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아이는조각난세계를삽니다
[북리뷰]
내 아이는 조각난 세계를 삽니다 _윤서
보석 같은 책이다.
정말 좋은 글, 문장, 책을 만나면 줄곧 읽다가 문득 멈추어서 책을 덮고 눈을 감는다.
숨을 깊게 들이쉬고 내쉬며 그 순간을 깊이 만끽한다.
깊은 감동이 밀려와서 벅차올라 그 문장과 이야기 속의 순간을 잊지 않고 깊이 담아두기 위했던 적도 있고, 지금 이 책의 경우처럼 마음이 아프고 슬픔이 몰려와서 눈물이 맺히는 그 순간이 몹시 버겁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이가 감기에만 걸려도 '내가 아프고 말지.'를 수없이 되뇌는 게 엄마다.
이 책의 저자처럼 지난 과거를 복기하면서 초단위로 엄마로서 잘못한 것들이 없는지 돌이켜본다.
아이가 아프면 엄마는 그렇다.
집채만 한 파도처럼 가족을 덮쳤던 고통이 파도타기가 가능한 일상이 되기까지
뒤표지의 위 문장이 마음 깊이 다가왔다.
나 역시도 알코올중독인 아빠가 계시기 때문일까.
정신질환에 대한 관심과 공부가 내게도 필요했던 적이 있었고,
가족 중 한 사람이 아프면 가족 모두가 그로 인해 함께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그 영향 아래 놓이게 되듯
나와 나의 원가정 역시 그랬다.
나의 짧은 브런치북 [생각보다, 다정한 세상]은 알코올중독인 아빠로 인해 내가 지나야 했던
동굴 같은 어둠의 시간과 그로 인해 잃어버렸던 나의 정체성, 나의 유년기, 청소년기에 대한 연민을 기록했다.
그리고 한동안 아빠의 금주기간, 브런치 연재 중 다시 시작된 아빠의 알코올중독까지......
저자의 아들인 나무 씨는 초등학교 6학년 시절 조현병을 진단받았다.
조현병의 '조현'은 '현악기의 줄을 고르다'라는 뜻이다. 치료를 하면 현악기가 좋은 소리를 내듯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하다는 의미와 치료를 통해 뇌신경망이 적절하게 조율돼야 한다는 뜻을 담은 것이다.
원래는 '정신분열증'이었던 진단명이 '조현병'으로 바뀌고 환자와 환자 가족들은 이 병에 대한 오해와 편견이 줄어들 것이라 기대했다고 한다.
하지만 사람들의 편견은 줄어들지 않았고,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더 단단해졌다고 한다.
잊을만하면 일어나는 조현병 환자 관련 범죄들 때문이었다.
나 역시도 관련 기사를 접할 때마다 참 안타깝지만 어떤 제도가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만 했다.
그 제도적 차원이라는 것이 환자와 그 가족의 입장에서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것이었다.
발병 후 1년이 지나 아이는 다시 입원하게 된다. 분명 나아질 것을 기대했으리라.
여느 엄마처럼 그저 지나가는 성장통이겠거니, 하며 당연히 회복되리라고 믿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는 다시 입원을 했고, 엄마인 저자는 미용실에 가서 삭발을 했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고 저자는 기록했다.
잠시 멈추었다. 마음이 무척...... 깊이 아렸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삭발을 하고 샴푸를 하러 누워있는 그녀 얼굴 위로 무언가 뜨거운 것이 떨어졌다고 한다.
미용사의 눈물이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잘되기를 바란다며 그녀는 마음을 전했단다.
그때의 그 온기는 아직도 저자의 뺨에 남아있고,
그 다정한 마음들 때문에 그 후 십수 년의 시간을 버틸 수 있었다고 했다.
그 다정한 마음들 때문에...
알 것 같았다. 그 다정한 마음을.
내게도 그 다정한 순간들, 다정한 마음들이 모여 삶을 지탱해 주었다.
그저 생존, 수준이었을지 모를 나의 삶도 그 다정함이 버티게 해 주었다.
'버틴다' 정도의 단어로 설명할 수밖에 없는 나의 삶이었으나 이제는 안다.
그 정도의 나의 삶도, 나의 최선이었음을. 그것이 나의 모든 힘을 쏟은 시간이었음을.
그래서 그것만으로 참 소중하고 귀한 것임을 말이다.
저자의 아들 나무 씨와 나무 씨의 가족의 시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버티고, 버티어 낸 그 생존의 시간이 지금 이렇게 나를 위로하고 다시 힘이 되어주듯, 또 다른 삶의 끄트머리에 겨우 서있는 누군가에게
위안과 희망이 되어줄 것이다.
나무 씨와 나무 씨의 가족 넷은 나무 씨의 조현병으로 인해 더 단단히 결속되었다.
폭풍처럼 몰아쳤을 그들의 시간을 누가 다 헤아릴 수 있을까.
그들은 그 폭풍 속을 지나면서 누구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았다.
나무 씨와 나무 씨의 가족에게 기립박수를 치고 싶은 순간이었다.
고통은 랜덤으로 찾아온다. 어느 날 갑자기 그렇게 찾아온 고통으로 인해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기도 하고, 가족 누군가의 병으로 인해 가정이 해체되기도 한다. 설사 그렇다 하여도, 그들을 결단코 손가락질할 수 없다.
그들의 삶을 살아보기 전에는 그들의 심정과 삶을 안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쉽게 말하고, 쉽게 속단한다.
나 역시도 그런 말을 수차례 들었다. 잊을만하면 한 번씩.
"그런 가정에서 자랐으니, 성격이 그렇지."
"그래서 네가 상처가 많구나."
모두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말들은 나를 깊이 몰아세워 세상으로 나오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세상 끝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그러니 더 이상 살 자격이 없다고, 너 같은 사람은 이 세상에 필요 없다고,
이 세상을 떠나버리라고 등을 떠미는 것 같았다.
요즘 나무는 엄마가 가짜라는 말을 더 이상 하지 않는다. 엄마와 데이트하는 것을 가장 좋아하는 청년, 엄마와 맛있는 것을 먹고 영화 보는 것을 좋아하는 청년으로 자랐다. 나도 더 이상 죄책감에 사로잡혀 내 삶을 되짚거나 나무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지 않는다. 약을 잘 먹도록 단단하게 받쳐주되 약 먹는 게 지치고 힘든 날은 약속한 것을 다 하지 않았더라도 맛있는 음식으로 보상한다.... 우리 관계는 병으로 무너지지 않았다. 아니, 더 단단해졌다. 공부도, 기도도 둘 다 힘이 세다. 증상과 환자를 분리해서 볼 것, 돌보는 나를 잘 돌볼 것. 이 두 가지를 가능하게 했다. (98-99)
지금도 나는 마음이 단단한 엄마가 되고 싶다.
아이가 그의 세상을 훨훨 잘 날아갈 수 있도록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고 싶다.
나무 씨의 엄마는 그런 사람이었다. 분명 글로 다 표현되지 않는 그녀의 몸부림과 정제된 문자 속에 담아낼 수 없는 그녀의 눈물과 고통이 있었으리라. 그 모든 시간을 지나며 단단해진 그녀의 마음과 삶은 나무 씨를 더 든든히 받쳐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가족을 지킬 수 있었을 것이다.
기록하고 싶은 순간이 많다. 하지만 나머지는 이 책을 읽을 독자에게 기회를 남겨주어야 한다.
지금 나무 씨는 서른 살의 건장한 청년이 되어,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여전히 병과 함께이지만 그 병은 나무 씨 전부가 아니다. 그의 일부일 뿐이다.
자신의 병을 인정하고, 그 병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나무 씨에게...
그리고 나무 씨가 그의 삶을 살아가도록 든든하게 버텨주고 있는 나무 씨의 가족에게 나의 모든 위로와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