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월 moon Mar 07. 2024

감정의 허기짐

#다소무거움주의 #감정이바닥나기전 #두사람 #그럼에도결혼을장려합니다

연애를 시작하기 전, 우리 부부는 같은 고등학교 선후배였다.

두 살 연하인 남편은 내가 고3시절, 나를 감히 똑바로 쳐다볼 수도 없는 고1이었다.

노란색, 초록색, 하얀색.

학년별로 명찰의 색이 달랐다.

급식실로 가서도 명찰 색으로 학년을 구분했고, 고등학생 시절인지라 고3은 정말 어른으로 여겨졌다.

아니, 어른보다 더 높은 존재였다.


사실 나는 선명하게 기억이 없는데, 우리는 고등학교 수련회에서 같은 조였다고 했다.


(우리 부부는 미션스쿨을 졸업했다. 그 지역에서는 꽤나 유명한 학교였다. 지금은 너무나 후배님들이 훌륭하셔서 더 유명해졌다. 미션스쿨이기 때문에 전교생은 채플을 드려야 했고, 바로 옆에는 교회가 있었다. 우리 부부는 이 교회에서 나름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자랐다. 그 교회의 고등부에서 함께 수련회를 갔을 때 우리는 같은 조였던 것 같다.)


남편은 지금도 그렇지만 내향적인 사람이다.

내향인 중에 내향인.

그래서 밖에서 만나는 사람들과는 거의 사적인 대화를 하지 않는다.

인사도 쏜살같이 하고 지나가버린다.

집 안에서는 수다쟁이고, 잔소리쟁이지만 집 밖에서는 거의 입을 열지 않는 과묵한 남자다.


그런 그였으니, 고등학교 시절 내 기억에 있을 리가 없다.

같은 조였다고 하는데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몹시 미안하지만...

내가 외향인이었던 시절이다. 인생 최고의 방황 시절, 나는 아마도 정말 외향인 중에 외향인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얼굴을 아는 사이'로 지낸 시간이 5,6년이 흘렀다. '얼굴을 아는 사이'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이야기를 나누다 둘만 남게 되는 일들이 잦아졌다. 이상하게도.

그가 좋아하는 음악이 내게도 좋게 들렸다.

그 시절, 그의 싸이월드 배경음악은 내 mp3에 담겼다. 가장 즐겨 듣는 음악이 되었다.

그의 감정과 정서가 점점 더 내게 다정하게 전해졌다.






남편과는 달리 나는 건강하지 못한 가정에서 자랐다.

상당히 중립적인 표현이다. '건강하지 못한 가정'이라는 말은.

태어났을 때부터 아빠는 술을 너무나 즐거워하셨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 술로 인해 우리 가정은 산산조각 났다.

가정이 산산조각 났을 때, 우리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과 인생도 산산조각이 났다.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태어난 가정에서의 상처를 회복하고 보듬어 나의 삶을 진정으로 살아가는 데에는.

아직도 여전히 나는 5월을 좋아하지 않는다.

5월은 온 세상이 "FAMILY"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였을까. 남편이 5월만 되면 내가 몹시 예민해진다고 했다.

남편이 있어서 알게 되었다. 내가 5월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 부모님의 관계를 보며 자란 나는, 부부의 관계와 정서가 바닥나 있는 모습에 익숙하다.

남편과 아내가 각자 고단한 삶에서 서로에게 만족되지 못할 때, 두 사람의 공기는 차갑고 무거워지고, 어떠한 노력과 배려도 없이 예의와 존중은 이미 멀리 떠나보낸 채, 날 선 말들과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한다는 것을.
서로를 향한 감정과 정서가 점점 메말라만 갈 때 결국 서로를 어떻게 상하게 만드는지, 그 모습을 일상처럼 여기며 자라왔다.

서로를 바라보며 각자 감정의 허기짐만 느낀다면, 여자는 남자를 향한 원망과 분노만 쌓고 있는지도 모른다. 남자는 할 수 있는 힘껏 거리를 두고, 어느새 차가워진 맹수 같은 여자를 더욱 멀리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연애, 동거처럼 여차하면 돌아설 수 있고, 아니다 싶으면 떠날 수 있는 관계가 아니다.

그래서 세상이 지양하는 형태의 관계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결혼과 부부가.

그래서 결혼은 서로의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 수도, 천국으로 만들 수도 있다.

지옥 같은 결혼을 보고 자란 나는 당연히 결혼을 꿈꾸지 않았다.

그랬던 내가 지금은 오히려 결혼을 장려하는 주제로 계속해서 글을 쓰고 있다.


혹 누군가 나의 배우자를 향해 감정의 허기짐만 느낀다면, 조심스레 그 시간을 지나가 보기를 권한다.

단 서로를 향해 예의와 배려는 필수적인 요소다.




#브런치북을 계획 중입니다.

남편과 살아가는 이야기를 쓰다 보니, 이전의 나를 꺼내지 않을 수 없겠더라고요.

"책읽는여자"의 이야기는 브런치북에 연재해보려고 합니다.

아빠는 오랜 시간 알코올중독 치료를 받으셨어요.

이미 부모님 사이는 틀어질 대로 틀어진 사이였지만 그 시간으로 인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되었죠.

아빠는 지금 "금주 중"이시지만 몇 년 전 결국 부모님은 이혼하셨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가정으로 인한 기쁨이 소소하지만 제게 소중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원가족으로 인한 상처에서 회복에 이르기까지, 지금도 회복의 길을 걸어가는 시간을 글로 담아보려고 합니다.

누군가의 마음에 따뜻하게 닿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매거진의 이전글 브런치, 작가가 된 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