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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래 Sep 16. 2024

마늘밭

내 작은 감각

여기선 계절의 변화를 후각으로 먼저 인지한다. 요즘은 해 질 녘 양옆으로 논밭이 늘어선 좁은 도로를 운전할 때마다 에이치 - 재채기가 먼저 터져 나오곤 하는데 ‘아, 곧 가을이로군’ 알려주는 신호다. 


마을 어귀부터 여름철 쨍한 태양에 새빨갛게 익은 고추를 고춧가루로 가공하는 매운 내가 진동한다. 처서가 지나고 아침과 밤 기온이 떨어져 선선한 시기에 늘 이 작업이 이뤄진다. (한가위 전 생산을 위한 걸까?) 덕분에 눈에선 눈물이, 코에선 콧물이 흐르지만, 고추 냄새만큼 진한 흙냄새가 다독여 주기 때문에 덜 억울하다. 온갖 풍파를 견뎌내고 끈질기게 성장한 길가의 이름 모를 풀과 도로 주행에 방해가 되는 잡초를 쳐내는 작업이 이뤄지는 날엔 달리는 창문 너머로 향긋하고 싱싱한 풀냄새가 너울대고 곧 진한 흙 향이 차 안을 파고든다. 바야흐로 가을이다.     



나는 2021년 3월에 이곳으로 내려왔다. 아직 황량하고 메마른 땅에는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렸고 수확이 끝난 뒤 아직 씨앗도 뿌리지 않은 논밭은 도시의 삭막함보다 더 날카로워 보였다. 


‘날이 좀 풀렸네’ 싶은 순간 도로에 하나둘 흙덩어리가 보이기 시작한다. 경운기, 트랙터가 땅을 갈고 퇴근길에 남긴 흔적이다. 점차 해 뜨는 시간이 빨라지면서 아낙네들의 기상 시간도 덩달아 빨라지고 이른 오전부터 밭일하러 떠나며 재잘거리는 수다 소리가 아직 침대에 누워 미적거리는 내 귓가를 파고든다. 모종을 심고 물을 주고 거름을 주고 애정을 담아 밭을 가꾸면 금세 논에 물이 가득 들어차는 5월이 찾아온다. 가장 황홀한 시기, 내가 가장 좋아하는 풍경이 아주 짧게 스친다. 여기가 동해바다인지, 깊은 내륙의 대지인지 헛갈리는 진풍경이 벌어지고 바다 같은 논으로 뛰어들고 싶은 마음을 몇 번이나 억눌렀는지 모르겠다. 금빛 샤워를 하듯 몸에 닿기만 해도 경이로움이 온몸을 훑고 퍼져나갈 터. 성스러운 성수가 이마 한가운데 와닿듯 새로 태어난 기분일 텐데. 실제로 뛰어들었다가는 불호령이 떨어질 게 분명하니 머릿속으로 상상만 한다.      


곧 1차 수확 시기다. 깻잎이나 호박 등 아주 뜨거운 여름이 오기 전 한 차례 재배하고 아직 심지 못한 녀석들을 부지런히 심는다. 나도 텃밭에 이것저것 심기는 했는데 빠르게 성장하는 상추나 깻잎을 제외하곤 게으른 탓에 물 주는 시기나 속아주는 시기를 놓쳐 영 시들시들하다.     


그리고 대망의 마늘 철이 도래한다. 초여름, 이 지역에는 누가 마늘 향수를 내 몸에 잔뜩 뿌린 게 아니고서야 설명할 수 없는 마늘 향이 도처에 퍼져있다. 어딜 가나 마늘 향이 진하게 따라붙는 걸 보니 코끝에 마늘 망태기가 달려있는 게 분명하다. 단단하고 알싸한 마늘로 유명한 지역답다. 논이라고 생각했던 넓은 평야가 전부 마늘밭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어찌나 놀랐던지. 벼와 마늘도 구분하지 못하는 나를 보고 엄마는 ‘이게 어떻게 모종이니, 누가 봐도 마늘인데’라며 어이없는 한숨을 쉬었다. 기다란 풀처럼 생겼다고 다 벼 모종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곳에 살면서 처음 알았고 마늘을 이렇게나 많이 심는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더운 날에도 농민들은 양파와 마늘을 손수 재배한다. 

‘왜 기계로 안 하는 걸까?’

‘기계로 하면 다 상해’

한 어르신의 설명에 아차 싶었다. 그래, 땅속에 묻혀 있으니 양파고 마늘이고 다 상하겠지. 아무리 기술이 발달해도 인간이 해야만 완성되는 일들이 있다.     


36도에 육박하는 여름에는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어도 덥다. 이런 날에도 성인 여성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깊숙한 마늘밭 곳곳에서 사람들은 직접 낫으로 재배하고 끈으로 묶어 수확을 감행한다. 불현듯 골드러시 시대 구인광고가 떠오른다. 말을 타고 필요한 것들 – 편지나 전보, 작은 소포 꾸러미 등 –을 배달하던 시절, 신체 건강한 젊은 남성 배달원을 뽑던 광고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고 한다.

'성실함' ‘당일 배송’ ‘목숨이 위험할 수 있음’     


출근 시간이 자유로운 프리랜서가 이른 아침에 출근하든, 10시가 훌쩍 넘어서 지나가든, 점심 먹고 느지막이 나서든 농부들은 항상 일렁이는 농작물 사이에 있다. 성실한 땀을 흘리는 농부들은 늘 같은 자리에서 묵묵히 모두에게 이롭고 생산적인 일을 하고 있다.     



추수철이 다가오며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고 도둑 참새를 쫓고자 파란 깃발이 높게 올라간다. 허수아비, 독수리 모양 연, 갖은 도구가 등장하고 푸르렀던 벼는 누런 황금빛으로 그 가치를 높여간다. 상쾌한 가을바람 한 번 불면 출렁 황금물결이 요동친다. 추석이 지나야 햅쌀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추수철이 지나면 정미소 앞에 트럭이 길게 늘어서고 차들은 서로 양보해 가며 옆을 조심스레 지나간다. 이내 벼가 싹둑 잘린 논에는 커다란 마시멜로우가 등장하고 한동안 고요한 침묵만이 논밭을 차지한다. 살랑이는 바람에도 와르르 웃던 나뭇잎과 농작물은 사라졌지만 황량한 논밭은 사뭇 장엄하고 엄숙한 제사를 앞둔 영감들처럼 위엄을 내세운다.


시골의 사계절은 관찰하는 재미가 있다. 내 작은 감각으로도 충분히 발견할 수 있는 변치 않는 증거와 사실로 굳이 달력을 보지 않아도 계절을 온몸으로 깨닫게 된다. 우리 조상들이 보고 듣고 느껴지는 것들로 계절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생활했던 것처럼 사계절 시간의 흐름이 나를 통과한다. 관찰할수록 당연하게 여기던 자연의 변화가 경이롭고 아무리 기술이 발달할지라도 인간이 해야 하는 가치 있는 일들이 있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편의점조차 없는 동네에 하나뿐인 구멍가게의 인기 상품은 계절별로 나오는 온갖 모종과 햇마늘 등이다. 미처 흙도 다 털지 못한 알 굵은 양파가 이리저리 흩어져 있고 여러 개씩 묶어 놓은 단단한 육쪽마늘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깐 마늘만 사 먹던 나도 올해는 직접 마늘을 까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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