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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古)도를 그리워하며

경주 당일치기

by 밤 비행이 좋아

어제 대구는 28도였는데 오늘 경주는 11도다. 차가운 바람에 카디건 단추를 목까지 잠그고도 어깨를 잔뜩 움츠리게 된다.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반팔을 입어야 할지, 긴팔을 입어야 할지. 비가 내릴지, 땀이 흐를지. 오늘 핀 꽃이 내일이면 꽃잎을 떨구고 마는 제5의 계절이 탄생한 듯 내 마음도 갈팡질팡한다. 최근 내게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을 생각하면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려나. 집을 잃고 새로운 마음, 새로운 태도로 삶을 마주하게 된 일상을 이제는 나름 즐기는 중이다.


KakaoTalk_20250503_164057080_12.jpg 좌측 담벼락에 한 마리가 더 있었다!


신경주역이 생긴 이후로 매년 경주로 여행을 떠나곤 했다. 서울역에서 출발해 드문드문 자리가 찬 KTX 안에서 창밖을 바라보며 먹는 퍽퍽한 맥모닝과 말라붙은 감자튀김은 최고의 오찬이었다. 경북으로 터전을 옮긴 뒤 경주까지 가는 길은 고속도로뿐이었고 3시간 넘는 거리를 운전할 엄두가 나지 않아 마지막으로 본 첨성대가 벌써 4-5년 전이 되었다. 이번에 운 좋게 대구에서 임시 거주를 하면서 1시간이면 경주 당일치기가 가능해졌다.


한적한 평일 오전의 여유를 즐기고 싶어서 일단 번잡한 황리단길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향했다. 이른 시간이라 좁은 길목은 한산했고 이제 막 문을 열었는지 작은 카페 안 바리스타만 분주했다. 카페 앞 화분에 몸을 기댄 무전취식 고양이 한 마리가 팔자 좋게 늘어져 있는 모습에 내 입꼬리가 골라간다.

'어디든 고양이 팔자가 제일 좋네.'


나는 늘 경주가 그립다. 태어난 것도, 살아본 적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평범한 일상 속 문득 '경주 가고 싶다'라는 생각에 봉긋 솟은 대릉원이, 질리도록 본 첨성대가, 사람 바글거리는 황리단길이 그리워진다.


낮은 건물과 깨끗한 골목길, 이곳만 공기의 흐름이 다른 것처럼 낮고 빽빽한 밀도, 마치 커다란 공기 덩어리가 내 육신을 모조리 흡수해 신라 시대로 데려가려는 듯 홀린 사람처럼 계속 걷는다. 문화재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겠지만, 경주에서는 시야를 가리는 건물을 찾아볼 수 없다. 어디를 가든 우뚝 솟아 튀는 아파트나 고층 건물이 있기 마련인데 새로운 건축보다 오래된 건축물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평평한 평지에 뜬금없이 구릉이 솟아 있고, 돌탑이 세워져 있고, 유적지가 보존되어 있다.

내가 끊임없이 고도를 그리워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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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한 황오동 주택가에 카페 보우하사가 있다. 일제강점기 경주역장의 관사로 사용되던 적산가옥을 보존하여 필요 없는 부분을 철거한 후 최소한의 터치만 한 듯 서까래도 대들보도, 주춧돌도 자세히 관찰할 수 있고 빛바랜 색에서 세월의 흐름을 엿볼 수 있다. 동네 어머니들이 오랜만에 회포를 푸는 모양인지 꽉 찬 안쪽 자리를 빼면 텅 빈 바깥 공간을 운 좋게 차지하고 앉아 내부를 자세히 살펴볼 수 있게 되었다.

‘주춧돌이 저렇게 높게 나온 걸 보니, 아무래도 아래로 파고 들어간 것 같지?’
‘저렇게 노출되어 있으니까 참 멋스럽다.’
‘매번 과하게 인테리어 할 생각만 했는데 이런 방법도 있다니.’

있는 그대로 즐기지 못하는 직업병이 생겨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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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가 절로 움츠러드는 쌀쌀한 날씨라 따뜻한 라테와 에티오피아 핸드드립을 주문했다. 오래간만에 찾은 애정하는 도시에서 마시는 커피 맛은 평소보다 훌륭하다. 강한 산미와 베리류의 달콤함에 나른했던 정신이 번쩍 뜨여 여행가의 마음이 달아오른다.

"빨리 시내로 나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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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차를 타고 (구) 경주역을 지나 대릉원으로 향한다. 대릉원은 쌀쌀한 날씨에도 꼭 걷고 싶은 곳이다. 얼굴도 모르는 남의 무덤이 왜 이렇게 좋은지 알다가도 모를 노릇이다. 어린 시절 초등학교 단골 소풍지는 인근 홍릉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이라 무덤 꼭대기에 올라가 썰매를 타듯 엉덩이를 끌고 내려오거나 언덕에서 우다다 달려오는 놀이를 즐겨했다. 지금은 꿈도 못 꿀 일이다. 대릉원처럼 무덤을 보호하기 위해 울타리를 쳐놨을 것이다. TV 프로를 보면 옛날엔 대릉원에도 올라가고 첨성대에도 매달려 사진을 찍었다는데 나중에 자식들에게 들려줄 수 있는 그야말로 옛날 일이 되었다.


외국인 눈에 대릉원은 아름답게 꾸며진 정원처럼 보이지 않을까. 한국인보다 외국인 비율이 많은 걸 보면 이들은 대릉원이 어떤 곳인지, 천마총에 무엇이 보관되어 있는지 잘 알고 있는 모양이다. 어쩌면 나보다 더 잘 알지도 모른다. 오래간만에 나선 경주 나들이에 역사보다 꽃나무에 시선을 빼앗겨 산책하듯 대릉원을 천천히 걷는다.


'꼬르륵'

갑자기 허기가 몰려왔다. 대릉원 한 바퀴만 돌아도 오천 보는 족히 될 것이다. 안 그래도 점심때를 놓쳐 급히 뭘 먹어야 하나 찾아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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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여행 때마다 묵던 숙소가 있다. 적어도 서너 번은 묵었던 숙소인데 걸어가며 보던 풍경과 달라 못 알아볼 뻔했다. 어쩐지 낯익은 풍경이 창밖으로 보여 속도를 줄이고 두리번거리다 보니 화랑초등학교가 있는 동네였다. 시내와 조금 떨어진 게스트하우스라 숙박비가 싸서 자주 애용했는데 당시엔 뚜벅이 신세에 늘 걸어 다녔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오히려 버스 잡는 게 더 곤욕이었고 택시비 아깝다고 먼 거리를 걷느라 여기에는 레스토랑, 옆집엔 카페, 맞은편에 초등학교, 하나하나 눈도장을 찍으며 다녔다. 그때는 힘든 줄도 모르고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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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동생과 함께 놀러 왔을 때 '나귀 소사이어티'라고 이름이 특이한 식당에서 맛있는 저녁을 먹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가게 이름만큼이나 특이한 파스타와 피자를 파는 양식당이었다. (파스타 이름은 '둥지'였다.) 그때만 해도 식당 하나와 카페 하나가 전부였는데 드문드문 새로운 상점들이 눈에 들어온다. 식당은 그대로였지만 안타깝게도 카페는 사라졌고 근처에 새로 생긴 분식집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래도 황리단길보다 변화 속도가 느린 모양이다. 옛 추억에 잠겨 간단하게 분식집에서 요기를 하기로 했다.

'경주의 분식집은 어떨까, 밖에서 김밥 사 먹은 지 오래되었는데 김밥이나 먹자.'

지역마다 특산물을 활용한 음식점이나 방송에 소개된 유명한 맛집들이 즐비하지만 요즘엔 우연히 들르는 평범한 식당, 일상적인 음식에 더 끌린다. 이 작은 나라에도 여러 개의 억양이 있는 것처럼 지방마다 고유의 식문화가 있지 않을까, 어쩌면 가장 평범한 음식이 가장 다른, 독특한 맛을 낼지도 모르겠다.


초등학교 앞 분식집의 주요 메뉴는 김밥이었다. 보기에도 건강한 재료가 가득 들어간 김밥은 엄마가 싸준 김밥처럼 담백하고 든든했다. 아무래도 동네 김밥집으로 유명한지 사람들이 줄지어 들어와 김밥을 포장해 갔다. 땡초가 들어간 매콤한 김밥을 오물오물 씹으며 다음 목적지를 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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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평평한 경주에서 자전거 투어는 절대 빼먹으면 안 되는 액티비티다. 말이 투어지 그냥 자전거를 빌려서 경주 한 바퀴 도는 일정인데 굳이 대여샵에 가지 않더라도 거리에 공유 자전거가 많아 눈에 띄는 대로 빌려 첨성대로 향했다. 천천히 페달을 밟아 첨성대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유채꽃밭을 훑은 다음 관광객을 태우고 서행하던 비단벌레 셔틀버스를 앞지른다. 상쾌한 바람에 피곤한 줄도 모르고 첨성대 일대를 달려 황리단길로 향했다.


황리단길은 옛 모습을 많이 잃어버린 듯하다. 아주 추운 겨울날 내일로 여행을 하던 시절 들렀던 황리단길은 수수하지만 멋스러웠다. 독립서점, 카페, 소품샵, 음식점 등 색이 뚜렷한 사람들이 모여 만들어가던 초창기 황리단길은 사라지고 경주와 크게 관련 없는 업종이 자리를 차지해 버렸다. 초기부터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가게는 '독립서점 어서어서', '소품샵 삼릉베리공원', '대릉원사진관' 정도만 남아있다. 씁쓸하다. 높아진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했을까, 아니면 사람들의 관심도가 떨어진 것일까. 아기자기한 건물 크기만 다를 뿐 명동 한 복판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여전히 관광객이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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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일에도 사람이 많은 황리단길에서 빠져나와 경주빵을 사러 나왔다. 해가 질 때까지 한두 시간 남았다. 이미 마음은 서쪽으로 기울었는지 옅은 빛이 서서히 번진다. 자전거를 타고 아무도 가지 않을 것 같은 작은 골목으로 숨어들면 관광객의 소음과 차단된 고요가 있다. 새가 지저귀고 넓은 평지에 덩그러니 놓인 누군가의 무덤이 봉긋 솟아 나를 바라본다. 아직 살아있는 나는 달콤한 경주빵을 한입 베어 물고 여유롭게 그 앞을 지나간다. 저 평지 너머에서 고도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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