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본행 비행기 티켓을 취소했다

by 밤 비행이 좋아



이상과 현실은 일치하는 법이 없다. 이는 당신이 월요일 아침 지옥철을 타고 출근해서 회사 책상에 앉아 업무를 보든 휴가를 내고 비행기 좁은 좌석 안에 몸을 구겨 넣고 꿈꾸던 도시를 향해 떠나든 적용되는 법칙이다. 특히 익숙하지 않은 곳 – 여행지 같은 – 에선 간극이 더 커진다. 돌발상황이 자꾸만 발생하는데 계획에 없는 뜻밖의 사건들은 중요한 순간을 망쳐버리기도 하고 반대로 잊지 못할 추억을 선사하기도 하다. 세상에 완벽한 여행은 없다. 나 같은 경우도 창피한 에피소드가 수두룩하다.


프랑스 니스


작년 니스 여행 때는 선크림을 챙기지 않아 악명 높은 남프랑스 8월의 태양 아래 이틀 동안 방치되어 얼굴과 목이 까맣게 타버리고 말았다. 니스 여행 2개월 뒤 가방 정리를 하다가 당시 들고 갔던 노트북 가방 보조 주머니에 처박혀 있던 선크림을 발견했다.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공항에선 유심칩을 정가보다 10배나 더 주고 구매하는 바보 같은 실수도 했다. 가기 전에 사촌오빠한테 분명히 평균 판매 가격을 듣고 갔음에도 홀린 듯이 지불하고 말았다. 여행하는데 깜빡하고 환전을 안 해간 적도 있고 인천공항을 가야 하는데 김포공항으로 향했던 적도 있다. 심지어 승무원 생활을 할 때는 기내용 슈즈를 비행기에 두고 내려 다음 비행을 못할 뻔하기도 했다. 당시엔 당황을 넘어서 멘탈이 붕괴될 직전까지 갔지만 결국 뇌리 속에 박혀 오래오래 기억돼 이렇게 써먹을 때가 많다.




며칠 전 리스본행 비행기 티켓을 취소했다. 6월 1일부터 약 2주간 포르투갈 이곳저곳을 누비며 에그 타르트만 한 다스 먹겠다고 계획까지 세운 소박한 퇴사 선물이었다. 사실 코로나가 전 세계를 잠식한 1월 초 진작에 취소했어야 했지만 4월 즈음 코로나가 잠잠해졌을 무렵부터 쓸데없는 희망에 부풀었다.

'어쩌면 비행기 티켓을 취소하지 않아도 될지 몰라!'

이미 소설까지 한 편 써 둔 참이었다.


『리스본 포르텔라 국제공항에서 내린 나는 10시간이 넘는 환승 대기시간과 도합 16시간이 넘는 비행시간에도 끄떡없다. 리스본에 도착하자마자 기차를 타고 포르투로 향한다. 도착지는 다르지만 기차 안에서 볼 생각으로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다운로드하여 왔다. 물론 포르투에 도착하면 기진맥진하겠지만 달콤한 포트와인이 나에게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어 주겠지 …… 3시간에 걸쳐 도착한 항구 도시 포르투는 상상 이상으로 아름답다. 이미 책으로, 영상으로, 소문으로 접해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직접 봤을 때의 감동은 다르다. 내일 있을 와이너리 투어가 더욱 기대된다』


그렇게 미루고 미루다 출국 예정일 4일 전 현실을 받아들이고 항공사의 서울 사무소에 전화했다. 뚜르르르 신호만 갔다. 아무도 받지 않았다.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이렇게 되니 초조해졌다. 너무 바쁜 건지 아니면 무급휴가에 들어간 건지 연락이 닿을 방도가 없었다. 결국 본사에 메일을 보냈고 출국 10시간 전 겨우 일정을 바꿨다.

9월 13일 출국으로. (티켓 사용 기한이 있어서 최대한 늦춘다고 늦춘 날짜가 9월이다.)




포르투갈에 흥미가 생긴 계기는 정말로 단순하다. 포트와인(포르투 와인)때문이다. 국내 3대 백화점 주류 코너는 일 년에 두 차례 대세일을 감행한다. 와인을 대량으로 푸는데 가격이 엄청 저렴하다. ‘와인은 술이 아니라 예술이다’라는 대학교 교수님의 가르침을 철저히 따르던 시절 할인 시기만 됐다 하면 와인을 박스 채로 구매해 쟁여 놓곤 했다. 와인에 대해 아는 바가 없으니 언제나 직원 분의 추천을 받곤 했는데 한 번은 투박한 병을 양 손 무겁게 가져오시며 포트와인은 어떻겠냐고 추천해주셨다. 얄쌍하고 가녀린 기존의 와인병이 아니라 투박하고 두꺼운 불투명한 까만 병에 ‘저거 와인 맞아?’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분명 좋아하실 거라는 직원 분의 말을 믿고 구매한 포트와인은 그 날 사라졌다.



그리고 다음 주에 다시 구매하러 백화점엘 갔다. 달콤하고 독한 포트와인에 걸맞은 초콜릿 케이크의 왕 자허토르테를 안주삼아 엄마와 나는 1병을 끝장내 버렸다. 무거운데 텁텁하지 않고 달콤하지만 질릴 정도는 아니고 온갖 베리향과 가끔 초콜릿향까지 나는데 이토록 맛있는 와인을 이제야 알게 된 건지 안타까울 지경이었다. 그 날 처음으로 포르투라는 지역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나 맛있는 와인을 만드는 지역이라면 아름다울 게 분명해’


포르투는 포르투갈에서 두 번째로 큰 항구도시, 그러니까 우리나라 부산과 같은 곳이다. 도시 자체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역사 깊은 곳이다. 와인에 반해 이것저것 찾아보니 포르투의 지역 맥주 수페르복(Super Bok)이 굉장히 유명하단다. 나랑 딱 맞는 도시인 게 분명했다. 당장이라도 가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포르투갈에서는 슈퍼마켓에서도 에그타르트를 판매한다던데 안주 삼아 포트와인을 마시고 싶었다. 일단, 방구석에서 여행을 해보자 싶어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빌려왔다. 주인공 그레고리우스가 홀린 듯 아무런 예정도 없이 강하게 이끌려 훌쩍 떠난 리스본은 아날로그 필터를 통해 보는 듯한 아련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딱 인스타그램 감성이었다.


몇 해전 유럽 도시를 돌아다니며 버스킹을 하는 예능 프로그램 <비긴 어게인 2>를 포르투와 리스본에서 촬영했다. 화면 속 비 오는 포르투의 거리는 화창한 날씨만큼 비 오는 날을 좋아하는 나에겐 유혹의 손짓이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포르투 항구에 퍼지는 김윤아의 샤이닝을 듣는 순간 홀딱 반하고 말았다.

‘반드시 저곳에 가야겠다.’


포르투갈 리스본은 승무원들 사이에서도 넘버원 비딩 도시였다. 유럽 어느 도시에 비해 아름다운 거리 풍경, 역사적인 건축물은 물론이거니와 물가는 저렴하고 안전하다며 여자 혼자 여행하기 쾌적한 도시라고 했다. 경유하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가봐야 할 도시중 하나라고 모두가 강력 추천했다. 운이 좋아 리스본 비행을 다녀온 동기는 리스본 홍보대사라도 된 마냥 그곳의 아름다움을 입이 마르도록 찬양하며 에그타르트 맛집 파스테이스 데 벨렘(Pasteis de Belem)을 강력 추천했다. 1일 1 타르트 하는 것에는 성이 안 차 얼린 에그타르트를 공수해 지인들에게 나눠주는 즐거운 상상도 여러 차례 한 참이었다. 이상과 현실은 도무지 일치하는 법이 없다.


대신 나는 내 방에 앉아 파리바게트에서 사 온 에그타르트를 먹으며 이 글을 쓰고 있다. 아니 솔직히 에그타르트가 맛있어 봐야 얼마나 맛있겠는가! 그게 그거다. (정신 승리를 거뒀다.)

화창한 날이 이어지고 더위가 스멀스멀 기어 오고 있다. 떠나고 싶어 근질근질하다. 에그 타르트도 해산물도 와인도 다 날아가버렸지만 이렇게 또 하나의 에피소드를 적립한다. 훗날 코로나 때문에 취소된 리스본 여행을 들먹이며 진짜 리스본 여행기를 풀어놓을 기회를 기다릴 것이다. 에잇, 그냥 에그 타르트나 하나 더 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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