은 말 그대로 지옥이다. 아저씨는 조금 덜 막히는 길로 돌아가겠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고가도로에 올랐다 내렸다, 막힌 차 사이를 뚫고 지난다. 제일 뒤에 아슬아슬하게 엉덩이를 걸치고 앉은 나는 스쿠터가 움직일 때마다 니콜라스의 허리를 꽉 붙잡는다. 커다란 트럭 옆을 왜앵 스칠 때는 오금이 찌릿 저릴 정도. 하천을 몇 번 건너고 주민들에게 물어물어 외진 골목에 있는 샵에 도착한다. 해가 져 푸르스름한 골목길에 하얀빛이 새어 나온다. 6시 50분. 다행히 아저씨 덕에 일찍 도착했다. 잔돈이 없어 옆 슈퍼에 가서 잔돈을 바꿔 오는 아저씨에게 얼마간 팁을 드리고 거듭 고맙다 인사하고 안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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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콕의 퇴근길. ⓒ Yoonhye Jeon

밖에서 볼 때는 작은 가게 같았는데, 안에 들어서니 모터바이크가 열 대는 족히 서 있다. 우리가 생각했던 이 샵의 가장 상위 모델 가와사키Kawasaki의 베르시스Versys 650이 마침 없어서, 그다음으로 무난한 혼다의 CB500X를 빌린다. 실망한 표정이 역력한 니콜라스. 속도감은 덜하지만 대신 편안한 모델이라며 애써 자위한다. 큰 모터바이크를 타는 것만으로도 어디냐며. 다행히 가격도 조금 내려간다. 한 주에 9,000밧(약 342,000원). 보증금 5,000밧(약 190,000원)과 합하니 14,000밧(532,000원). 그동안 쫌생이처럼 아껴왔던 돈을 다 털어 넣는다. 현금도 카드도 모자라 페이팔까지 동원하면서. 하고 싶은 것엔 과감히 쓰는 게 그의 스타일이다. 직원이 어디론가 전화를 하고 15분쯤 지났을까, 부릉부릉 하고 사장님이 도착한다. 우리가 빌리려는 모델을 타고 말이다. 본인이 쓰던 모양이다.


마크는 젊고 키가 큰 미국인이다. 태국에 온 지 15년이 됐고 가게를 연 지는 7년, 작은 스쿠터부터 큰 여행용 모터바이크까지 두루 구비해 여행자들에게 대여해주는 걸 자랑스럽게 여긴다. 나는 그가 타국에서 7년 동안 이렇게 깨끗하게 가게를 운영해 온 것이 더 존경스럽다. “어디로 가느냐” 묻기에 “치앙마이까지 가기로 했는데 아직 어떻게 갈지 정하지 않았다” 하니 마크는 조심스레 국도를 타 보라고 제안한다. 펫차분Phetchabun으로 러이Loei 가는 길이 참 아름다웠다며, 양옆으로 커다란 산을 두고 논을 달리던 기억과 러이 호수의 보트 가옥에서 머무른 귀여운pretty cute 경험도 들려준다. 우리는 직감한다. 이 모터바이크 트립은 일주일로 끝나지 않을 거라고.


“듣다 보니 혹시 한 주 더 연장할지도 모르겠어요. 언제까지 알려 드리면 될까요? 가격은 연장한 만큼 더 할인될까요?”


“어차피 지금 로우 시즌이라 찾는 사람이 별로 없어요. 맘껏 타다가 다만 돌아만 와 주세요. 하하. 돈은 그때 정산하면 돼요.”


당연히 탄 기간만큼 할인되고, 나중에 차액만 더 내면 된단다. 우리가 늦게 알려서 혹시나 다른 고객을 놓칠지도, 그렇게 되면 한두 푼 손해가 아닐 수도 있는데. 쿨해라. 그동안 여행 사업자들의 불신과 술수에 너무나 지쳐왔던 우리는 자잘한 것에 따지고 불안해하지 않는 그에게 더욱 신뢰가 간다. 그도 우리를 믿는단 뜻이니까. 어쩌면 이것이 니콜라스가 닳도록 말하던 모따(Motard, 프랑스어로 모터바이크 타는 사람)의 방식인지도 모르겠다. 모따는 모따를 알아보는 법.


직원이 이것저것 장비를 찾는 사이 잠깐 이야기를 나눈다. 마크는 매년 겨울 스키를 타러 한국에 간다. 동남아에서 스키 타러 가기 가장 편한 나라가 한국이기 때문이란다. 그렇겠구나. 또 하나 배운다. (모터바이크 빌리러 와서 가평 알펜시아 이야기를 듣게 되다니. 세상 참!) 덩달아 미국인인 그에게 한국 음식점 추천까지 받는다. 근처에 엄마가 하는 것 같은 귀엽고 작은 식당이 있다며.


헬멧과 휴대폰 거치대와 짐을 넣을 22리터짜리 사이드 케이스 2개와 뒤에 얹을 45리터짜리 레어 박스를 받는다. 이 정도면 우리 짐도 다 들어가겠다. 타이어 공기압을 맞추고 시동을 건다. 커다랗게 부릉- 소리를 내는 모터바이크에 앉는다. 작은 스쿠터만 타던 내게 이 모델은 너무 크고 편안하다. 아, 빅 모터바이크라는 게 이런 느낌이구나. 넓고 평평한 안장. 중후한 사운드. 사장님은 주차된 모터바이크 중에서 하나를 골라 앉고 직원을 뒤에 태운다. 우리 때문에 퇴근이 한 시간이나 늦어진 직원을 태워줄 모양인가 보다. “고맙습니다. 잘 다녀올게요!” 직원은 치앙 라이의 산이 정말 아름다웠다는 말을 잊지 않는다. 우리는 방콕에서 출발해 멀지 않은 아유타야를 거쳐 사장님이 추천한 펫차분과 러이를 거쳐 직원이 추천한 치앙 라이, 그리고 우리의 어렴풋한 목표였던 치앙 마이를 둘러갈 생각이다. 그새 커다란 지도가 그려진 거다. 그렇게 우리 모험의 목표는 하루새 ‘치앙 마이 가기 아니라, 태국 북부 일주로 바뀌어 버렸다.


돌아가는 길. 니콜라스는 이 큰 덩치를 타고도 요리조리 차들을 잘만 피한다. 장난스레 밟는 엑셀에 순식간에 올라가는 속도. 뱃속이 간지럽다. “히히히” 바보 같은 웃음이 난다. 부릉, 부릉, 부와앙- 니콜라스는 몇 차례나 모터바이크를 가속하며 나를 골리고 나는 여전히 실실 댄다. 기분 탓일까, 스쿠터로 돌아돌아 오던 퇴근길이 그새 시원하게 뚫려 있다. 불 들어온 왕궁이 너무 아름다워 한참을 서서 구경한다. 사진 찍는 내게 다가오는 툭툭 아저씨. 나는 아무 말 없이 우리의 모터바이크를 가리키고 씩 웃는다. 그 모습에 서로 크게 웃다 달려가 꼬옥 안는다. “모험의 시작을 축하해.” 내일부턴 또 어떤 일이 펼쳐질까, 설렘과 걱정과 감사함에 마음이 찌르르하다. 어째 좀 감동적이려 했더니, 그새 길을 헷갈려 한밤중에 짜오프라야 강 다리를 네 번이나 넘어 버린다. “윤혜, 이건 맛보기야! 진짜는 내일부터!” 뭐가 내일부터라는 거야. 정말 기대되는 걸.


왕궁 앞에서 모타(Motard) 사인 보내며 한 컷. 니콜라스 바지는 안 입은 게 아니라 말려 올라간 거래요. 하하 ⓒ Yoonhye J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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