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고흐
복숭아나무를 실제로 본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아직 수줍은 분홍빛 꽃이 피기 전 복숭아나무는 특별할 게 없었다.
“과수원도 아닌데 저 나무는 뭐예요?”
“복숭아나무예요. 청년 농부가 재배하는 복숭아 안데 맛이 좋아요.”
복숭아 나무라니. 아삭하고 달콤한 아가의 포동포동한 볼처럼 탐스러운 그 복숭아 말인가!
첫날에는 정신없어 보이지 않았던 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코로나 검사받고 코와 목구멍을 깊숙이 찔린 트라우마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해 헤롱 거리다가 숙소에 도착해 짐 풀고 낯선 이들과 통성명하고 다 같이 모여 자기소개하고 밤이 깊도록 거나하게 고기를 구워 먹었었다.
혼란의 저녁을 보낸 장소를 빙 둘러싸고 있던 무시무시한 나뭇가지가 복숭아나무였다. 원효대사 해골물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전날 저녁엔 그렇게 삭막해 보이던 나무 무리가 다음날 아침 보니 봄의 상징이라도 된 것처럼 근사해 보였다. 아니, 솔직히 나무는 볼품없었다. 바싹 말라죽은 건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빼빼 말라있었고 생명의 기운이라곤 찾아볼 수 없어 바닥에 자란 잡초가 더 생생해 보일 정도였다. 그나마 파란 하늘이 봄이 시작을 증명하고 있었다. 아쉬운 마음에 괜히 나무 사이를 돌며 머릿속으로 분홍색 꽃잎을 그렸다. 고흐가 떠올랐다.
<꽃이 핀 분홍빛 복숭아나무>를 농장 주변에 펼쳤다. 뇌리에 각인되어 있던 새파란 하늘과 솜사탕 같은 구름이 안계 하늘에 걸리고 그 아래 분홍빛 복숭아꽃이 활짝 핀 복숭아나무가 서 있다.
“그래서 복숭아는 언제 열리는데?”
“6월 말이면 다 끝나죠. 아마 그전에 복숭아 씌우기 일손 도우러 갈 거예요.”
아직 잎사귀조차 없는 나무에 언제 싹이 나오고 과실이 맺히게 되는 걸까? 농사의 세계는 알 수가 없다.
'열리면 서리나 한번 해볼까?'
하지도 못할 거 괜히 발칙한 상상을 해봤다.
복숭아나무는 키가 작은 대신 가지가 사방으로 뻗쳐있다. 아직 푸릇푸릇한 잎사귀조차 나오지 않았지만 복숭아 나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림에 담긴 고흐의 복숭아나무와 형태가 아주 흡사했기 때문이다.
나는 복숭아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무른 복숭아라면 특히 질색이다. 베어 물었을 때 허벅한 식감도 싫고 입술에 흐르는 과즙도 좋아하지 않는다. 당도 높은 과일 알레르기가 있는지라 입 전체가 간지러워진다. 그런 알레르기가 어딨냐고 반문할 테지만 수박, 망고, 멜론 같은 열대과일을 먹을 때마다 입가는 물론 목구멍이 간지러워진다. 복숭아도 마찬가지다. 알레르기가 없다고 하더라도 썩 내 취향이 아니다. 다만 아직 완전히 무르익기 전 단단한 식감의 뽀얀 복숭아는 좋아한다. 무를 씹듯이 이가 콱 박히는 아삭한 식감과 적당히 달달한 당도와 과즙이 과하지도 않고 딱이다.
반 고흐가 자기 귀를 잘라버린 사이코라는 사실을 알기 전, <별이 빛나는 밤에>를 보고 나는 고흐 작품에 반해버렸고 가장 아름다운 작품이 많이 나온 아를르 시절을 집중 공략했다. 있는 그대로의 색깔이 아니라 빛과 구도에 따라 달라지는 사물의 색을 표현한 고흐의 그림을 좋아한다. 아마 고흐가 가장 행복, 아니 그나마 행복하다고 느꼈을 시절이다. 귀를 잘랐든 자살을 했든 신경이 더러웠든 문제 될 게 없었다. 한번 빠지고 나니 답이 없었다. 그렇게 불안정하고 불행한 삶을 산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과수원을 그려냈다니 믿기지 않는다. 세상 어느 화가도 꽃이 핀 나무를 아름답게 그리지 못하리라. 찬란한 봄이 벌써 다가온 기분이 든다.
우리는 자연을 보고 시간의 흐름을 깨닫는다. 시간이 흐르고 계절이 바뀌는 건 세상 만물 당연한 이치지만 기다림은 지진하게 흘러간다. 하루는 빠르게 지나가지만 계절은 늦게 찾아오는 것만 같아 답답하고 조급하다. 내가 보낸다고 보낼 수 있는 존재가 아니건만 시간을 보내고 계절을 잡아둘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만연한 봄의 기운을 내 곁에 두고 나만 맛보고 싶어 안달 난다. 무르익은 복숭아 열매를 보지 않아도 좋으니 푸른 잎을 틔워 활짝 만개한 꽃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란다.
또 계절은 바뀌었다. 보름 전 서울에서 나는 겨울이었고 이제 안계에 내려와 봄을 그리고 있다. 봄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설레는 이유는 생동하는 생명의 기운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순환하는 계절을 몇 차례 경험하면서 ‘봄’이면 으레 따뜻한 날씨에 연하고 순한 나뭇잎이 자라고 꽃이 피고 세상이 온통 밝아진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레몬을 보기만 해도 입 안 가득 시큼한 기운과 침이 고이는 것처럼 ‘봄’이라는 단어가 희망과 위안 그리고 기대를 불러일으킨다. 지난겨울은 특히 힘들었고 메말랐다. 하지만 결국 봄이 왔고 앙상하지만 반드시 분홍빛 꽃을 피워낼 복숭아나무를 기다린다.
그림 속에서 보던 자연을 실제로 볼 기회가 얼마나 될까? 파리에서 잠깐 머물던 시절 찬양해 마지않던 모네의 <수련> 연작을 실제로 보고 감격에 겨워 그 나음 날 지베르니의 수련 정원을 찾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남들이 어떤 혹평을 쏟아내던 그림 속 모델이 내 눈앞에 펼쳐졌다는 감동은 지금도 생생하다. 고흐의 복숭아나무는 프랑스 남부 지역의 아를르에 있겠지만 위대한 레플리카가 의성군 안계면에도 있다. 나의 복숭아나무다.
여름이 되면 서리할 생각에 짜릿해진다. (당연히 서리하지 않습니다. 돈 주고 사 먹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