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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래 Dec 29. 2021

2021년, 나는 스타벅스 커피를 몇 잔이나 마셨을까?

스벅 덕후는 건재하다

안동으로 향했다. 검색해보니 우리 집 부엌에서 가장 가까운 스타벅스는 안동 옥천점이었고 차만 있으면 30분 안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어수선한 집안에서는 도저히 집중이 안된다는 핑계로 스타벅스를 찾아 30.9km를 달려가는 사치를 부려봤다. 1년 365일, 시간으로 따지만 8,760 시간. 길고도 짧은 나날이다. 스타벅스 커피만 총 114잔을 마셨던 2020년이 며칠 있으면 대과거 형으로 전환된다. 일 년 간 많은 일이 있었는데 가장 큰 일은 아무래도 ‘스타벅스가 없는’ 지역으로 이사 온 게 아닐까? 매년 겨울, 스타벅스 다이어리를 받기 위해 달달한 시즌 음료도 사약 먹듯 받아 들던 스타벅스 덕후가 다이어리는커녕 12잔 마시면 받을 수 있는 무료 음료도 받기 힘들게 되었다. 조만간 골드카드를 잃게 될지도 모른다. 무료 음료도 머나먼 별이 되어 버린 이 시점에 또다시 연말은 찾아왔다. 

"나는 100일, 200일 안 챙겨도 되고 특별한 생일 선물도 필요 없지만 크리스마스는 꼭 함께 보내야 해. 12월이 되면 아주 바쁠 거야."
"왜?"
"가야 할 곳도 마셔야 할 것도 많거든.
근데 그중에서도 스타벅스를 가장 많이 가게 될 거야."

나는 겨울을 좋아하고, 생일보다 크리스마스가 좋다. 연인과 기념일은 안 챙겨도 크리스마스는 챙겨야 한다. 생일보다 기념일보다 크리스마스를 더 좋아하는 여자의 취향을 맞추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총 30잔, 133,600원



크리스마스를 담은 빨간 컵홀더와 벽에 달린 리스, 구석에 자리 잡은 트리와 대망의 크리스마스 시즌 음료까지 크리스마스를 가장 먼저 느낄 수 있는 곳은 스타벅스다. 원두를 갈고, 셰이커를 흔들고, 샌드위치를 전자레인지에 돌리고 주문하고 닉네임을 부르는 온갖 소음 아래 깔리는 재지한 캐럴 덕분에 토라졌던 기분도 절로 좋아진다. 차 타고 30분 나가야 스타벅스가 있는 지역에 살면서 30잔이나 마셨다면 선방했다. 덕후는 어디를 가든 꾸준히 충성심을 발휘하는 법이다. 물론 내가 시골이라 지칭하는 우리 동네에도 카페는 많다. 자, 지금 이곳에 카페가 몇 군데 일까 세어보겠다. 하나, 둘, 셋... 무려 11 곳이다. 여기에 거리를 나설 때마다 심심찮게 마주치는 대여섯 개의 다방까지 포함한다면 코너를 돌 때마다 카페가 있는 인구밀집지역만큼이나 카페가 많은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커피 없이 못 사는 카페인 인간은 거주지를 박차고 스타벅스를 찾아 나선다. 

'스타벅스가 그렇게 맛있냐?' 

아메리카노만 마시는 내게 한 친구가 비꼬듯이 물어본 적이 있다. 물론 스타벅스 커피가 기를 쓰고 찾아다니며 마실 정도로 완벽한 향과 맛을 구사하는 건 아니다. 커피가 아닌 공간을 소비하는 내게 스타벅스 커피는 맛 이상이다. 나는 거기서 공부하고, 멍 때리고, 연인과 데이트를 즐기고, 혼자서 궁상도 떤다. 나는 커피를, 노란 조명을, 배경 음악을, 나직한 소음을 소비한다. 브랜드 자체로 스타벅스를 소비한다.

'상주에 스타벅스 DT점이 생긴대!'

이런 유의 소식은 발이 빠른 법이다. 한가로운 주말, 어디 가볼 만한 곳 없을까 카카오 지도를 켜서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는데 아주 반가운 로고를 발견했다. 영롱한 초록빛을 뿜어대는 인어의 얼굴을 보자 엄지손가락과 검지 손가락이 저절로 화면을 확대해버렸다. 지척에 대형 스타벅스가 생긴다는 소식에 감격스러웠다. 


최근 며칠 동안 좁은 집에 갇혀 일만 했다. 앉은뱅이 밥상 펴놓고 작업하길 몇 달,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작은 책상을 들여놨더니 부엌이 작아졌다. 양파를 썰다가 두 발자국은 뒤로 갈 수 있었던 동선이 확 줄어 이젠 제자리에서 허리 돌리기만 가능할 뿐이다. 곧은 허리와 편한 엉덩이를 얻은 대가로 동선을 잃어버렸다. 흰 벽을 바라보고 빛나는 모니터에 열중하다 보면 모니터가 점점 앨리스의 토끼굴처럼 보이게 되는데 이때 조금 더 열중해서 딸려 들어가야 한다. 순간 집중력이 흐트러져 딸려 들어가지 못하면 좁은 부엌 작업실이라는 현실을 더 크게 깨닫고 답답증을 느끼게 된다. 바로 지금처럼. 순간 집중을 놔버렸고 토끼는 사라져 버렸다. 내 집이지만 더 이상 있다가는 애정과 고마움이 사라질 것만 같았고 귀촌청년이라는 타이틀에서 탈주해 버릴지도 몰랐다. ‘나가서 작업하면 안 되나요?’ 나는 <스타벅스가 없는 곳>으로 이사 왔고 이 말인즉슨 입 다물고 다시 토끼를 찾아 나서야 한다는 소리다. 혹은, 스타벅스를 찾아 차 타고 30.9km를 달려 결국 그 동네에서 토끼를 찾아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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