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년 전 오픈데이와 일년 후 지금 비행하는 나
뭔가 감회가 새롭다. 이곳에 다시 오게 될 줄이야.
외항사 승무원이 되겠다고 결심한 이래 총 3번의 면접을 봤는데 첫 번째 면접이자 해외 오픈데이에 도전했던 곳이 바로 에어아시아X 였다. 일 년도 더 된 작년 2월 이야기다. 회사에 다니면서 외항사 면접이나 오픈데이에 대한 사전 정보도 별로 없을 때 일단 도전하고 보자는 심정으로 과감히 비행기 티켓 먼저 끊었던 것 같다.
(*에어아시아X 는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 본사를 둔 LCC 항공사입니다)
오픈데이에서 떨어지더라도 해외여행 한 셈 치자. 오랜만에 쿠알라룸푸르 사는 친구들도 좀 만나고 좋지 뭐.
하루 종일 에어아시아 본사에서 면접을 보고 쿠알라룸푸르 시내를 둘러봤었다. 페트로나스 타워에 가서 사진도 찍고 네덜란드 광장에도 갔었고 바투동굴에도 갔었다. 당일 결과가 나오는 게 아니라서 시원하게 면접 보고 마음 편히 돌아다녔던 걸로 기억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항공계 소식이라라던가 승무원에 관해 아는 게 전무했다.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 비행기 기종이라던가 각 항공사별 특색이라던가 승무원이 실제로 무슨 일을 하는지조차 몰랐던지라 오히려 아무 걱정 없이 편안하게 면접을 봤던 것 같다. 부담감 없이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진행된 첫 면접의 좋은 기억 덕분에 끝까지 도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비행기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승무원의 업무 범위가 어떻게 되는지 뻔히 알고 있는 지금, 그때와 똑같은 마음으로, 자세로 면접을 볼 수 있겠냐고 물어본다면…대답은 '글쎄...'다.
비행기 안은 작은 공동체와도 같다. 인구 300명 ~ 400여 명 정도 되는 지구촌 마을로 하늘 위에서 몇 시간에 불과한 작은 세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개인마다 국적, 나이, 성별, 직업, 경험 등이 달라 다양성을 자랑하는 만큼 동일한 수준의 이해가 형성되기 힘들다. 따라서 크고 작은 사건들이 발생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발생하는 사건 말이다. 좌석이나 개인 공간 문제로 승객들 간의 언쟁이 벌어지기도 하고 승객과 크루 사이에 문제가 생기기도 한다. 물론 크루들 사이에도 갈등이 발생한다. 지난 몇 개월 동안의 비행은 성악설을 믿는 나에게 더욱 확고한 믿음을 심어줬다. 인간은 평화롭게 못 사는 종족이라는걸.
함께 비행하는 크루들은 그날 만나서 그날 혹은 그 다음날 헤어지는 몇 시간짜리에 불과한 인연이지만 그 안에서도 갈등이 발생하고 조정이 이뤄진다. 가끔은 이간질도 벌어진다. 신기하게도 처음 대면하는 브리핑 룸에서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는 게 어렵지만 보딩을 시작하는 순간 윤곽이 나오기 시작한다. 더 무서운 사실은 한 개인에 대한 첫인상과 평가는 개인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해당 국적에 대한 일반화로 이뤄진다는 사실이다. 성급한 일반화는 오류를 범한다는데 대부분 맞아떨어진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예를 들어, 태국과 필리핀 크루들은 대체적으로 성실하다는 평이 자자하다. 꼼꼼하고 일 잘하기로 소문난 두 국적의 크루들은 개성이 강하지 않아 두루두루 어울린다. 하지만 깊게 친해지기도 힘들다. 회사 내 인구 비중 2위, 3위를 차지하는 두 국적 크루들은 그들끼리의 커뮤니티가 강해서 굳이 다른 나라 크루들에게 마을을 주지는 않는다. 한국인에 대한 평판도 좋은 편이다. 굉장히 독립적이고 야무지다. 맡은 일이 아니더라도 진행이 더디게 된다 싶으면 그냥 두고 보지 못하고 자발적으로 도와준다.
회사의 주요 인구 비중을 차지하는 서남아시아 크루들은 모 아니면 도다. 지극히 성실하거나 더럽게 게으르거나. 때로는 야망에 가득 차 회사에 대한 지나친 충성심으로 다른 크루들을 힘들게 하는 경우도 있다. 크루들 사이에 퍼져있는 국적에 대한 일반화와 온갖 소문 그리고 일화를 처음엔 반신반의하다가 본인이 직접 겪게 되면 이해할 수 있다.
경험과 문화적 다양성에서 오는 충격도 만만치 않다. 잘난척하는 건 아니지만 사람들은 생각보다 무지하고 무신경하다. 회사에서 백날 문화적 다양성 교육과 EQ 트레이닝을 진행해봤자 본인이 하는 말과 행동이 인종차별인지 민감한 이슈인지 모르거나 무시하거나 인지하고 있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나도 아무 생각 없이 말을 뱉어 말실수하는 경우도 있다.)
또 드라마 펼쳐진다
Drama again
1
하루는 동유럽에서 온 크루가 갑자기 밥을 먹는 내게 물었다.
그래서 너는 평양에서 온 거야?’
처음엔 잘못 들은 줄 알고 다시 물어보니 평양에서 도하까지 어떻게 왔냐고 물어보더라.
평소 같았으면 무시했을 질문이지만 바쁜 서비스를 겨우 끝내고 한쪽에 서서 밥 먹던 와중에 그런 질문을 받으니 짜증이 솟구쳐 표정관리를 못했다. 아마 얼굴이 형편없이 구겨졌을 텐데 내 표정을 본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은근슬쩍 꼬리를 감췄다.
2
동기가 겪은 일이다. 회사 건물에서 나와 비행기로 향할 때 크루들은 항상 지문, 동공 인식을 통과해야 한다. 시스템이 형편없어 인식을 못 하는 일이 비일비재한데 동기의 지문과 동공을 인식하지 못하는 기계 때문에 시간이 걸리자 동아프리카 출신의 부사무장(CS)이 이렇게 말했단다.
(손으로 두 눈을 가리키며) 너 눈이 너무 작아서 인식 못 하나 보다. 하하하
이코노미를 관리 감독하는 CS(부사무장)이란 사람이 할 말은 아니지 않은가?
3
한국인들은 눈 뜨고 잔다며? 절반 정도 이렇게!
ㅡ 나: 아 사람에 따라 다르지. 한국인이 그런 게 아니라 그런 사람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겠지.
아 근데 눈 뜨고 자도 너넨 구별 안 가겠다. 아시안들은 눈이 작잖아.(혼자서 박장대소)
ㅡ 대만인 크루: 너 인종차별주의자야??
심지어 그 크루는 대만에서 온 크루에게 민감한 대만-중국 이슈를 언급하며 이렇게 말했다.
너는 중국 비행 가면 입국심사 통과 못하는 거지?
우연인지 아닌지 위 일화들에 등장하는 크루 3명 중 2명이 같은 나라 출신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CS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크루 사이를 이간질하는 크루들도 있다.
이번 쿠알라룸푸르 비행에서도 한 크루가 모든 크루들에게 사사건건 참견을 하며 훈수를 두더니 나중에 알고 보니 뒤에 있는 CS를 찾아가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치고 있었다.
'아니, 나는 이게 절차라고 애들한테 설명을 해도 쟤네는 이렇게 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일을 두 배로 했잖아'
CS는 그녀를 비행 내내 '슈퍼바이저'라고 불렀다.
무슨 일이 발생할 때마다 크루들은 이렇게 반응한다. 또 드라마 펼쳐지네. 그리곤 신경을 꺼버린다.
여기서 가장 편한 방법은 그냥 방관자가 되는 거니까. 어차피 왕복 몇 시간만 함께하면 끝나는 인스턴트 관계다. 비행을 하면서 인간 혐오증이 생겼다는 한 시니어 크루의 말이 생각난다. 술 취하면 나오는 행동이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이라고 하던데 비행기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고 있노라면 작고 밀폐된 공간에서 인간이 하는 행동 역시 그 사람의 본 모습을 알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고 혼자서 스트레스받고 비행하면서 생겼던 일을 두고두고 곱씹으면 본인만 힘들다. 그냥 랜딩 비어 한 캔으로 잊어버리는 게 최고다. 치익 - 딱! 맥주 캔 따는 소리는 근래 들은 소리중 가장 짜릿한 소리다. 물론 먹는 걸로 풀기도 한다. 이번에도 착륙하자마자 옷만 갈아입고 쿠알라룸푸르 공항 내 국숫집에 가서 가장 매운 국수와 달달한 커스터드 만두를 시켜서 흡입했다.
이런날 맥주가 빠지면 섭섭하지. 타이거 맥주가 든 비닐봉지를 달랑거리며 콧노래를 부르며 호텔로 돌아왔다.
호텔방 침대에 기대 앉아 잠들기 전, 창밖 노을을 안주삼아 마시는 맥주는 행복의 맛이다.
감회가 새로웠다. 나의 첫 면접이자 오픈데이였던 쿠알라룸푸르에 승무원이 되어 다시 찾았다는 사실이.
'나...내가 하고 싶었던 일을 하고 있잖아'
물론 비행은 힘들지만 때때로 찾아오는 소중한 깨달음의 순간들이 단단한 버팀목이 되어준다.
랜딩비어와 함께 어제까지 있었던 일들은 깨끗하게 잊어버리고 다음 비행을 준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