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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래 Jul 06. 2019

모스크바 13시간의 깨달음

뜬금없는 환경 걱정과 애국심에 관한 주저리






호텔 화장실에서 보기 좋게 미끄러졌다. 머리를 감으려고 샴푸를 쭉 짜다가 샴푸통이 손에서 미끄러지면서 욕조 밖으로 날아갔고 아무 생각 없이 이를 집으려고 바닥에 발을 디딘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바닥에 누워있었다. 아프다기보다 어리둥절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욕실 바닥에서 미끄러진 건데 도무지 어쩌다 벌어진 일이지 영문을 모르겠어서다. 무릎에 크게 멍이 들긴 했는데 다행히도 보이는 곳엔 상처는 없었다. 어디 크게 상처가 났거나 다치기라도 했으면 한동안 비행도 못하고 도하에 갇혀있을 뻔했다. 

(보이는 곳에 상처가 생기면 상처가 사라질 때까지 비행을 금지당한다)


아니 하체가 부실해졌나? 근데 왜 미끄러진 순간이 기억이 안 날까? 설마 잠시 정신을 잃었나?

아, 당이 부족해서 그렇구나.


그 길로 당 충전하러 갔다. 

모스크바 레이오버는 13시간이다. 말이 13시간이지 비행기 도착 시간이 연착되거나 호텔까지 가는 길이 막혀 험난하다면 10시간 혹은 그 이하가 되기도 한다. 짧은 시간 동안 어딜 가는 건 불가능이다. 뭐 가능하긴 한데 다음 비행도 생각해야 하고 그다음 비행도 고려해야 하니 체력 보충을 위해 그냥 자고 먹는 시간으로 쓴다. 

다행히도 호텔 바로 앞에 쇼핑몰이 있어 유일한 카페인 스타벅스로 향했다. 





비행할 때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 여행할 때면 종종 스타벅스에 들리곤 한다. 냉장고 자석이나 열쇠고리 대신에 스타벅스에서 ‘Here I am’ 시리즈 컵을 사거나 그 나라에서만 파는 메뉴를 (시키지는 않고) 구경만 한다. 사실 각 도시의 명소나 이름이 새겨져 있는 머그컵 시리즈와 소수의 메뉴를 제외하고는 스타벅스 매장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음악이나 인테리어, 바리스타의 초록색 앞치마는 전 세계 어디든 동일하다.






물론 눈에 띄게 다른 점도 있다. 바로 머그컵을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아, 장식용으로는 사방에 걸려있긴 하다. 하지만 모든 음료는 플라스틱 혹은 종이컵에 담겨 나온다. 

바리스타는 ‘머그컵으로 할래? 플라스틱으로 할래?’ 물어보지 않는다.


우리나라는 2019년 1월 1일 자로 자원 재활용법 개정안이 시행되고 있고 카페에서 테이크아웃하는 게 아닌 이상 플라스틱 컵과 빨대 사용이 금지되어 있다. 미국의 몇몇 주에서도 빨대 금지령이 내렸다는데 내가 안 가봐서 모르겠다. 스타벅스의 경우 초록색 플라스틱 빨대가 아니라 하얀 종이 빨대로 바뀌었다가 요즘은 이마저도 없애고 있는 추세다. 지난달 인천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스타벅스에 가서 아이스 라떼를 주문했었는데 사라진 빨대 대신 입을 대고 마실 수 있도록 플라스틱 리드의 구멍이 커진 걸 볼 수 있었다.


환경에 대한 세계적인 관심은 날로 높아지고 있다. 1988년 제임스 핸슨가 미국 의회에서 기후변화에 대해 증언한 역사적인 순간을 기점으로 1997년 교토의정서가 체결되었고, 2015년에는 무려 195개국이 참여한 파리협정이 탄생했다. 각계각층에서 환경을 보호하기 위한 여러 움직임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지만 그 실효성은 잘 모르겠다는 비판의 의견도 많다.





그럼 나 식사 안 할래




승무원이 되고 나서 제일 충격을 받은 사실은 어마어마한 한 달 비행시간도 형편없는 나의 체력도 아닌 바로 한 번의 비행마다 배출되는 플라스틱의 양이었다. ‘항공업계에서 하루에 배출되는 쓰레기의 양은 어느 정도일까?’를 놓고 크루들과 자주 이야기하곤 한다. 기내 대부분 소모품은 플라스틱이다. 플라스틱 컵, 식사용 접시, 커피 스틱 등 전부 플라스틱이다. 재활용은 하지 않는다. 물론 청결상의 이유와 승객의 안전상의 이유 때문이다. 무엇보다 비행기 안에서 분리수거를 하고 있을 시간과 사람이 부족하다. 매일같이 비행하는 승무원들의 경우 나처럼 쓰레기 양을 보고 충격을 받아 개인 텀블러를 들고 다니기도 하고 플라스틱 컵 대신에 종이컵에 이름을 적어놓고 비행 내내 사용하기도 한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카디프에서 도하로 돌아오는 비행이었는데 런치 서비스 중이었다. 한 승객에게 메뉴를 물어봤는데 그 승객이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너네 이거 재활용하는 거야?


그때는 ‘바빠 죽겠는데 이런 걸 뜬금없이 왜 물어보는 거지?’ 싶었다. 치킨인지 비프인지 물어봤더니 두서없이 재활용 여부를 물어보다니 이해가 가지 않아 다시 물어봤다.


뭐라고? 우리 지금 점심 서비스 중인데 비프가 좋아 치킨이 좋아?
(친절을 담아 메뉴를 상세하게 읊어줬다.) 
아니, 지금 그 쟁반에 있는 플라스틱을 몇 퍼센트 재활용하냐고


실제로 쟁반(트레이)에서 재활용하는 비율은 상당히 높다고 생각한다. 일단 쟁반, 디저트나 샐러드가 담긴 접시와 식기는 재활용하고 있다고 알고 있다. 


절반 정도 재활용되고 있어

그러자 그가 말했다. 

그럼 나 식사 안 할게


그는 나에게 대왕 텀블러를 내밀며 물을 채워 달라고 했고 그때는 워낙 바빠서 아무 생각 없이 물을 가득 채워주고 서비스를 마쳤다. 알고 보니 플라스틱을 재활용하지 않는 곳에서는 식사를 하지 않는 환경 운동도 있다고 하더라. 





트레이닝 기간 동안엔 이런 일도 있었다. 일정 중 문화적 다양성에 대한 교육을 받는 수업이 있었다. 삼삼오오 그룹을 만들어 도하에 와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문화적 차이에 대해 한 명씩 이야기하는 시간이었다. 나는 당연히 분리수거 문제를 이야기했다. 음식물, 재활용, 쓰레기 구분 없이 한데 넣어 그냥 긴 통로에 던져 넣으면 되는 게 정말 너무나도 충격적이었다. 그러자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아이들이 나를 이상하게 쳐다봤다.

‘그게 왜?’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곳에 있던 20명의 교육생 가운데 나와 동의할 수 있었던 사람은 단 한 명, 또 다른 한국인뿐이었다. 나는 쓰레기 종량제 봉투부터 카페에서 플라스틱 컵 사용금지 등 다양한 사례들을 설명해 줬고 그 아이들이 도리어 깜짝 놀라며 그게 가능하냐고 입을 모아 물어봤었다.


환경과 관련된 이슈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서 비행기 안의 엄청난 양의 쓰레기를 볼 때마다, 매일 새벽 숙소 건물의 모든 쓰레기를 한 번에 수거해 가는 트럭의 삐익 – 삐익 소리를 들을 때마다 회의감이 든다. 여기서 쌓은 포인트가 저기서 깎이면 사실상 제로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한쪽에선 환경보호한다고 종이 빨대조차 쓰지 않는데 지구 반대편에선 분리수거는커녕 음식물 쓰레기까지 한데 묶어 버리고 있다. 이렇게 되면 아무리 소리 높여 환경 운동을 한들 무슨 소용일까? 나는 지식으로 무장한 환경 운동가가 아니라 대안이나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처럼 유명하지도 않아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없지만 관심 정도는 갖고 나름의 환경보호를 실천하고 있다. 텀블러를 사용한다던가 시장을 볼 때면 에코백을 들고 간다던가.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나의 작은 행동이 환경 보호에 기여할 거라고 믿는다.


무리 안에 있을 땐 몰랐지만 울타리를 나와 타인의 시선으로 보면서 깨닫는 바가 많다. 헬조선이라며 청년이 살기 힘든 나라라고 한국에서 살고 싶지 않다고 입버릇처럼 떠들고 다녔는데 알고 보니 우리나라는 꽤나 살기 좋은 나라다. 유럽의 선진국 어느 나라를 가봐도 우리나라처럼 분리수거에 대한 철저한 시민의식과 새롭게 시행되는 환경법안이 초반부터 제법 잘 지켜지고 있지 곳을 찾아보기 힘들다. 해외에 나오면 다 애국자 된다는 말에 콧방귀를 뀌었었는데 내가 바로 그 애국자가 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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