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일상에세이
독일에는 크리스마스 겨울방학이 2주 정도 있다. 학기 초가 되면, 방학때 했던 소소한 일상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보내야 하는 기간이다. 처음으로 영화관을 시도해 보았다. 마침 아바타 3가 상영하고 있었다.
화려한 장면이 펼쳐지며 몰입감이 더해진다. 선과 악의 대비가 분명하고 긴장되는 액션씬이 펼쳐진다. 나이가 들어 보는 영화는 그저 영화일 뿐이었다. 그러나 여자 주인공이 내뱉은 한 마디가, 내귀에 꽂혔다.
I see you.
상황인즉, 여자주인공은 나쁜 편의 사람 아들이 자기 집에서 기거하고 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왠지 모를 무기력과 미움 원망으로 가득 차 있는 듯 했다.(2편을 보지 않아 이유를 잘은 모르겠다 ) 본인의 자식들과 이 사람아이가 같이 어울리는 것도 달가워 하지 않는다. 아바타가 아닌 다른 종족이 들어와서 사는 것이 영 못마땅한지 시종일관 차가운 태도로 아이를 대한다. 힘든 상황이 이어지고, 더 이상 희망이 보이지 않는 듯한 상황이 연출된다. 주인공 부부는 모든 문제의 원인을 이 사람 아이로 몰아가며, 이 아이가 죽어야 모든 문제가 해결될 거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남자 주인공이 사람아이를 죽이려는 순간, 여자주인공이 달려와 남편을 말리면서 말한다.
" I see you"
이제야 네가 제대로 보인다 라는 뜻이다.
그럼 이제야 네가 보인다는 뜻은 무슨 의미일까. 상대방을 나와 다른 인격체로 보지 못하고 자신의 한 부분으로 보는 경우가 생긴다. '투사'이다. 투사가 일어나는 이유는 내 정신이 온전치 못할 때이다. 힘들고 감당 어려운 상황이 생기면, 그 모든 감정을 감당하지 못하는 자신은 내 앞에 있는 상대방에게 그 원인을 돌린다. 잘못된 사랑이 그 한 형태이다. 우리는 이 잘못된 사랑의 형태를 애인사이에서도 부부사이에서도 부모와 자식사이에서도 경험할 수 있다.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 상황이 힘들어진다. 너무 사랑하는 아이라 마치 나의 일부로 생각한다. 사랑해 주고 싶은데, 아이를 키우는 일은 만만치 않다. 이것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엄마여야 하는데, 감당할 힘이 없다. 아이가 울고 떼를 쓴다. 그러면, 마치 내 자식이 나를 괴롭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사실은 나 자신의 무력감과 분노에서 기인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또한, 투사는 내가 부족한 점을 받아들이지 못할 때 생긴다. 내가 채우고 싶었지만 채우지 못한 못난 내가 상대에게 보인다. 타인은 나를 보는 거울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맑고 투명하여 내 모든 오점까지 고스란히 비추는 거울이 바로 자식이다. 그래서 자식은 투사의 가장 뼈아픈 대상이 되기 쉽다. 나의 부족한 것을 스스로 채우지 못하고 자식에게서 채우려 한다. 내가 공부를 못했다면, 아이가 공부를 못한 나의 부분은 채우는 대상으로 변한다. 내가 사랑이 덜 채워진 존재라면, 내 아이가 다른 사람에게 더 사랑받는 형태로 채우길 무의식적으로 갈망한다. 나와 자식이 분리가 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내 아이가 다른 사람에게 조금 덜 사랑받는 듯한 느낌이 들면 내가 사랑받지 못한 냥 분노하게 된다. 내가 공부에 소질이 없었다면, 자식을 통해 그 어두운 부분을 채우려고 한다. 그러나, 자식이 그것을 따라오지 못할 때, 공부를 잘하지 못했던 나 자신에 대한 분노가 마치 내 자식에 대한 분노인 양 착각하게 된다.
사랑도 마찬가지이다. 대부분의 사랑은 상대방에 있는 나 자신을 본다. 자신에게 보이는 그 안쓰러운 부분이 상대방에게 보일때, 나를 상대방에게 투사한다. 그리고 그것을 상대방에대한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그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보지 않고 내가 받고 싶은 방식대로 상대방에게 최선을 다하고 있는 자신을 보게 된다.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다 그 사랑이 되돌아오지 않았을 때 우리는 분노한다. 환상이 깨지는 것에 대한 분노이다.
난 수년간을 안갯속에서 살았다. 머릿속에 내가 생각했던 자식에 대한 내 행동이 내가 실제로 하고 있는 나의 행동과 너무 달랐다. 그 괴리감, 내가 너무 사랑하는 아이들에게 하는 나의 행동들이 객관적으로 인지가 되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이 괴리감이 너무 무서워, 상담을 받았다. 나의 무의식을 들여다보았다. 무의식을 들여다보는 과정은 너무 아펐다. 나에 대한 객관적 평가를 내가 하는 일이었다. 왜 그렇게 자라며 시종일관 힘들었는지, 왜 그렇게 관계가 힘들었는지, 왜 사랑하는 자식에게 사랑이 아닌 짜증이 먼저 나갔는지, 그 베이스에는 유기불안과 애정 결핍이 있었다. 버려지기 싫었던 불안, 존재로써 인정받지 못했던 불안, 갈구하는 대상에게 사랑받지 못했던 결핍. 이 모든 것이 채워지지 않은 불완전한 내 존재를 받아들이는 일은 진심으로 힘들었다. 그리고 많이 아팠다.
자식은 나와 다른 존재이다. 나의 일부분도 나를 대신해 무언가를 채워줄 수 있는 존재도 아니다. 그저 잠시 나의 품에서 머물다 갈 나와는 다른 인격체이다. 그러나 나를 너무너무 사랑해 주는 존재들이다. 상담을 배우고, 사주도 배우고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기 위해 그리고 다른 사람을 객관적으로 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내 자식들에게는 그야말로 제대로 된 사랑을 주고 싶었다.
애정결핍으로 세상에 던져진다는 게 유기불안으로 산다는 게 관계에서 얼마나 치명적인지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끊임없이 나를 세우려 노력한다. 지금도 노력하는 중이다.
결국 사랑은 나를 채우는 과정이다. 나를 먼저 채워야 그다음 줄 수 있다.
그래야 I see you. 할 수 있다.