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희래 Aug 01. 2020

기행(紀行)의 시작은

기차 여행에서 향유할 수 있는 것



나른한 시간에 올라타

노란 햇살이 창문을 통과해 눈꺼풀을 살짝 건드리다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진작 눈치 챘으나 모르는 척 가만히 있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다정한 신호에 마음이 스르륵 풀려 버렸다. 1년 만에 타보는 기차 안에서 여행의 감각이 요동쳤다. 기차 안에 늘어지듯 기대앉아 눈 감고 있는 게 좋다. 보통 눈을 감으면 어둠이지만 해가 쨍하게 뜬 날 눈을 감으면 빛이 찾아온다. 다홍빛 색종이가 보인다. 그 느낌이 좋아 언제나 창가 자리에 앉아 슬며시 눈을 감아 본다. 입안에 넣으면 사르르 사라지는 부드러운 티라미수 케이크처럼 잔뜩 굳었던 마음이 풀어지며 나를 끌어 올린다.  

  

나는 일반 기차를 좋아한다. 좀 느리긴 하지만 일반 기차의 창 밖 풍경은 KTX가 보여주는 삭막함과는 다르다. 부산을 편도 3시간에 주파하는 고속철도는 나는 새보다 빠르게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 가장 짧고, 빠른 길로 달린다. 그런 길은 대부분 산을 뚫어 터널을 만들었기 때문에 창밖으로 보이는 거라곤 지하철보다 까만 풍경뿐이다. 무궁화 호를 타면 창밖으로 들판이 지나가고,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작은 마을도 지나가고, 서울에서는 볼 수 없는 논밭 위의 거대 마시멜로우도 심심찮게 찾아 볼 수 있다. KTX가 쌔애앵 달려간다면 일반열차는 쿠쿵 쿠쿵 하고 걸어간다. 좀 더 천천히 돌아가는 바깥 풍경을 마음껏 감상할 수 있다. 


기차 여행은 부지런한 여행이다. 언제나 아침 일찍 혹은 새벽에 출발해야 한다. 푸르스름한 어둠이 깔린 바깥 풍경 뒤로 졸린 눈을 비비며 연체동물 움직이듯 흘러내리지 않으려고 두 발을 단단히 붙이고 서 있을 때면 나와는 다른 에너지를 내뿜는 사람들이 단단하게 서있다. 이미 만발의 준비를 갖춰 새벽 활동을 시작하는 부지런한 무리. 그 속에 끼어 남의 에너지를 받아먹으며 정신을 차린다.      


비행기 이전 나의 여행은 언제나 기차로 시작했다. 내가 사는 곳은 빽빽한 아파트로 둘러싸여 지하철과 광역버스가 가로지르는 도시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한 때는 기차가 가장 중요한 교통수단인 시골 마을이었다. 기차를 타고 종착역인 청량리역까지 나가야 정동진이든 대천이든 갈수 있었고 최종 목적지에 도착하기까지 걸리는 시간만 계산해 봐도 반나절은 족히 걸렸다. 이동 자체가 여행이었던 셈이다. 약 1시간이 걸려 종착역에 도착하면 일단 역 앞 광장 롯데리아에서 데리버거를 먹고 나서 다시 기차를 타는 것이 우리 가족의 루틴이었다. 


그 땐 판매원이 스낵카트를 끌고 통로를 순회했었다. 유독 넓고 쿠션처럼 푹신한 좌석에 앉아 통로로 빼꼼 고개를 내밀고 언제쯤 스낵 카트가 지나갈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기다리곤 했다. 엄마도 같은 기분이셨던 게 분명했다. 평소엔 금지됐던 주전부리를 마음껏 먹을 수 있었다. 나와 내 동생은 바나나 우유를 엄마는 카트 위 보온병에 담겨 있던 원두커피를 선택 해 천천히 음미하며 덜컹이는 기차의 진동을 즐겼다. 스낵카트와 함께하는 기차여행은 메리포핀스를 곁에 둔 것과도 같은 기분이었다.     


“언니, 기차 안에 카트가 있었다고?” 나보다 겨우 몇 살 어린 내 후배가 눈이 동그래져 물었다. 

“그래 비행기 안에서 밥 나눠 주듯이 카트가 다녔단 말야. 이동식 매점처럼”

기차여행을 계획하다가 스낵 카트 얘기가 나왔는데 후배는 생전 처음 듣는 소리란다.

“카트에서 사 먹는 바나나 우유가 얼마나 맛있는데!" 그녀를 향해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만19세가 되어 내일로 티켓을 끊어 혼자 기차여행을 떠나게 되었을 때의 기쁨은 실로 엄청났다. 일주일 동안 혼자 마음대로 기차를 탈 수 있다니! 잔뜩 흥분했던 마음은 금세 가라앉아 버렸다. 내일로 티켓은 자유석이라 나를 위해 지정된 자리 따위는 없었던 것이다. 빈 좌석에 앉아 있다가 좌석 주인이 다가와 ‘여기 제자린데요’하면 머쓱하게 일어나는 일을 반복했고 결국 배낭을 집어 들고 카페 칸으로 이동해버렸다. 창밖을 바라보고 등받이조차 없는 불편한 의자를 차지하고 앉아있는데 마침 같은 칸 누군가가 커피를 마시는지 코끝을 간질이는 향에 넋이 나가 ‘원두커피’ 한잔을 주문했다. 아마 서울역에서 출발하기 전부터 내려놓았을 원두커피는 보온병에 들어있었다. 


불현듯 옛날 생각이 났다. 엄마가 스낵카트에서 골랐던 그 커피였다. 판매원은 커피를 아주 작은 종이컵에 따라줬다. 향기만 요란했던 그 연갈색 액체는 아주 연했지만 나의 여행을 순식간에 겨울 낭만여행으로 변모시켜 주었다. 카페 칸 등받이 없는 의자는 더 이상 딱딱하지 않았고 커다란 창문 밖으로 황량했던 풍경은 사연을 간직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부산에서 시작한 5박 6일 간의 기차여행은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첫 기차 혼행을 마치고 나자 비로소 알을 깨고 세상에 나왔다는 기분이 들었다.      


갑작스레 밀려오는 추억과 원인 모를 향수에 당장에라도 기차를 타고 어디든 떠나고 싶어진다. 기억하는 한 나는 매년 한 두 차례씩 기차여행을 떠났다. 추억은 미숙했거나 완벽했거나, 그 성격이 무엇이든 다양한 경험으로 나의 일부가 되었고 나는 보이지 않는 것을 향유할 줄 아는 인간이 되어 가고 있다. 농도가 아니라 향긋한 커피 향을 맡게 되고, 속도는 잊어  버린 채 눈꺼풀에 스며드는 따스한 햇살을 감지할 줄 알고, 기차가 굴러가는 소리를 듣게 된다. 지금도 기차 안 카트를 기다리던 설렘과 바나나 우유를 먹기 위해 엄마를 조르던 마음 그리고 만원 기차 속 나직하게 대화를 나누던 우리의 목소리가 선명하다. 나는 여전히 길고 구불구불한 길을 느릿하게 가는 기차 여행을 하고 싶다. 나른한 시간에 올라탄 듯 기차는 쿠궁쿠궁 흐르고 나는 보이지 않아 사소하지만 아름다울 추억을 향유할 것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