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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래 Sep 16. 2019

자그레브, 온통 파란

시간이 멈춰버린 도시 자그레브에서




종종 내가 어딘가를 다녀왔나 아득하게만 느껴질 때가 있다. 비행이 많아서, 피곤해서, 혹은 기억력이 나빠서 잊어버리는 게 아니고 마치 꿈만 같아서 내가 정말 그곳에 있었나 어리둥절한 것이다. 나조차도 믿기지 않는데 남들은 오죽할까. 그래서 증거를 남기기 시작했다. 처음엔 자석과 같은 기념품을 모았는데 주객이 전도되어 자석을 찾아 돌아다니는 지경이 되어 그만뒀다. 기념품 자석이 은근히 찾기 힘들다. 그래서 대신 모으기 시작한 게 바로 지도와 커피다. 뜬금없는 조합이지만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데는 아주 효과적이다. 자그레브 시내 지도를 보면서 그곳에서 사 온 원두로 내린 커피를 마시고 있으니 ‘아, 엊그제 자그레브에 있었지’ 실감이 난다.


3일 연속 밤 비행이었다. 정신을 놓기 바로 직전 비행기는 자그레브 공항에 도착을 했다. 졸린 건지, 배가 고픈 건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멍한 상태에서 앞에 먼저 가는 크루의 트롤리 바퀴만 보면서 쫓아갔다. 호텔로 가는 셔틀버스에 올라타 바로 정신을 놓아버렸던 것 같다. 간절한 커피 생각에 슬며시 눈을 뜨니 아침 출근길 정체에 셔틀버스는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이었고 크루들은 졸고 있었다.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니 때마침 파란 전차가 천천히 정차하고 있었다. ‘예쁜 파란색이네’ 멍한 정신 속에서도 감탄이 나오는 색이었다. 뒤 또 다른 파란 전차가 들어왔고 그 뒤엔 파란 버스가 지나갔다. 아니, 온통 파란색이잖아! 파란 하늘 아래, 파란 전차, 파란 버스, 심지어 소화전까지 파랗다니. 웃음이 나왔다. 아, 자그레브는 파란 도시구나! 멍했던 머릿속에 푸른색이 퍼져나가면서 커피 없이도 정신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무심하던 마음에 반짝이는 파란불이 켜지자 비행의 피로고 뭐고 사라져 버렸고 유니폼을 갈아입자마자 바로 밖으로 나왔다. 자그레브의 거리는 한산했고 여유가 가득해 저절로 느긋해졌다. 인도의 턱이 낮고 거리의 폭이 넓었고 오고 가는 차가 많지 않았다. 여기에 수시로 지나가는 거대한 파란 덩어리들이 늘어지는 게으름뱅이의 정신을 일깨웠다. 지도는 호텔 로비에서 가져왔으니 커피 원두를 사러가야 했다. 사실 가장 쉽고 무난한 선택은 스타벅스다. 어디에나 있으니까. ‘너는 커피 좋아한다는 애가 맨날 스타벅스냐?’ 쓴소리를 하는 친구들이 있는데 나는 언제나 ‘스타벅스도 나라마다 다 맛이 다르거든?’라고 응수한다. 도시마다 유명한 혹은 맛있다는 카페 찾아다니는 게 크나큰 재미 중 하나인지라 스타벅스보다는 현지 카페를 엿볼 수 있는 곳을 열심히 찾아다니고 있다. 자그레브에는 아니, 크로아티아에는 스타벅스가 없다. 들어왔다가 망한 것도 아니고 아예 생긴 적조차 없단다. 이곳의 커피가 더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반 엘라치치 광장 근처에 커피 마니아들 사이에서 소문난 커피 맛집 QUAHWA로 향했다. 건물에 붙어있는 간판을 따라 안쪽 뜰에 들어서자 낡은 건물에서 커피 향이 뿜어져 나왔다. 카페라기보다는 오래된 농장처럼 보이는 곳이었다. 그곳에서는 계속해서 콩을 볶고, 갈고,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야외 테라스 석은 이미 오후 늦게 커피를 즐기는 사람들로 만석이었다. 모든 테이블이 꽉 차있는데도 전혀 시끄럽지 않다는 게 너무나 신기했다. 공간에 답이 있는 건가? 아니면 내 기분이 그런 걸까? 평소 같았으면 와글와글한 분위기였을 게 분명한데 자그레브의 모든 곳은 마치 달리의 그림 속 시계와도 같았다. 이 곳만 다른 시간이 흐르는 게 분명했다.

커피를 좋아하긴 하지만 잘 알지는 못한다. 원두를 고를 때마다 ‘이건 무슨 향이 나나요? 이건요? 뭐가 좋을까요?’ 꼬치꼬치 물어보긴 하는데 아무리 마셔도 아몬드라던가 레몬향이라던가 혹은 말린 과일 향이라던가 도무지 모르겠다. 내 입안에서 느껴지는 건 산미 여부와 고소함 그리고 바디감이 전부다. 뭐 어쨌든 맛있는 커피를 좋아한다. 이번에도 상자 가득한 원두를 하나하나 가리켜가며 바리스타에게 물어보니 ‘프렌치 프레스라면 COLOMBIA HUILA로 하는 게 좋아’ 란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대사였다. 원두가 갈리면서 고소함이 날아와 갑자기 침이 고였고 어쩔 수 없이 카페라테를 주문했다. 바로 시내를 둘러볼 생각이었는데 도저히 그냥 나갈 수가 없었다. 더블샷 라테를 주문한 후 바깥쪽에 자리를 잡으니 사람들이 수시로 들어가 원두를 구매하더라. 이토록 커피 소비량이 높은데 스타벅스가 아직까지 안 들어온 걸 보면 크로아티아는 개성이 꽤나 강한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자그레브 시내에는 스타벅스뿐만 아니라 유명한 프랜차이즈 커피숍이나 음식점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어디를 가야 할지 지도를 훑어보며 느긋하게 라테를 즐기다 반 옐라치치 광장으로 향했다. 자그레브 시내는 생각보다 크지 않아 딱히 일정을 세우지 않아도 반나절이며 천천히 둘러볼 수 있다. 발 닿는 대로 오랜만에 걸어보자 싶어 반엘라치치 광장으로 바로 향했고 광장 한가운데에 있는 말을 탄 반 옐라치치 백작의 동상이 바로 눈에 띄었다.





이곳은 자그레브 여행의 시작점이자 마침표를 찍는 곳이다. 깃발을 따라다니는 단체 여행 관광객들도 보이고 이곳저곳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여행자들도 꽤나 많았다. 관광지임이 분명한데도 정신없고 허둥대는 여타의 동유럽 관광지와는 다르게 여유가 넘치기만 했다. 심지어 비둘기들도 광장을 걸어 다녔다. 동상 뒤편 계단을 올라서면 돌라츠 시장이 나온다. 어라? 여긴 또 온통 빨간 천막이다. 자그레브의 재래시장 같은 곳인데 싱싱한 과일을 싼 가격에 구매할 수 있다. 과일, 채소 온갖 기념품이 빨간 천만 아래 가득했다. 오랜만에 만나는 쨍한 색깔들 덕분에 그리고 카페인 덕분에 정신이 맑아졌다. 천막 사이를 요리조리 돌아다니며 눈으로만 구경해도 기분이 좋았다. 아무도 나를 붙잡지 않았다. 유럽 다니면서 ‘니하오’ 소리 안 들어본 게 얼마만인지, 호객행위하며 나를 멈춰 세우는 이 없는 게 얼마만인지.





따스한 햇살과 봄날 같은 적당한 온도와 오랜만에 느껴보는 여유까지 평범하지만 행복감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돌라츠 시장을 지나면 바로 자그레브 대성당이 나온다. 자그레브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인 대성당(성 슈테판 성당) 앞은 금빛 성모 마리아상이 우뚝 서 모든 것을 굽어보고 있다. 태양 아래 더욱 반짝이는 성모상을 보니 왠지 모르게 성스러운 기운이 가득해지는 것 같았다. 자그레브 대성당은 미사가 진행되는 맨 앞 단상까지 관광객에게 개방되어 있다. 성당을 둘러싸고 안쪽으로는 박물관도 있고 사제들이 지내는 건물도 있는데 놓치기 쉽다. 그냥 지나치지 말고 꼭 한 바퀴 둘러보자!





다시 돌라츠 시장을 지나 내리막길을 걷다 보면 다양한 상점들이 길 옆으로 늘어서 있다. 중고 서점도 있고 음식점도 있고 자석 등 기념품을 파는 상점들도 있고 내리막 길의 끝에서 방향을 틀어 다시 오르막길을 오르다 보면 스톤게이트가 나온다. 자그레브의 상징적인 장소다. 유일하게 보존된 올드 타운 성벽의 일부로 1731년 대화재 때 대부분 소실되었다고 하는데 이 곳에 있는 성모 마리아 그림만이 남아 이를 기념하기 위해 스톤 게이트 안에는 예배당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지금도 초를 피우고 소원을 비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꽃이 놓여있는 예배당 앞에서 나도 소원을 빌어봤다. 


스톤게이트에서 나와 숨이 찰 때쯤 성 마르코 성당이 나온다. 이제껏 본 적 없는 특이한 건축이었다. 13세기에 지어진 이 성당의 지붕은 빨강, 파랑, 흰색의 타일이 가득 채우고 있는 모자이크 형식이었다. 크로아티아 문장과 자그레브 문장이 새겨진 모자이크 지붕 덕분에 동화 속에 나오는 건물 같아 비현실적이었다. 어쩜 지붕을 모자이크 형식으로 만들 생각을 했는지 신기하기만 했다. 그것도 13세기에 말이다. 성 마르코 성당의 외관은 고딕 양식이고 창문은 로마네스크 양식이란다. 내부도 아름답다는데 닫혀있는 탓에 안을 둘러보지는 못했다.





성 마르코 성당 오른편에는 크로아티아 국회의사당이 위치해 있다. 모르고 보면 그냥 지나칠 정도로 평범하기만 하다. 성당보다 낮은 높이에 앞을 지키고 서있는 무장 경찰도 혹은 경비원도 없다. 크로아티아 국기와 유럽연합 국기만이 이곳이 국회의사당임을 알려주고 있다. 크로아티아 대통령이 이곳을 방문할 때면 차량들의 행렬이 늘어서 있다고 한다. 성당 주변의 모든 건물은 다 2층짜리로 중세시대의 흔적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골목길로 빠져도 아름다운 건물들 덕분에 지루하지 않다. 자그레브 시내를 걸어 다녀야 하는 이유다. 성당을 뒤로 두고 걷다 보면 성 캐서린 성당이 나오고 자그레브 시내가 한눈에 보이는 전망대가 나온다. 



국회의사당(좌) / 성 캐서린 성당(우)



로트르슈차크탑과 우스피나차 케이블카가 위치해 있다. 발음하기 너무나 어려운 이름이다. 로트르슈차크탑에는 대포가 있는데 매 정오 기준시를 알리기 위해 대포를 쏘던 전통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고 한다. 뒤늦게 알아버린 탓에 좋은 볼거리를 놓쳐 아쉽기만 했다. 이곳에는 세상에서 가장 짧은 케이블카가 자그레브의 윗마을(어퍼 타운)과 아랫마을(로어 타운)을 이어주고 있다. 55초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는데 굳이 케이블카를 이용하지 않아도 옆쪽에 있는 지그재그 계단을 따라 아래로 내려갈 수 있으니 전망대를 구경만 하고 내려가도 좋다. 내려가기 전 단순한 호기심으로 자그레브 시내가 한눈에 보이는 전망을 따라 반대쪽으로 걷다 보니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잔잔한 음악이 흐르고 간단히 마실 것도 팔고 있는데 심지어 단돈 몇 유로에 안마를 받을 수 있는 간이 의자도 놓여 있었다. 



55초 케이블카(좌) / 전망대(우)



끝 쪽에는 한 단 위로 자그마한 공원이 있었다. 자그마한 분수대에서 떨어지는 물소리, 이미 말라버린 낙엽이 밟히는 소리 그리고 바람에 부딪히는 나뭇가지와 나뭇잎 소리만 가득한 곳에서 벤치 하나를 골라잡고 발랑 드러누워버렸다. 눈을 감고 한동안 자그레브의 날씨와 그곳의 소리를 즐겼다.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계단을 내려오면 바로 유리시체바 거리다. 자그레브에서 가장 번화한 곳으로 제법 높은 건물들이 많다. 대형 은행과 유명 쇼핑 브랜드들이 늘어선 쇼핑거리다. 괜히 자라나 망고 같은 스파 브랜드에도 들렀다가 젤라또가 맛있기로 유명한 빈첵(VINCEK)에도 들어갔다가 이곳저곳 기웃거리다 보니 다시 반 옐라치치 광장이었다. 다시 시작점으로 돌아온 것이다.



전망대에서 보이는 자그레브 시내와 쉬어갈 수 있는 공원



느긋한 산책 같았던 자그레브에서의 반나절은 최근 들어 가장 여유롭고 편안한 하루였다. 중세시대의 아름다운 건물들이 그대로 남아있고 마치 그때 시간이 멈춘 듯하다. 뭐 하나 어색하게 튀는 것 없이 조화롭기만 하다. 걷다가 커피가 생각나면 커피를 마시고 또 걷다가 골목길로 빠져 일부러 길도 잃어보고 다시 걸으면 예상하지 못했던 평범한 행복과 조우할 것이다. 아무도 서두르지 않는 이곳에서는 심지어 우체부들은 자전거를 타고 우편물을 배달하고 있다. 자그레브에선 반드시 걸어 다녀야만 한다. 걱정할 필요는 없다. 딱히 길을 몰라도, 지도가 없어도 어쨌든 도착해 있을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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