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의 도움을 크게 받으며 살고 있지만, 특히 요즘은 명상 수련을 오랫동안 해왔던 게 정말 다행이다 싶습니다.
처음 시작은 별생각 없이 가볍게 접했지만, 지금 돌아보면 저의 내면의 힘이 이번 생에 명상 수련에 인연이 닿도록 적재적소로 이끌어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첫 인연은 요가였습니다. 학창 시절 TV 만화에 등장하던 요가는 터번 쓴 인도 사람이 가부좌 틀고 앉아있던 모습이라 나와 전혀 상관없는 세계라 생각했는데, 우연히 요가로 다이어트에 성공했다는 책을 읽고 요가를 시작했습니다. 마침 그곳 요가는 동작 중심의 아사나는 기본적인 것만 하고 요가 호흡과 명상을 강조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명상을 접하게 되었지요.
이후에도 인연이 닿는 대로 명상과 수련의 언저리에서 뭔가를 해오고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인연이 다하면 다른 인연으로 이어졌습니다. 막연한 지향점은 있는데, 도대체 뭘 어떻게 하며 살아야 하는지 잘 모르다 보니 끊임없이 뭔가를 배우고자 했습니다. 물론 그 순간에는 최선의 선택이고 인연이었겠지만, 늘 그 뒤에는 ‘여기보다 어딘가에’ 내가 원하는 답이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 답에 대해 더 이상 다른 곳으로 갈 필요가 없다고 느낀 건 지금의 스승을 만난 이후입니다. 여러 인연을 거쳐오긴 했는데, 결국 첫 요가를 시작한 곳의 인연과 이어졌더라고요. 이 분과 인연이 닿은 것도 신기했습니다.
요가 수련을 하던 어느 날, 제 몸이 예전과 같은 호흡 수련을 강하게 원하는 걸 알았습니다. 그래서 지금 사는 곳에서 호흡 수련이 가능한 곳을 찾다가, 근처의 다른 요가원을 찾았는데 그곳도 우연이 겹치더라고요. 처음 요가를 시작했던 곳의 지도자 과정을 나보다 먼저 이수했던 선배 강사님이 운영하는 곳이었어요. 지금 살고 있는 곳이 전혀 다른 지역이어서 의외의 우연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요가 선생님을 통해 지금의 명상 스승님으로 인연이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명상 스승님은 그날 저를 만난 적도 없는데, 그즈음 앞으로 제자가 될 사람이 찾아올 것을 알고 계셨다고 하더군요.
지금의 스승님은 온전한 통합에 이른 분입니다. 그걸 제가 어떻게 아느냐고요? 사실 모릅니다. 이걸 알려면 제가 온전한 통합에 이르러야 확인이 가능합니다. 대신 온전한 통합에 이른 분들끼리는 그걸 알 수 있습니다. 불교 전통에도 온전한 통합은 이미 통합에 이른 스승의 확인 과정이 들어있습니다.
온전한 통합에 이른 스승 중 한 분인 진제 스님의 ‘마음을 열어 빛을 보다’ 책 앞부분에도, 눈 밝은 선지식의 확인이 꼭 필요하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저의 스승도 눈 밝은 선지식의 인가를 받은 분입니다. 10여 년 전, 온전한 통합에 이른 영적 스승 몇 분께서 입적하셨는데, 그중 한 분입니다. (저는 종교가 없어서 뒤늦게 알았지만, 조계종의 큰 스승 중 한 분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걸 판단한 능력은 안되고, 저는 그저 ‘그렇겠구나’ 하고 가르침을 받는 중입니다. 다만, 지금껏 수련을 하며 내가 겪었던 많은 명상 반응들, 동서고금 시간의 무게를 버티고 살아남은 지혜들과 스승의 가르침이 여태껏 모순되지 않기에 제가 경험한 바에 한해서는 확신을 갖습니다.
아직 이해가 가지 않거나 의문이 든 부분은 제가 경험으로 알 때까지 판단을 유보하며, 스승의 가르침을 무조건적으로 따라가지는 않습니다. 이건 수련을 하는 사람으로서 반드시 매 순간 스스로 살펴 밝은 지혜를 좇을 책임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스승이 쓰는 단어를 내가 같은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명상 수련에 진척이 있으면서, 지금껏 흔하게 써왔던 단어들이 세밀하게 살펴보면 엄청나게 달라질 수 있다는 것에 아직도 놀랍니다.
이런 저의 스승께, 온전한 통합에 이르면 뭐가 좋냐고 물었던 적이 있습니다.
스승님은 ‘알고 사는 것과 모르고 사는 것은 천지차이다.’란 취지의 답변을 주셨습니다.
속세에서 써먹을 만한 신기한 초능력을 기대하던 제게는 좀 김 빠지는 대답이었습니다.
(사실 자신이 가용할 수 있는 에너지 레벨에 따라 마음먹고 신기한 기술을 훈련할 수는 있습니다. 다만 굳이 할 필요가 없기에 저의 스승님도 과거에는 신기해하다가 내려놓은 것도 많다 하시고, 제게도 일단 통합에 이른 후에 기술은 얼마든지 연마할 수 있으니 지금은 딴 길로 새지 말고 통합에만 집중하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안다’의 의미는 온전한 통합에 이르렀을 때 알 수 있는 레벨입니다. 사실 저도 그 단계에 이르렀을 때 다른 사람들에게 글을 써서 공유하고 싶었는데, 그러면 너무 늦을 것 같습니다.
또 한 가지 문제가 생깁니다. 지식의 저주처럼, 제가 너무 많은 것을 알게 되면 알지 못하는 사람의 상태를 오히려 이해하지 못하는 단계라 덜 효과적으로 전달될 것 같기도 합니다. 지금도 이미 온전한 통합에 이른 분들의 선지식 책들은 시중에 나와 있지만, 그걸 우리가 제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니까요.
(자신이 그 책들을 읽고 ‘이해하고 안다’고 생각하면, 그 책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저의 스승님을 비롯해서 온전한 통합에 이른 분들이 말하는 ‘뜻을 알라’는 말은 일정 수준에서 보이는 명상 반응입니다. 머리로 이해한 듯해도 실제로 그 단계의 명상 반응을 보이지 못하면 모르는 것입니다. 이건 직관과도 다릅니다. 저도 직관은 꽤 발달한 편이지만, 스승님은 ‘느낌만으로는 안된다. 직접 보고 뜻을 알아야 한다’를 지금껏 강조하십니다.)
비록 온전한 통합에 이른 분들이 보는 ‘아는 세계’와는 다르지만, 그래도 지금껏 명상 수련을 하면서 알게 된 것들이 있습니다. 어차피 현실 세계에서 하루하루 통합을 이뤄나가야 하는 입장에서는, 내가 어떻게 중심을 잡고 가야 하는지 아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됩니다.
‘안다는 것’이 밥을 먹여주는 것도 아닌데, 가만 보니 이 별거 아닌 사실이 인생의 질을 크게 좌우하는 것 같습니다.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불확실함이니까요. 특히 인생이 뜻대로 되지 않는 것 같고, 세상이 너무나도 부조리하게 느껴질 때는 더욱!
지금껏 명상 수련을 해오며 가장 근본적인 두 가지 전제를 정리해 봤습니다. 적어도 현재까지는 이 기준으로 명상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데 모순이 없고, 명상의 신비주의에 대해서도 중심을 잡고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이해한 바를 대체로 스승님께 다시 확인을 받기도 했고, 큰 틀에서는 제대로 이해했다고 하셨습니다. (다만 저의 단어와 스승님의 단어가 여전히 같은지는 의문이기에, 제가 경험한 바에 한해서만 정리하고, 나중에 저의 명상이 더 깊어지면 또 다른 인식이 생길 수 있다는 걸 전제로 합니다.)
첫째. 우리 삶의 목적은 내면과 나의 온전한 통합이라는 것입니다. 이건 명상 수련과 상관없습니다. 그냥 내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온전한 통합을 위한 계기가 됩니다. 다만 명상을 하면 온전한 통합 자체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에, 삶에서 겪어야 할 시행착오의 기간을 줄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저 즐겁고 편안한 상태에서는 비약적 발전이 없듯이, 불편한 지점들이 통합의 계기가 됩니다. 내가 충분한 통합에 이를 때까지 배워야 할 것들을 배우지 못하면 비슷한 일들이 반복되기도 하고, 스스로 내면의 에너지를 높여 곧바로 통합을 이뤄내면 그 기간과 강도가 줄어들기도 합니다.
오해하지 말 것은, 그렇다고 현실의 삶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우리 삶의 목적은 ‘온전한 통합’입니다. 내면에 치우쳐 있는 것도 아니고, 현실에만 치우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면 수련에 너무 집중하다 보면 이 부분을 놓치는 경우가 종종 보이거든요. 현실의 삶은 현실대로 밝은 지혜를 따르며 실천하며 살아야 하고, 내면의 힘도 통합시켜야 합니다.
둘째. 내가 이를 수 있는 통합은 나의 내면과 얼마나 연결되었느냐에 달렸다는 겁니다. 처음 지금 스승을 만날 때, 스승님은 ‘저 친구 명상 진척이 빠를 건데...’라고 예상을 했었다더군요. 그리고 5-6년 간 저도 놀랄 정도로 ‘내가 이런 지점까지 닿을 수 있나?’하는 반응들이 계속되었습니다. 지금은 더 높은 레벨로 가기 위해 에너지를 많이 모으는 중인지, 예전만큼 드라마틱한 변화를 겪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종종 스승님께 확인받은 바에 의하면, 예전보다 특정 에너지 레벨에 들어갈 수 있는 시간이 훨씬 빨라졌고, 내면의 진척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명상 수련을 하는 사람들의 고민이기도 한데, 열심히 한다고 해서 내가 어느 지점까지 갈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이건 나의 의식적 힘만으로 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나의 내면이 이끌어주는 것이고, 그만큼 이어지기 위해서는 무의식 정화가 필수적이라 생각합니다.
궁극적인 통합의 지점에서는 나의 의식이 내면의 힘의 주인이 되어 이끌고 나가야 합니다. 이 단계에 미치지 못한 많은 신비주의자들이 내면의 힘에 무조건 종속되는 한계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일정 수준까지는 보통 내면의 힘이 의식적 자아보다 에너지 레벨이 높고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의식적 자아의 교만함을 내려놓고 겸허해지되, 내면의 힘에 절대적으로 내맡겨서도 안됩니다. 언젠가는 내가 주인이 되어 내면의 힘을 이끌고 갈 만큼 밝은 지혜로 통합될 것을 지향해야 합니다.
저는 이 두 가지 전제조건을 받아들이고, 세상을 거의 전부 명상의 관점으로 이해합니다. 이건 명상으로 치우친 게 아니라, 그만큼 현실의 세계를 내면 에너지와 결부시켜 매 순간 알아차리는 훈련을 해온 까닭입니다.
그 결과, 뜻대로 되지 않는 인생의 많은 순간들을 그저 묵묵히 통과할 힘이 생겼고, 한강작가의 질문처럼,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우면서도 동시에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는’ 부조리한 세상을 살아가는데 큰 중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명상이 어떻게 삶을 바꿨는지에 관한 개괄일 수 있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