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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래 Sep 08. 2019

취리히, 아무것도 하지 않은 비행

내가 하고 싶은 여행은




꿈같던 한 달 간의 휴식 이후 첫 비행이다. 취리히. 휴가 갔다 오면 퇴사를 장려하는 로스터가 나온다고 했는데 첫 비행으로 취리히를 준걸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가 보다. 분명 나는 내가 원하던 도시에서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한 달을 보냈는데 왜 이렇게 지친 건지 스스로도 의문이다. 아무 생각 안 하고 며칠 누워서 뒹굴거리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다.


이번 취리히 비행은 여러모로 의미 있는 비행이었다. 일단 함께한 F2(이코노미) 크루들의 국적이 단 한 개도 겹치지 않는 구성이었으며 최초로 호텔 밖으로 단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은 비행되겠다. 크루들의 국적이 겹치지 않는 건 참 신기한 일이다. 인도, 필리핀, 태국에서 온 크루들이 모든 비행에 포진해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지금까지 내가 한 모든 비행에선 그랬다. 심지어  CS(부사무장)을 포함한 6명의 이코노미 크루 중 나를 제외한 5명이 필리핀에서 온 경우도 몇 차례 있었다. 신경 쓰지 않는 척했지만 소외감이 드는 건 사실이다. 그래서 그들이 따갈로그어로 대화를 나누면 나는 괜히 바쁜 척을 하거나 그 자리를 피해 캐빈을 걸어 다니곤 했다. 

이번 비행에선 처음으로 부탄에서 온 크루를 만나 나도 모르게 흥분해 그녀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부탄과 0.1%의 인연도 없지만 너무나도 반가웠다. 한 때 '행복'에 심취해 있던 나는 부탄에 가야겠다고 난리를 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부탄에서 왔다는 그녀에게 이야기를 걸고 싶어 좀이 쑤셨다. 모든 서비스를 마치고 잠깐 짬이 나 잠깐 이야기를 하면서 부탄을 여행하고 싶다는 나의 강렬한 의지를 내보였더니 나 같은 애 많이 만나봤다는 듯이 일단 현지 투어와 연락하라고 시크하게 답했다. 행복의 나라 부탄에 대해 열변하는 나를 보며 그녀에게 행복의 나라는 스위스라며 항상 가보고 싶었다며 나의 열정을 되받아줬다. 근데 나는 2018년 UN 선정 행복지수 1위인 나라 스위스를 가는데 왜 아무런 감흥이 없는 건지. 




여행을 하다 보면 종종 영감을 주는 장면을 마주하게 된다. 그것들은 오래도록 인상에 남아 일상의 원동력이 되고 글 쓰는 데 큰 도움을 준다. 작정하고 특정 장면을 찾아가는 경우도 있고 정말 우연 아닌 우연으로 숨 막히는 감동과 마주하기도 하고 혹은 평소엔 그냥 넘겨버렸을 평범한 장면도 그때의 감정과 분위기에 따라 다르게 다가오기도 한다. 거하게 조식을 먹고 방으로 돌아와 의자를 끌어다가 창가에 가져다 놓고 눕듯이 기대앉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데 아침 비행 때문인지 아니면 여행을 서두르는 건지 호텔 입구는 사람들로 분주했다. 삼삼오오 모여 혹은 20인 이상의 단체관광객들이 깃발을 따라 버스에 타거나 미니밴에 타고 하나 둘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그 소란스러운 와중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가죽으로 무장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등장하더니 주차해 놓은 오토바이에 올라타기 시작했다. ‘시내에 호수가 있는데 백조가 우아하게 유영하고 있어’에도 아무 감흥 없던 식어버린 나의 마음에 반짝 불씨가 지펴졌다. 감히 예상해보자면 중국인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이었는데 두꺼운 가죽 재킷과 부츠로 멋을 낸 그들은 헬멧을 쓰고 오토바이에 올라탔다. 그 무리 중 내 눈길을 사로잡은 건 우리 엄마 연세가 되어 보이는 한 여성이었다. 목까지 가죽재킷 지퍼를 끌어올리더니 이내 오토바이에 가장 먼저 올라탔다. ‘오, 그녀가 리더인 건가?’

유럽을 돌아다니면서 알게 된 점은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 (여행이던 취미활동이던) 사람들이 꽤 많다는 점이다. 할리우드 액션 영화에 나올 법한 그런 어마어마한 크기의 오토바이 말이다. 물론 스쿠터를 타고 제주도 여행해본 적도 있고 베트남을 스쿠터를 타고 일주했다는 여행기도 읽어봤다. 하지만 스쿠터랑 저런 오토바이랑은 다르지. 


가죽재킷에 바람을 가르며 오토바이로 여행하는 기분은 어떤 기분일까? 갑자기 나도 밖으로 나가고 싶네  





단기간에 많은 도시들을 둘러보면서 알게 된 점은 세상에 정말 다양한 형태의 여행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단체여행 혹은 개인여행으로 만 알고 있던 여행 혹은 관광의 형태는 오늘날 다양한 형태의 가족이 존재하듯이 나의 편견을 깨부수는 형태로 등장하여 나는 간혹 당황하거나 놀라거나 경이로워한다. 이 여행들을 나누는 범주는 다르다. 일행이 있느냐 없느냐, 어떤 교통수단을 사용하느냐, 여행 목적이 무엇이냐 등 누구와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다양하게 갈린다. 예를 들어, 단순한 도시 관광을 위해 가이드와 함께 단체로 여행하는 고전적인 방법이 있는 반면에 혼자서 보고 싶은 것만 보면서 돌아다니는 혼행이 있다. 도시 구경보다는 맛집에 집중하는 여행도 있고 맛집 중에서도 빵집만 찾아다니는 빵지 순례 여행도 있다. 한 도시에만 오랜 시간 동안 머무는 한 달 살기도 있다. 


최근 들어 내가 꽂힌 여행은 테마 여행으로 그중에서도 전 세계에 있는 크고 작은 서점을 방문하는 일이다. 최근에 파리에 있으면서 그동안 가보고 싶었던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에 들러 헤밍웨이의 <움직이는 축제>를 사 왔다. 검지와 엄지 손가락으로 직접 종이를 넘기는 느낌이 있어야 책을 읽었다고 생각하는 나는 출판업이 쇠퇴하고 종이책이 사장된다는 전망에도 꿋꿋하게 종이책과 종이 잡지를 선호한다. 한국에 있을 때도 종종 독립 서점을 방문하곤 했는데 책을 살 때도 굳이 서점에 가서 하나하나 읽어보고 그 공간을 엿보는 게 재밌다. 대형 서점엔 앉아서 읽을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고 카페도 들어와 있어 책만 파는 지루한 곳이라기보다는 복합 문화 공간 같은 느낌이 든다. 나중에 좀 더 여유가 생기면 국내외 유명한 곳뿐만 아니라 현지인이 방문하는 동네의 작은 서점 혹은 독립출판물을 취급하는 서점들을 방문해 보는 게 내가 하고 싶은 여행이다. 


아직 못 가본 곳들이 많은데 유명 도시보다, 관광명소보다 서점에 가고 싶어 하는 걸 보니 지치긴 했나 보다. 쉬다 왔음에도 번아웃 증후군에 가까운 상태라고 하면 주변에서 비웃을 테지. 지금까지 대략 80회에 달하는 비행을 했단다. 스스로도 믿기지 않지만 말이다. 행복한 도시 취리히의 반짝이는 호수도 우아한 목을 꼿꼿이 세우고 있을 백조도 관심 없었다. 멋진 오토바이 여행족을 보고 잠시 마음이 동했지만 그냥 푸짐한 호텔 조식으로 만족하고 방에서 하루 종일 뒹굴거렸다. 취리히 호텔의 조식은 단연 베스트였다. 사실 지금까지 호텔 조식 먹은 적이 손에 꼽기 때문에 객관적인 평가는 불가능 하지만 가격 대비 맛이 괜찮다. 3번째 접시를 끝내고 2번째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초등학교 2학년쯤 되었을까? 어린 남자아이가 손가락으로 내 맞은편 자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Sorry -' 아마 앉아도 되냐는 뜻이겠지? 고개를 끄덕이며 '물론이지'라고 말하니 털썩 앉아 일행을 불렀다. '할머니! 여기!' 그들은 한국인이었다. 

할머니로 보이는 (너무 젊고 아름다우신) 분이 앉으시며 아이에게 물어보셨다. '다 떠왔니?' 

비행 중 호텔에서 한국인을 만난 건 처음이라 너무 신기해 주책맞게 먼저 말을 걸었다. ‘한국분이세요?’ 알고 보니 할머니, 엄마, 그리고 아들까지 3대가 함께 여행 중인데 '엄마는 방에서 자고 있어요'란다. 요즘엔 엄마와 단 둘이 혹은 엄마의 엄마와 그리고 엄마와 자식이 함께하는 3대 여행이 부쩍 눈에 띈다. 나도 엄마나 아빠와 단 둘이 혹은 아이와 함께 여행하면 어떤 여행을 할까 생각해 봤다. '뭐, 가이드가 있는 단체 여행도 괜찮겠지?'

단체여행을 비스듬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옛날과는 다르게 지금은 어떤 형태의 여행이든 목적만 뚜렷하면 오케이다. 나보다 늦게 온 그들이 먼저 방으로 올라가고도 한참을 앉아 커피를 마시고 파이를 먹었다. 음... 2시간 넘게 호텔 조식을 먹었으니 아무것도 안 한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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