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 스승님께 배운 가르침
섣달 그믐날쯤이 되면 늘 마음 한편에 법정 스님의 '섣달 그믐날'이란 수필이 떠오릅니다.
수필집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에 실려있는 글입니다.
정확한 내용은 기억이 안나도, 섣달 그믐날을 맞아 부지런히 한 해 묵은 청소를 하고 스스로를 위한 호젓한 시간을 내는 호사를 누리던 법정 스님의 이미지만 남아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이 책을 꺼내어 원문을 다시 읽어봤더니,
앞부분의 청소 부분 빼고는 제 기억이 전혀 다르더군요. 역시, 기억이란....)
그래서 섣달그믐께쯤에는 괜히 묵은 청소를 해야 할 것 같은 마음이 한 번씩 드는데 올해는 정말 대대적인 대청소를 했습니다.
워낙 어릴 때부터 갖고 있던 짐들을 한꺼번에 정리하다 보니, 사람이 지구에 태어나서 이렇게 많은 흔적들을 남기고 있구나 싶기도 합니다.
사진을 잘 찍지 않는 편이라,
그나마 예전에 찍어뒀던 사진들은 증명사진 토막들까지도 좀 챙겨뒀고,
어느 나라에서든 꼬리처럼 따라온 동전들도 모아두고,
문구들을 정리하다가 고등학생 때 썼던 자를 발견하고 기쁘기도 했습니다.
가장 많은 짐은 역시 책.
언제 필요할지 몰라서 못 버리던 책들.
그렇게 망설이던 사이 chatGPT 같은 인공지능이 나와서 완전히 유효기간이 다 되어 드디어 버릴 수 있는 책들이 꽤 있긴 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지금 보고 싶은 마음은 별로 없는데,
이제 절판되어 출판사가 찍어주지 않는 책들은 버리지 못하고 모아두기도 합니다.
뭐든 책으로 배우는 편이라,
어떤 한 분야를 공부하겠다면 일단 책부터 사뒀는데,
또 그 분야의 일들이 아직 매듭을 짓지 못해서 가득 쌓여있는 책들은 여전합니다.
책들을 못 버리는 이유는 책에 대한 소유욕 때문은 아닙니다.
지식에 대한 소유욕은 있지만,
쓰임이 다한 책은 마음껏 버리는 게 소원입니다.
다만, '쓰임이 다했나'에 대해 스스로 우유부단하게 미뤄뒀던 일들이, 일부는 시간이 지나면서 세상이 변하며 저절로 해결된 것 같습니다.
대신 또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야겠지요.
이렇게 많은 흔적들을 정리하다 보니,
명상 스승님께 배운 가르침이 또 하나 떠올랐습니다.
아직 마음의 눈과 육체의 눈이 통합되지 않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물리적으로 남겨놓은 흔적만 볼 수 있지만,
마음의 눈과 육체의 눈이 온전히 통합된 분들은
매일 사람들이 남겨놓은 생각의 찌꺼기, 흔적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저야 아직 통합의 과정에 있기 때문에 누군가의 찌꺼기를 통합된 육안으로 직접 보지는 못하지만,
저희 스승님 같은 경우 누군가가 왔다간 흔적,
혹은 수련이 끝나고 간 자리 등에서도
그 사람이 남기고 간 흔적을 볼 수 있다고 하십니다.
(이건 제가 직접 볼 수 있는 경지가 아니어서 어떤 상태인지 모르겠네요.)
다만,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석가모니의 가르침 하나를 한 번씩 강조하십니다.
(원문은 수련하는 곳에 붙어있는데 정확한 워딩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나중에 다시 알아와서 수정할게요~^^;)
석가모니께서 말해도 말하지 않고, 행하면서도 행함이 없는 상태를 강조하는 취지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이론적으로 사람이 온전한 통합의 상태, 즉 절대성의 경지에 이른 진동수를 유지하면
우리는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습니다.
그 상태에 머물러 말하고 행하면,
말하면서도 말함이 없고
행하면서도 행함이 없는 상태가 됩니다.
즉, 온전한 절대성의 경지에서 통합될 것을 강조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대부분은 절대성의 찰나에 들기도 어렵고,
고도의 집중력으로 절대성의 찰나에 드는 순간이 아주 가끔 있어도
그렇지 않은 시간은
탐진치, 불안, 공포,
그리고 자아가 만든 호불호 속에 갇혀
아직 통합되지 않은 상태의 진동수에 머무릅니다.
이 상태에서는 필연적으로 우리는 우리가 보지 못하는 사념의 찌꺼기들을 남기고 있다고
스승님은 말씀하십니다.
고양이나 아기들이 숨바꼭질할 때, 자기 눈만 가리면 안 보일 거라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듯이,
우리가 아직 눈뜨지 못해서 안 보일 뿐,
이런 사념의 찌꺼기들은 그냥 남습니다.
그러니, 스스로에게 거짓 없는 삶을 살면서
지구에 온 우리의 숙제인 온전한 통합을 향한 하루하루를 살아내야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