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생존 요리
어린 시절 우리 집은 미숫가루를 집에서 직접 해 먹었다. 농협에서 대여섯 가지 곡물을 사 왔고, 헨젤과 그레텔 속 마녀가 쓸 법한 커다란 솥에 넣고 오랜 시간 찌면 집안에 고소하고 달콤한 곡물 냄새가 퍼졌다. 뜨끈한 수증기가 창문에 맺히고, 커다란 솥을 다루느라 벌겋게 달아오른 엄마의 양 볼이 절정에 이를 때쯤 거실은 헨젤과 그레텔을 유혹한 달콤하고 고소한 과자 냄새로 가득했다.
공기 중에 달콤한 곡물 향이 스며있다. 깊이 숨을 들이쉬면 싱그러운 풀잎과 달콤한 볍씨가 앞다퉈 폐부로 밀려 들어온다. 차창 밖 공기는 후텁지근 하지만, 시속 40km로 달리는 시골길은 생각보다 시원하다. 곧 있으면 추수철이다. 짧뚱하던 벼 모종이 제법 자라 고개를 숙이고, 개중에 성장이 빠른 아이는 혼자 우뚝 솟아 다른 녀석들을 내려본다. 길쭉하게 자란 벼가 더위에 푹 익어버린 건 아닌지 걱정될 정도로 동네는 고소한 달콤함으로 가득하다. 어린 시절 집에서 미숫가루를 찔 때 나던 냄새가 난다.
덥지만 맑은 여름 날씨 덕에 퇴근길 구름은 유독 아름답다. 특히 해 질 무렵 주홍빛으로 물든 구름은 보기만 해도 새콤한 맛이 연상되어 입 안에 침이 고인다. 구름을 양손에 쥐고 있는 힘껏 짜면 오렌지 주스가 나올 것만 같은 빛깔이다. 이런 날엔 뭘 먹으면 좋을까?
마침 집에 토마토 한 박스가 있다. 아침에 출근하면서 ‘저대로 두면 출근한 사이 더운 날씨에 물러버릴 게 분명한데 오늘 토마토 파스타를 해 먹어야겠다’라고 생각한 참이었다. 토마토는 내가 가장 잘 다루는 재료다. 혼자가 되어서야 물가는 비싸고, 요리보다 정리가 귀찮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평생 엄마 아빠 그늘에 살다가 외국에 나가게 되면서 온전히 독립하게 되었고, 끼니를 스스로 챙기기 시작했다. 밥을 해 먹는 일은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었다.
파리에서 토마토는 내가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재료였다. 싸고, 싱싱하고, 변화무쌍했다. 이 시기에 해 먹은 요리를 나는 토마토 생존 요리라고 명명했을 정도로 매 식탁 토마토가 올라왔다. 1유로가 아쉬운 여행자는 숙소 앞 까르푸의 단골이 되어 매일 저녁 외출 후에 참새가 방앗간 들리듯 할인하는 품목을 노리곤 했다. 파스타 면도 가장 저렴한 것, 소스도 가장 저렴한 것, 크게 차이 나지도 않는 소스를 양손에 각각 들고 가격과 그램 수를 비교하고, 맛이 크게 다른지 따져보다가 장 보는 데 1시간이나 걸리기도 했다. 파리에 도착한 첫날 토마토, 치즈, 토마토소스, 파스타면,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유, 소금과 후추 등을 사서 일주일 내내 토마토 파스타, 토마토 브르스케타, 올리브 뿌린 생토마토, 토마토 카프레제... 할 수 있는 토마토 요리를 모조리 섭렵했다. 파리의 외식문화는 비싸지만, 식재료는 한국보다 저렴했다.
에어비앤비의 좁은 부엌에서 숟가락으로 한 개뿐인 프라이팬에 면도 삶고, 토마토도 볶고, 소스도 만들고 만능 요리를 했다. 영화 <줄리 앤 줄리아>에 나오는 요리 장면은 나를 실험의 세계로 이끌었고, 싱싱한 토마토를 완벽한 큐브 모양으로 써는 장면은 아름다워서 넋을 잃을 정도였다. 까르푸에서 가장 단단하고 새빨간 토마토 3개를 사 왔다. 줄리가 토마토 부르스케타를 만드는 장면을 틀어놓고, 똑같이 토마토를 썰고, 양파를 썰고, 양념을 뿌리고 영화 속 장면에 따라 움직이다 보면 절묘한 시간에 요리가 완성되었다.
프랑스는 와인이라지만, 한 달 동안 한 병을 다 못 마실 것 같아 맥주를 샀는데, 매일 저녁 마신 맥주 500ml 한 캔을 모두 합하면 와인을 서너 병 사도 됐겠다는 생각이 든다. 매일 저녁, 발코니 문을 활짝 열고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과 봐도 봐도 질리지 않을 에펠탑을 바라보며 배경 음악처럼 영화를 틀어놓고 시원한 맥주 한 잔과 나만의 토마토 생존 요리를 즐겼다.
파리에서 한 달 내내 쓰던 후추, 올리브유, 소금을 꼼꼼하게 포장해서 그대로 싸 왔다. 아깝기도 했고, 왠지 파리를 떠나더라도 비슷한 맛을 낼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재료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여름휴가를 마치고 돌아와서도 한동안 토마토 생존 요리를 해 먹었다. 토마토를 보면 그리움이 가시는 기분이었다.
음식에는 추억과 감정이 집약되어 사진이나 영상보다 때론 생생한 기억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오늘 저녁은 그 시절 만들던 토마토 파스타를 만들어 보기로 했다. 먼저 토마토를 깍둑 썬다. 썰다 보니 토마토만 한 움큼이 되어버렸지만, 문제없다. 그냥 몇 개 집어먹으면 되니. 편으로 썬 마늘과 올리브유를 넣고 같이 볶다가 토마토를 넣고 소금과 후추로 간을 한다. 토마토가 뭉개질 때까지 볶는다. 이제 원하는 대로 재료를 넣으면 된다. 마침 동네 전통 시장에서 한 바구니 사 온 표고버섯이 있다.
풍미가 좋은 표고버섯을 토마토보다 많이 썰어 프라이팬에 집어넣고 짧게 볶다가 토마토 퓌레나 간이 덜 된 소스를 가득 붓고 약불에 끓인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소스 표면에 기포가 퐁 퐁 터질 때까지 창가에 의자를 가져다 놓고 앉아 멍하니 밖을 바라본다. 비록 에펠탑은 없지만, 아직 오렌지를 머금고 있는 구름과 아름다운 하늘이 있다.
토마토는 여름철의 따뜻한 기후와 비옥한 토양 덕분에 6월부터 9까지 가장 맛이 좋다. 내가 서 있는 곳은 매번 달라지지만, 제철의 맛은 늘 다시 돌아온다. 땀이 흐를 정도로 더운 날씨, 기억을 꺼내 토마토를 볶아본다. <줄리 앤 줄리아>를 틀어놓고 토마토로 만든 나만의 생존 요리를 즐길 수 있는 시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