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직이는 명상, 태극권 효과
이 글을 <창의성책 3000권 읽어보았습니다> 매거진용으로 쓸지, <2580일 아무튼 태극권 가족> 매거진용으로 쓸지 고민하다가, 태극권 수련의 효과를 좀 더 강조하는 방식으로 쓰기로 했다.
창의성책을 3000권 이상 읽은 것도 책의 권수를 좇기 위함이 아니었다. 누구나 어릴 때 갖고 있다가 대부분 끊어지다시피 한 창조적 직관을, 어떻게 하면 성인이 되어 되살리고 더 튼튼하고 건강하게 자라게 할 수 있을까 답을 찾는 여정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어렵게, 후천적으로 많은 노력을 들여 창조적 직관을 되살렸다고 생각한다. 지금의 나는 이렇게 함께하는 내면의 창조적 직관이 삶의 중요한 순간마다 나를 보호하며 함께하고 있다고 믿는다. 스스로 내면에서부터 우러나는 믿는 구석이 있다는 건 이루 말할 수 없이 든든하다. 혼란스럽고 흔들리기 쉬운 세상을 살아가는데 중심을 조금 더 잡을 수 있다. 가끔 예기치 않게 찾아오는 어려운 순간에 내면의 믿는 구석에 기댈 수 있다.
창조적 직관을 되살리기 위해 두 가지 큰 축을 활용했다. 하나는 창의성 책을 읽고, 미학, 예술을 접목한 연구를 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명상을 활용하였다. 명상하는 방법을 배우면, 일상의 많은 순간을 명상 상태로 보낼 수 있다. 뒤집어 말하면, 많은 순간을 명상의 기회로 삼을 수 있다. 매일 아침 수련한 지 10년 차에 접어든 태극권도 움직이는 명상의 순간이다.
줄리아 카메론의 <아티스트 웨이, 마음의 소리를 듣는 시간>은 (세상의 모든 소리에 귀 기울여 나를 바꾸는 법)이란 부제를 달고 있다. 이 책이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라 있는 것은 한동안 지켜봤는데, 최근에서야 살펴볼 기회가 있었다.
줄리아 카메론의 <아티스트 웨이>는 결국 명상을 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마인드풀니스를 이야기하며, 저자는 그중 '듣기'를 많이 강조하고 있었다. 저자의 듣기는 경우에 따라 의미가 확장되기도 한다. 물리적 감각인 청각을 통해 오감을 더욱 확장시키는 맥락에서 활용하기도 하고, 비유적으로 내면의 소리를 들으라는 방식으로 쓰기도 한다. 현재에 집중하면서 몰입하는 것, 에고의 이성적 작용은 내려놓고 오감을 활성화시키는 마인드풀니스 상태는 창조적 직관을 되살리기 위해 꼭 필요하다. 예술 작업이 창조적 직관을 되살리는데 도움이 되는 이유도,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마인드풀니스 상태에 들기 때문이다.
저자는 특히 눈을 뜨자마자 아직 몽롱하여, 잠과 경계에 있는 45분 정도의 시간을 활용하여 모닝페이지를 쓸 것을 강조한다. 세 페이지 정도, 아무런 틀을 두지 않고 자유롭게 내면에서 올라오는 생각과 감정을 솔직하게 적는 것이다. 이 활동의 효과를 저자는 마법에 가깝게 강조하고 있다. 사실 글을 쓰는 행위의 효과도 있지만, 그 마법의 힘은 내면의 창조적 직관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도 모닝페이지라고 의인화해서 표현하다가, 한참 뒤에는 '모닝페이지를 통해 경험하는 힘'이라고 책에서 표현하고 있다. 저자가 어찌나 마법의 시간으로 모닝페이지를 쓰는 시간을 자랑해 놓았는지, 일어나자마자 안 쓰면 안 될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당분간 눈뜨자마자 45분의 시간을 모닝페이지 쓰는데 쓸 것 같지는 않다. 그 시간을 움직이는 명상의 시간인 태극권으로 쓰기 때문이다.
태극권 수련은 6시 30 분부 터지만, 눈 뜨는 시간은 5시 30분 전후다. 차로 15분 정도 거리의 수련장에 가기에 별다른 준비를 안 하는 것 같은데, 아주 기본적인 나갈 채비만 해도 이상하게 시간이 좀 필요하다. 직장인들이 눈뜨면서 오늘 출근하지 말까를 보통 고민하지 않는 것처럼, 일단 태극권 수련을 간다.
태극권 수련 동안, 태극권을 먼저 한 번 하고, 그 이후에는 무당파 기공류들을 하고, 여건 되는대로 태극검, 태극도를 한다. 태극검과 태극도는 비교적 빠르게 해야 하고, 자칫하다가 다음 동작들을 놓치지 않게 신경 써야 하니까 그 자체만 신경 쓴다. 그런데 태극권이나 무당파 기공류는 좀 더 천천히 하는 편이라, 어떤 순간은 <아티스트 웨이> 저자인 줄리아 카메론이 말하는 '움직이는 모닝 페이지'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동작을 하면서 올라오는 생각들을 바라보기도 하고, 정리하기도 하고, 지금 막혀있는 문제들을 더 골똘히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다시 태극권 동작이나 집중과 몰입을 더 신경 쓰며 명상에 들어가기도 한다. 특별히 알 수 없는 짜증이 올라오거나, 안 좋은 기분이 들 때는 이 기분의 원인이 무엇인지 파악하기도 한다. 창작이나 기획 아이디어 고민이 있을 때는 그걸 붙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몸은 자연스럽게 태극권의 다음 동작으로 흘러가는 것을 의식한다. 한 번씩 더 깊이 단전주시 상태가 되는지도 확인하기도 한다.
태극권을 이런 시간으로 활용할 때, 모닝페이지보다 뛰어난 점과 여전히 모닝페이지의 역할이 필요한 부분이 있다. 모닝페이지보다 뛰어난 점은 천천히 몰입하는 움직임이 직관과 아이디어를 더 많이 자극한다는 것이다. 이는 산책의 효과와 비슷하다. 많은 사람들이 산책을 하면서 생각을 정리하기도 하고, 산책하는 동안 좋은 아이디어들을 많이 떠올리는 것과 같다. 앉아서 글을 쓰는 것보다, 적당한 속도로 움직일 때 더 창조적 아이디어를 많이 자극한다. 거기다 태극권을 할 때는 일반적으로 산책할 때보다 훨씬 깊은 상태의 몰입을 유도하니까, 더 깊은 창조적 직관과 접속을 시도한다고 할 수 있다.
또 좋은 점은 꼭 자고 일어난 45분을 활용할 필요가 없이, 하루 중 언제든 그 시간의 장점을 내 마음대로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티스트 웨이>의 저자가 눈 뜬 직후 45분을 강조한 이유는, 아직 이성이 완전히 활성화되기 이전, 내면 에너지와 접속하는 경계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명상, 움직이는 명상으로서의 태극권 수련, 현대최면 자격증 취득 등을 통해 꾸준히 수련을 하면, 하루 중 언제든 이 상태에 들 수 있다. 매일 꾸준한 수련을 통해 얻은 꽤 만족할만한 이득이다.
하지만 움직이는 명상으로서의 태극권이나 산책이 글을 직접 쓰는 행위를 완전히 대체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모닝페이지든, 자기만의 방식의 글쓰기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생각을 정리하거나, 아이디어를 잊어버리지 않게 기록하는 효과 이상이다. 예전에는 머릿속으로 정리만 되었다면 글쓰기를 생략해도 좋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그 생각을 바꿨다.
첫째. 글쓰기가 갖고 있는 마법의 힘은, 나의 머릿속이나 내면에 있는 것들을 물리적 현실로 끄집어내는 첫 번째 행위라는 데서 나오기 때문이다. 머릿속에 있는 것을 물리적으로 적어놓았을 때, 나의 내면에 미치는 힘의 작용이 다른 것 같다. 그러면 다른 마음가짐으로 다른 행동을 이끄니까, 결과적으로 다른 결과 (대부분 자기가 원하던 지점)에 이르게 된다.
둘째. 글을 쓰다 보면 처음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른 지점에 이르곤 하기 때문이다. 나의 의도가 원래 이랬나? 싶은 글로 가기도 하고, 글을 쓰는 도중에 잊고 있었던 다른 경험과 기억이 덧붙기도 하다. 이때는 내가 머릿속 밖으로 꺼내놓은 문장들이 마치 솜사탕을 굴리는 나무젓가락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 나무젓가락에 실처럼 설탕가닥이 붙어 점점 부피 큰 솜사탕이 된다. 머릿속에서는 여기저기 자유롭게 돌아다니던 생각들, 어딘가에 가라앉아있거나, 어디 놓아야 할지 모르던 생각들이 문장에 붙으면서 내가 미처 생각지 못했던 글의 형태로 완성된다. 그러면서 또다시 나의 삶을 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앞서 태극권 수련이 움직이는 모닝페이지 같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아침 태극권 수련할 때 완전히 생각이 정리되지 않아도 좋다. 단지 태극권 수련을 하며 한껏 몰입하며 발상의 씨앗만 깊이 심어놓아도, 뇌가 계속해서 자기 딴에 답을 찾는다. 그러다가 갑자기 떠오른 생각들로 어딘가에 기록으로 남기거나 정리해야겠다는 강한 욕구가 솟구칠 때 글을 정리하다 보면, 이전에는 정말 못 풀 것 같은 문제가 아하! 의 순간으로 풀리기도 한다.
그 순간을 느끼면 내면에서부터 '아, 이렇게 하면 되는구나'에 대한 확신이 든다. 그 확신이 자신감의 진동수를 만들어내고, 그 이후에는 내 눈앞에 들어오는 정보의 질이 달라진다. 그러면서 기회도 달라지게 된다.
창의성은 나의 일상을 온전히 이러한 '태도'로 살아가는데서 나오는 것이라 생각한다. 결국 삶을 살아가는 태도이지, 앉아서 훈련으로 갖추어내는 '기능'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