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과즙 가득
요즘 들어 부쩍 여름 냄새가 난다. 제 아무리 독한 향수가 온다 해도 결코 누를 수 없는 냄새다. 찌는 듯한 더위에 냄새를 맡기도 전에 코가 뭉개지지나 않을까 싶지만 피부로 맡는 여름 향기는 내게만 불어오는지 주변에 진동한다. 나는 여름을 좋아한다. 도대체 언제부터 여름을 좋아하게 되었을까? 더위라면 질색하고 땀이라도 날까 바깥에 돌아다니지도 않았는데 이제는 한 여름밤에 즐기는 운동이 좋고 정수리가 타는 듯한 뜨거운 태양도 좋다. 바람이 불어도 공기가 더운 탓에 바람이 묵직하지만 그래도 좋다.
여름 과일 중에는 복숭아가 제일 좋다. '딱딱이’ 복숭아가 좋다. 주인집 할머니네 셋째 아드님(복잡하다. 그냥 사장님이라고 부른다)이 복숭아 농사를 짓는데 매일 아침 복숭아 밭으로 출근해 하루 종일 씌우고 따고 포장하다가 오후가 되면 배달 업무를 시작하신다. 전국 각지로 택배가 나간다는 주인집 복숭아는 꽤 인기인 듯했다. 문자로 날아오는 고객들의 주문 내용이 흥미롭다.
‘저는 물렁이 복숭아가 좋아요. 물렁이로 주세요.’
할머니는 복숭아가 물렁이와 딱딱이로 나뉜다며 내게 딱딱이를 좋아하는지, 물렁이를 좋아하는지 물으셨다. 주문을 저렇게 넣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사장님은 물렁이만 혹은 딱딱이만 골라서 상자 포장에 들어가신다.
'저는 딱딱이가 좋아요.’
천도복숭아나 자두는 6월 중순부터 마트에 깔리기 시작하는데 그게 다 농가에서 햇살 내리쬐는 무더운 오전부터 복숭아 봉지 씌우기 작업에 돌입하기 때문이다. 복숭아가 유명한 의성군 안계면도 복숭아 싸기에 돌입했다. 실은 과일을 종이로 감싸는 작업이 그렇게 고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농업 지식이 전무한지라 AI가 주문까지 받는 21세기에 인간이 일일이 손으로 작업할 리 없다고 지레짐작만 했을 뿐 실제로 본 적이 없으니 복숭아 싸기가 어떻게 이뤄지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렇다면 복숭아에 봉지를 씌우는 작업을 간단하게 설명해 보겠다. 먼저 짧은 앞치마를 매고 그 안에 족히 100장은 넘을 얇은 습자지 뭉텅이를 넣어 둔다. 이는 한 시간도 안 되어 다 사라진다. 딱 1시간 용 작업 분량이다.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목에 손수건을 두르고 팔토시에 장갑까지 끼고 나면 전투 준비 완료다. 이제 적당한 나무 한 그루를 골라 한 알 한 알 소중하게 복숭아에 구멍 뚫린 봉지를 감싸주면 된다. 나름 실용적으로 만들어진 이 종이는 한쪽에 철사가 있어 구멍으로 복숭아를 쏙 집어넣고 한쪽으로 종이를 몰아 철사를 돌려주면 안정적을 옷 입히기가 완성된다. 찾아보니 복숭아를 봉지를 싸주는 이유가 아주 삭막하고 차갑기 그지없다. "병‧ 해충 피해를 줄이고 과실 착색을 좋게 하기 위해 이용되고 있다." 더위를 식히라고 모시적삼이라도 입혀주는 걸로 하자.
언뜻 보기에 열매가 덜 달린 나무를 골랐는데 무성한 초록 잎 사이사이 발개지기 시작한 복숭아가 수줍은 듯 숨어 있었다.
“손이 안 닿는데…?”(중얼중얼)
“저기 사다리 가져다가 쓰면 돼요.”
나무 꼭대기에 숨어있는 복숭아를 싸기 위해선 사다리가 필수다. 사다리를 단단히 고정시킨 후 걸리적대는 장화를 벗어던지고 조심스럽게 올라갔다. 겨우 1m가 될까 말까 한 높이인데 세상이 달라 보인다. ‘키 큰 애들은 이런 기분일까?’ 마침 가지 하나에 복숭아가 여섯 개나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이렇게 붙어 있으면 영양분을 나눠가져야 할 텐데 좀 떨어져서 태어나지. 괜히 안타까운 마음에 배로 열심히 복숭아를 싸줬다. 며칠 전 사과 적과를 갔을 때 다닥다닥 붙어있던 사과 무리 중 한 알만 남가고 제거했는데 아까운 마음에 주머니에 콩알만 한 사과를 넣어놨더랬다. 냉정하지만 다 이런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적과 작업을 한 게 아닌가!
복숭아 봉지 씌우기 작업에도 점점 요령이 생겨 속도가 붙기 시작했고 예쁜 모양으로 오므리기 위해 고민까지 했다. 나무 위로 머리만 살짝 내민 채 작업을 이어가는데 새참 먹으라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 안 오면 다 사라지고 없을 거예요. 후회하지 말아요!'
아직 앞치마에 쟁여 둔 종이가 남아있었지만 양심의 가책이고 뭐고 냉큼 장갑을 벗고 달려갔다. 찰쌀 꽈배기였다. 지금 막 튀겼는지 기름 벤 종이봉투를 열자 김이 올라왔다. 방송까지 탄 아주 유명한 찹쌀 꽈배기 집이다. 아마 안계시장에서 가장 장사가 잘 되는 집이 아닐까. 손가락에 설탕가루 묻혀가며 꽈배기를 먹고 나니 앞치마에 복숭아 용 종이가 리필되어 있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반나절이 채 안 되는 작업 시간에 온 몸이 녹초가 되었다.
'도대체 어떻게 하루 종일 봉지를 씌울 수가 있는 거야!'
여름의 초입, 제대로 더위를 먹었다.
외국에는 안계에서 나는 둥그렇고 탐스런 복숭아가 없다. 고흐가 아를르를 방문한 시기가 한두 달 정도 연기되었더라면 아마도 화사한 꽃 대신 납작한 복숭아가 매달린 복숭아나무를 그렸을 수도 있다. 와플 기계에 들어갔다 나온 것 같은 납작하고 희끄무레한 복숭아처럼 생겼는데 특히 더운 나라일수록 더 납작하다. (과학적 근거는 없다. 그냥 내가 본 복숭아들이 그랬다.) 외국 호텔에 짐을 풀면 웰컴 과일이 협탁 위에 올려져 있곤 했다. 처음 납작 복숭아를 봤을 땐 멍하니 무슨 과일인고 분석해야 했다. 절대 복숭아 일리 없다고 생각했는데 껍질에 송송 돋아 있는 털을 보고서야 복숭아라고 추측했고 한 입 베어 물고는 한국의 통통하고 단단한 복숭아가 그리워졌었다.
지난 3월 앙상한 나뭇가지였던 안계의 복숭아나무에 잎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혔다. 시간이 그만큼이나 흘렀다. 도대체 언제 꽃이 피고 복숭아를 수확할까 싶었는데 어느덧 추수의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 아직 제대로 오지도 않은 여름이 가고 있는 듯하여 슬픈 마음이 든다. 보통 가을을 풍요의 계절이라 칭하지만 내게는 여름이야 말로 진정한 풍요의 계절이다. 때론 넘쳐서 문제지만 내리쬐는 태양, 촉촉하게 적시는 비, 짧아진 밤과 새벽은 전부 여름에만 만날 수 있는 한철 살이다. 이 모든 요소가 여름을 적절하게 풍요롭게 만든다. 안계에서 여름이 좋은 이유가 하나 더 추가되었다. '딱딱이' 복숭아. 옷장에 민소매와 원피스가 걸리고 아침부터 방 안 가득 시티팝이 울리고 저녁이면 차가운 물방울이 맺힌 시원한 맥주 한 캔과 딱딱이 복숭아 한 조각으로 하루를 마무리할 테다. 여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