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180일의 기록
농로를 걸어가는 백로를 봤다. 그러고 보니 걔들도 다리가 있었다. 크고 아름답다고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왜 직접 눈으로 봐야만 깨닫는 것일까. 다 거기 있는데, 내가 못 보는 것일 뿐인데, 어리석은 나는 늘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이곳에 내려온 지 정확히 며칠이나 되었을까. 단조로울 것 같은 시골생활이 실은 도시보다 스펙터클 하다고 하면 누가 믿을까? 화려한 네온사인은 커녕 가로등 조차 없는 이곳에서 아직도 내가 보지 못한 것들이 수두룩하다. 평생을 도시에서 살아온 나조차도 이 상황이 믿기지 않지만 사실이다. 지평선이 펼쳐진 논에는 물이 들어찼고 불빛 하나 없는 저녁에 보면 바다 같다. 달빛에 의존해 농로를 걷다 보면 바다 한가운데를 가르고 걸어가는 모세라도 된 기분에 휩싸인다. 안계의 가장 아름다운 얼굴은 오후 7시가 지나야 드러난다. 해 질 무렵 5월의 안계는 아름답다는 말로는 부족해 감히 내가 봐도 될까 싶을 정도의 황홀경을 뿜어낸다. 붉은 기운이 올라오기 시작하면 바다 같은 논이 반짝반짝 빛나 거대한 멸치 무리가 파닥거리는 양 눈이 부실 지경이다. 어느 순간 하늘이 땅이 되고 땅이 하늘이 되며 내가 구름에 앉아 있는지 구름이 내 머리 위에 있는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바람의 나라 안계는 우유니 사막 부럽지 않은 풍경을 선사한다. 여기에 백로가 날아(때론 걸어) 간다면 미술 책에서 봤던 진경산수화 속에 직접 걸어 들어간 듯한 착각에 빠진다.
부끄러운 고백을 하나 할까 한다. 현재를 살려고 내려온 나는 ‘현재’ 도시에서 살 때만큼 바쁘고 치열하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불안하지 않은 나의 마음 하나다. 며칠 전 지인들에게 생존신고 겸 안부 연락을 돌리는데 한 명이 이렇게 말했다.
‘인생 짧은데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아야지.’
세상에 얼마나 아름다운 것들이 많은데 그걸 못 보고 레테 강을 건너면 억울할 것 같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도전하는 삶을 최대 미덕으로 알고 살아가는 내게 ‘하고 싶은 것’을 찾아다니는 일은 의무와도 같다. 안계에서 나는 무슨 일을 하고 싶은 지 생각하고 고민하기 60일째, 논 위를 날다가 농로는 걸어서 다음 논으로 건너가는 백로를 보고 있으니 앞만 보고 달려가지 않고 천천히 걸어서 혹은 잠시 뒷걸음질 쳐도 괜찮지 않겠나 싶어 아침에 눈을 뜨고 저녁에 침대에 드러누울 때까지 매 시간을 꼭꼭 씹으며 온전한 시간을 보내는 데 주력하고 있다. 특정 목표를 향해 달려가다 보면 하루가 24시간이고 일주일은 7일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기 일쑤다. 현재를 잃어버리게 된다. 보이지 않는다고 아예 놓쳐버리는 것은 얼마나 멍청한 일인가!
안계의 보통날을 내 손에 안착시켜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1분 1초를 만지며 살아가려 한다. 거듭 말하지만 서울의 '보통'은 통하지 않고 나를 비롯한 도시인들의 예상과 모든 것이 다르게 적용되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여기서는 아무도 제비집을 부수지 않는다. 제비가 특별해서가 아니다. 그게 평범한 일상이기 때문이다. 서울역 광장을 점령한 비둘기보다 제비가 더 많이 보이는 곳이라 이제는 각진 날개를 활짝 펼치고 낮게 나는 제비를 보아도 놀라지 않는다. 처갓집 양념치킨 천막 아래 집을 지은 제비는 수시로 제집을 들락거리며 삐죽삐죽 울어댄다. 서울 같았으면 처음에 귀하게 여기다가도 하도 빽빽거려 장사에 방해가 될까 부숴버리거나 식재료로 가져다 썼을지도 모를 일이다. 동화책 속 박씨를 물고 온 제비는 상상의 조류라고 생각했는데 이곳에 내려와 실제로 보니 생각보다 앙증맞고 귀여운 모양새에 새라면 질색하는 나조차도 금세 호감을 줘버렸다. 그러고 보니 여기선 아무도 클랙슨을 울리지 않는다. 좁은 길 양쪽에 주차가 돼 있어 차 한 대가 지나갈 자리만 확보된 상황에서 서로 양보하기 바쁘지 싸우지 않는다. 크게 빵빵거리면 분명 외지인이다.
흔한 것, 평범한 것, 그냥 보통의 삶을 살면서 뛰지 않고 걷는 법을 배우고 있다. 급히 자전거를 타고 나가던 농로를 이젠 천천히 걸어서, 두 배로 시간이 걸리더라도 오른쪽도 보고 왼쪽도 보고 하늘도 살피며 간다. 제비집을 부수지 않고 클랙슨도 울리지 않는 곳이라 가능한 일이다. 90일을 찍기 위해 가는 게 아니라 단지 현재를 살기 위해 제비집도 클랙슨도 놓치지 않고 하루를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