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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래 Jul 05. 2019

킬리만자로 그림자만 보았네

달에살람 혹은 다르에스살람




너 거기 갈 거면 지금 몸에 걸치고 있는 거 다 방에 두고 와. 여권, 신용카드, 핸드폰 이런 거 다 놓고 가야 해!
왜?
왜긴, 지나가던 오토바이가 확 채 갈 거야


의욕을 확 꺾어버리는 무시무시한 조언이다. 가방에 든 건 노트 한 권과 책이 전부인데 말이야. 

호텔에서 20 ~ 30분만 걸어가면 있다는 열대우림 느낌 가득한 카페에 들러 아침도 먹고 바로 옆에 있는 바닷가에서 산책하다 돌아오면 되겠다고 생각한 내가 순진한 거였다. 여기가 무슨 휴양지도 아니고 종종 폭동이 일어나 밖에 나가는 것도 조심해야 하는 탄자니아인데 말이다. 비행 전 브리핑 룸에서 한 크루가 말하길 이번이 두 번째 달에살람 비행인데 저번에 갔을 때는 폭동이 일어나서 호텔에만 쳐 박혀 있었단다. 진짜인지 아닌지도 모를 이야기지만 듣고 나니 꽤나 무서웠다. 


도하에서 킬리만자로를 거쳐 달에살람까지 가는 두 섹터 비행 일정. 처음엔 킬리만자로에 가는 줄 알고 꽤나 흥분했었다. 킬리만자로의 그 표범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신나서 검색하다 킬리만자로가 탄자니아에 있는 것도 이번에 처음 알았다. 아프리카 어딘가에 있겠구나 싶었던 나의 무식함이 탄로 나는 순간이다. 킬리만자로 보고 설렜던 마음이 최종 목적지 달에살람(Dar es salaam)을 보고 나니 혼란스러웠다. Dar es Salaam 이라니. 어떻게 읽는지도 모를 정말 생전 처음 들어보는 곳. 비행하기 전까지는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도시. 


그나저나 정말 아름다운 이름이잖아. 도시 이름이 달에살람이라니. 

달에 산다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터무니없는 상상의 나래가 펼쳐졌다. 아랍문화권을 상징하는 달의 기운을 받아 뭔가 신비로운 기운이 가득한 곳이 아닐까? 여타의 아프리카 대륙에 위치한 도시들과는 다르게 온후한 기후와 달의 정령 같은 사람들이 사는 곳은 아닐지. 상상은 자유다. 

물론 아프리카에 위치한 달에살람은 후덥지근하고, 도시 치안도 불안하여 여자 혼자 걸어 다니는 건 위험하다. 최종 목적지인 Julia Nyerere 국제공항에 도착하기 전 킬리만자로 공항에서 환승을 위해 1시간가량 머물며 먼발치에서나마 킬리만자로를 볼 수 있었다. 비행기 문 너머의 킬리만자로 국제공항은 생각보다 작아서 한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뒤쪽으로 아프리카의 지붕이라는 킬리만자로의 봉우리가 보였다. 비행기에서 내려 땅 한번 밟아보지 못하고 다시 이륙해야 했지만 내 평생에 킬리만자로 그림자라도 보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을까. 







그렇게 환승객을 태워 달에살람에 도착했고 어디라고 가고 싶었던 나는 호텔 근처에 위치한 Palm Beach(팜비치)와 카페를 찾아냈다. 사실 교통수단이 잘 발달되어 있거나 치안 유지가 잘 되는 유명 관광 도시가 아닌 곳을 여행할 때면 언제나 부족한 시간과 이동수단이 아쉽다. 가고 싶은 곳들이 제각각 위치해 있어 이동 시간이 오래 걸리거나 대중교통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띄엄띄엄 있는 버스. 이런 곳을 대충이라도 하루 만에 둘러보기란 불가능이다. 설사 택시를 부른다 해도 어리바리한 외국인 여자는 떼여먹기 딱 좋은 타깃이다. 

그래도 머무는 호텔에서 30분만 걸어가면 바다가 있고 보기에 딱 내 취향인 카페가 있길래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위치 확인 차 길을 물어보러 호텔 리셉션으로 향했다.



나 여기까지 산책 가려고 하는데 이쪽 길로 가는 게 경치가 좋을까 아님 저쪽 길로 가는 게 나을까? 
(무표정으로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혼자서 걸어서 바다까지?
그럴 거면 지금 몸에 걸친 거 다 방에 두고 와!
(그녀는 마치 제정신이냐 지금? 털리고 싶어?라는 눈빛으로 말했다)
왜? 조금 위험할까?
오토바이가 니 가방을 채갈 거야 아마



원래 겁대가리 상실한 걸로 유명한데, 크루에게 들은 ‘폭동’과 ‘오토바이 날치기’가 머릿속에서 뒤섞이며 아침 외출이 망설여지기 시작했다. 해가 이렇게 높게 떴는데 설마 뭔 일이야 일을까 싶으면서도 호텔 로비를 서성거리며 깊은 고민에 빠져 한참을 망설이다 에라 모르겠다 라는 심정으로 차선책으로 봐 뒀던 the Ridge café로 향했다. 결의에 찬 표정으로 문을 나서는 나에게 로비보이 역시 지도 보는 관광객 흉내를 내며 ‘이러고 다니지 마’라며 진지하게 충고했다. 그들의 충고가 단순히 겁주기 위하 것이 아님이 분명한 게 도로를 따라 걷다가 엄청난 규모의 피자헛을 지나쳤는데 그곳에도 곤봉을 든 경비원들이 지키고 있었다.







호텔에서 걸어서 5분 거리인 The Ridge Cafe는 제주도를 연상케 하는 곳이다. 4차선 메인 도로를 따라 걷다 보면 정말로 뜬금없이 제주 감성카페가 떡하니 등장한다.

오토바이가 오나 안 오나 뒤통수의 신경을 곤두세우며 승모근에 잔뜩 힘을 주고 경보하듯이 걸었더니 갑자기 피곤하면서 허기가 졌다. 남은 힘을 짜내서 나무 문을 열고 들어서니 의외의 적막이 나를 반겼다. 


설마 내가 첫 손님인가? 분위기는 나쁘지 않은데 말이야. 내가 들어선 건 못 본 걸까? 

입구에서부터 열발자국에 불과한 거리를 일부러 슬리퍼를 찍찍 끌며 손님이 왔다는 걸 티 내며 요란하게 주문하러 갔다. 무뚝뚝하게 나를 반기는 바리스타와 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메뉴를 정독하느라 어색한 적막감이 30초는 더 지속되었고 바리스타도 어색함을 눈치챘는지 그제야 주섬주섬 스피커를 꺼내더니 음악을 틀더라. 

음악을 트니 더욱 제주 감성이 되어버린 The Ridge Café. 








메뉴가 많은 것도 아닌데 오늘이 이곳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방문할 거라고 생각하니 괜히 신중해졌다. 딱 하나 남아있던 샌드위치를 가리키며 뭐가 들었냐고 물어보니 치킨 샌드위치란다. 엄지손톤만 한 왕초코가 박힌 두툼한 쿠키를 먹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양심상 아침 공복에 쿠키를 먹을 순 없었기에 치킨 샌드위치를 주문했다. 

 

나 사실 커피 되게 좋아해. 그래서 막 다들 말리는데 여기까지 걸어왔다? 오늘 라떼를 마시고 싶은데 플랫 화이트를 더 좋아하긴 해. 라떼랑 플랫 화이트 둘 중에 뭐가 더 맛있어? 

물어보지도 않은 소리를 해가며 자꾸 말을 거니 의외로 원두는 어느 지역에서 난 거고, 이게 더 진한 향이 풍긴다, 진한 거 좋아하면 카푸치노를 마시는 게 좋을 거다라며 바리스타는 무표정하지만 친절하게 이것저것 설명해줬다. 경험상 이곳 사람들은 대게 무표정하다. 하지만 화가 났다거나 상대방에게 관심이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처음 보는 승객을 맞이하는 나의 입꼬리가 별다른 생각이나 의미 없이 저절로 올라가 있듯이 이들의 표정은 그냥 무표정할 뿐이다. 꼬치꼬치 물어봐도 귀찮은 내색 하나 없이 조곤조곤 대답해 준다.







카푸치노는 메뉴에 없는데?
카푸치노가 플랫 화이트야.
(알고 보니 플랫 화이트라고 써놓고 괄호로 카푸치노라고 소개해 놓았다)


결국 하나 남은 샌드위치와 추천해 준 카푸치노를 주문했다. 주문하느라 미처 눈치채지 못했던 카페 구석 찬장에 원두 봉지가 나란히 서있었다. 물어보니 직접 로스팅도 해서 원두를 판매하고 있단다. 

거 참. 제대로 찾아왔구먼. 원두 이름도 킬리만자로와 탄자니안 피베리였다. 마침 카디프에서 산 원두가 떨어진 참이었는데 내일부터 다크한 킬리만자로를 마실 수 있겠다는 생각에 솟았던 승모근도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바리스타와 나란히 서서 이것저것 물어보며 원두 구경을 하고 있는데 백인 여성이 들어와 반갑게 인사하더니 익숙하게 자리를 잡고 맥북을 꺼내 올려놓더니 바로 의자 아래 충전기를 꽂고 이내 집중모드로 돌아섰다. 이후로도 아시안, 아프리칸 등 다양한 국적의 손님이 3명 정도 더 들어왔고 저마다 맥북, 아이패드, hp랩탑 그리고 노트 등을 펼쳐 놓고 자기 일에 집중하며 커피를 즐겼다. 정말이지 카페 안은 다국적이었다. 

좀 더 진하다는 킬리만자로 원두를 선택하고 갈아달라고 부탁까지 한 후 자리를 잡았는데 마침 눈앞에 킬리만자로가 펼쳐져 있었다. 카페의 한쪽 벽면을 차지하고 있는 쪼개 놓은 킬리만자로 그림이 정면으로 보였다.







커피를 홀짝거리며 통유리 너머로 쌩하니 지나가는 자동차, 사람으로 꽉 찬 낡은 버스, 옷, 가방, 장신구, 신발, 과자 등 온갖 물건을 늘어놓은 노점상을 흘끔거리며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노점상의 무지갯빛 파라솔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창 밖으로 부슬부슬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햇빛은 여전히 쨍한데 비가 내리는 걸 보니 호랑이 시집가는 날인가 보다. 오랜만에 만나는 날씨다.

탄자니아 달에살람까지 가서 고작 몇 분 걷다가 카페 다녀온 게 다냐고 타박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앞으로 한 달 동안은 킬리만자로를 마실 수 있으니 만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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