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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래 Jul 26. 2020

편리주의에 빠진 아날로그 신봉자로부터

 : 여행지의 아날로그 시그널을 받으세요


‘띵’ 경쾌한 알림음에 저절로 침이 고인다. 에어프라이어는 20분 만에 크루아상을 탄생시켰다. 이젠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바삭한 크루아상을 눈 뜨자마자 만날 수 있게 됐다. 주말 아침 씻지도 않은 채 대충 걸쳐 입고 바삭한 소리를 위해 20분 걸리는 빵집까지 내가 가네 네가 가네 서로 떠 넘기다 결국 아쉬운 내가 지갑을 챙겨 들고 털래털래 언덕길을 오르내리기 6개월. 어느 날 뜬금없이 생지가 떠올랐다. 어디선가 듣기로, 코스트코 크루아상이 맛있는 이유는 프랑스에서 생지를 받아다가 만들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다른 곳에서도 생지를 팔지 않을까? 크루아상 생지를 찾다 보니 이미 나만 빼고 모두가 생지로 갓 구운 크루아상을 즐기며 저 아랫지방 유명 빵집에서 냉동 빵을 배달시켜 먹고 있었다. 만능 요리사 에어프라이어와 생지의 인기가 진작에 타올라 진작에 꺼졌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았다.


그래, 나는 시류에 뒤쳐졌고 따라잡을 생각도 없다. 이래 봬도 마케팅하던 사람으로서 최신 유행에 뒤처지지 않는다고 믿었는데 아니었다. 나는 아날로그 방식에 더 어울리는 사람이다. 여전히 물어 물어 찾아가는 길이 더 편하고, 손으로 써 내려가는 일기가 좋고, 종이책을 선호하며, 오래된 필름 카메라를 애지중지 한다. 그래야 진짜 내 것이 된다고 믿는 부류다.


요즘은 여행 다니기 참 편리하다. 스마트폰 하나면 무서울 게 없다. 근처 맛집을 자동으로 추천하고 길도 찾아주며 카메라 기능까지 한다. 아날로그 방식에 대한 열렬한 사랑을 고백했지만 나 역시 스마트폰 배터리가 5% 이하로 남아 화면이 어두워진다면 아마 패닉 상태에 빠질 게 분명하다.

'숙소까지 어떻게 돌아가지?'
'저게 합리적인 가격인가? 바자기 씌우는 거 아니야?'

여행지에서 숙소를 나서는 내 가방 안에는 언제나 디지털카메라와 포켓파이 그리고 만약에 대비한 보조배터리가 들어있다. 편리를 선호하면서부터 무거워진 양 어깨는 덤이다. 기념품을 구매할 때도 인터넷에 접속해 물가를 비교하는 요즘의 나에게 포켓파이와 구글맵 없는 여행을 상상할 수 없다. 도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걸까?


2019년 이전의 여행은 전부 맨손 여행이었다. 호텔 웹사이트에서 프린트한 애매한 지도 한 장 달랑 들고 여행을 떠났다. 무모하고 용감하고 바보 같았다. 덕분에 에피소드가 참 많다. 동생과 처음으로 함께 해외여행을 떠났을 때 이야기다. 공항 입국장에서 호텔이 있다는 지하철 역까지는 언제나 일사천리였다. 이후가 문제였다. 호텔 측에서 올려놓은 지도에는 출구가 적혀 있지 않았고 그때부터 고난이 시작됐다. 역무실 문을 두드려 OO 호텔이 어디냐, 근방이냐, 도보로 몇 분 걸리냐, 유명하냐, 물어봐도 제대로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지상으로 올라와 주변을 계속 돌아야 했다. 이제 와서 하는 얘기지만 당시엔 엄두가 나지 않아 근처 아무 호텔에나 들어가 새로 예약하고 싶었다. 설상가상으로 일본 지하철엔 에스컬레이터가 없었다! 슈트케이스 짊어지고 힘겹게 지상으로 올라가도 갈 곳을 모르는 마음은 불안을 넘어서 분노로 치솟을 지경이었다.


그 지하철 역 근방을 아직도 선명히 기억하는데 고층 건물 일색으로 호텔이라곤 없을 것처럼 생겨 우리 자매를 당황케 했다. 그냥 회사 밀집 지역 같았다. 지나가는 사람조차 없었다. 계속해서 건물을 타깃으로 하나씩 빙빙 돌다가 급기야 골목길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덜컥 겁이 난 나는 국제전화를 걸어 호텔 측에 우리를 데리러 와달라고 설명해야 하나 싶었다. 그 순간 관광버스 한 대가 눈에 띄었다. 어떤 건물 입구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와 버스에 올라타는 걸 목격한 순간 촉이 왔다.

호텔이구나!

이후 숙소를 못 찾는 상황에서 나는 관광버스 뒤꽁무니를 쫓아다니게 되었다. 우리 자매는 거의 모든 해외여행을 함께 떠났는데 첫 후쿠오카 여행에서 그렇게 고생해 놓고도 정신을 못 차리고 항상 종이조각을 달랑거리며 여행을 떠났다.



언젠가 라멘집을 찾아 삿포로의 밤거리를 헤맨 적도 있다. 평소 이래도 흥 저래도 흥이던 동생이 꼭 가고 싶은 라멘집이 있다며 고집을 부렸다. 당연히 우리에겐 지도도 와이파이도 없었고 오로지 일본어로 적어 놓은 주소와 감으로 대충 위치를 때려 맞춰야 했다. 전 세계 맛집 공식 규칙이라도 되는 건지 동생이 알아온 이 라멘집도 구석에 은밀하게 숨어 있는 게 틀림없었다. 1시간 가까이 3-4블록을 빙빙 돌다가 결국 편의점에 들어갔다. 괜히 과자코너를 맴돌며 말 걸 기회를 노리다가 계산대가 빈 순간을 노렸다.


“저기, 미안한데... 우리가 000 라멘집을 찾고 있는데 어딘지 모르겠어”

“잠시만 기다려 봐”


편의점 직원은 계산대 뒤쪽에서 코팅된 지도를 꺼내오더니 옆 직원까지 동원해 라멘집 위치를 설명해 줬다. 우리 같은 관광객이 한 둘이 아니었던 걸까? 결국 그 라멘집을 알아냈다. 늦은 저녁에도 대기줄이 긴 걸 보니 맛집인 게 확실했다. 허름하기 그지없는 그 라멘집은 겨우 8명 정도가 들어갈만한 규모였다. 헤맸지만 결국 찾아냈다는 성취감에 들떠 동생과 수다를 떠는데 앞에 서 있던 일본인 아저씨가 말을 걸어왔다.


"어디서 왔어요?"

"한국이오."

"라멘 먹으러 여기까지 어떻게 알고 온 거예요 도대체?"

(그러니까요. 어떻게 온 건지 저희도 모르겠어요)


라면 하나 먹으러 삿포로까지 온 건 아니었지만 뜨끈한 국물 한 숟갈 하고 나니 마치 그런 기분이 들었다.

아, 이걸 위해 1시간+@를 뱅뱅 돌았구나.

덕분에 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여행 속 라멘집 이름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케야키’ 라멘 본점이다.


우리 자매의 여행은 대개 이런 식이었다. 헤매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편의점에 들어가 관심도 없는 과자 코너를 빙빙 돌다가 어쩔 수 없이 롤케이크 하나 집어 들고 계산하는 김에 은근슬쩍 길을 묻곤 했다. 가이드북을 뒤져서, 블로그를 뒤져서 꼭 가봐야 하는 곳과 가고 싶은 곳, 꼭 사야 할 리스트를 작성해 다이어리에 끼워 넣었고 다음 장소로 이동할 때마다 다이어리를 펼쳐보곤 했다. 핸드폰이 없던 것도 아니었는데 꼭 그렇게 정성스레 손글씨를 써가지고 다녔다.


바람, 햇빛, 그림자


소리 그리고 바람, 빛 등 거시적 자연에서 얻는 현상은 대부분 아날로그이다. 쨍하던 태양이 구름에 가려 빛의 세기가 갑자기 약해졌다면 그 역시 아날로그 신호다. 인위적이지 않고 그 자체에서 나오는 신호는 일정하지 않아 예상할 수 없고 누군가 마음대로 주무를 수 없기에 더 매력적이다. 온전히 순간에 집중한 이만 신호를 받을 수 있는 혜택을 누린다.


어쩐지 아날로그 여행이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 4호선 명동역 6번 출구로 나와 골목길로 숨어들면 잠깐 동안 여행자의 기분에 빠질 수 있다. 일본어와 중국어, 영어로 된 간판 천지에 자그마한 호텔들이 넘쳐 난다. 지하철 역 근처 낯선 풍경에 나는 5년 전으로 돌아가 지도가 그려진 종이를 단단히 움켜쥔 어리숙한 여행자가 된 기분을 느끼곤 한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튀어나와 또다시 신호를 보내며 내 몸이 현실과 일상에 속박된 와중 잠시나마 여행하는 기분을 누린다.


낯선 곳에서 우리는 미술관을 찾아가는 길에도 5분에 한 번씩 제대로 가고 있는 건지 불안한 마음에 스마트 폰을 들어 길을 확인하고 쉬어가는 카페에 앉아서도 다음에 갈 맛집이 어디 있나 검색하기 바쁘다. 여행지의 신호를 받기는커녕 작은 화면 속 간당간당한 와이파이 신호에 도리어 애가 타기 시작한다. 여행을 진짜 내 것으로 소유하고 싶다면 고개를 들어 여행지가 보내는 신호를 감상하자. 잠시 길을 잃어도 길거리에서 산 티셔츠가 알고 보니 1/2 가격이더라도 그러려니 여유를 부리는 적당한 허세를 보여주자.

'하하 이건 예상 못했네. 참으로 매력적이잖아!'

내가 해봤는데 몇 번 웃어넘기니 생각보다 큰일이 아니더라. 오히려 작은 화면에 코 박고 걸어 다니느라 노천카페에 앉아 신호를 보내고 있는 미남을 놓쳤다면 모를까 대개 웃어넘길 수 있는 사소한 해프닝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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